토요일 오전 둘째 운동회에 참여한 후 난 완전 뻗어버렸다.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40대가 되면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다고 했는데 최근에 많이 느끼게 된다. 특별하게 몸을 많이 움직인 것도 아닌데 이유를 모르게 몸이 쳐진다거나 온 몸이 뻐근할 때가 있다. 물론 뙤약볕에 검질(잡초의 제주어)을 한 시간 이상 매기도 하고 이랑을 만든 것도 최근에 처음 한 일이다. 여하튼 엄마, 아빠를 한 시도 쉬지 않게 만든 어린이집 운동회 덕분에 토요일은 푹 쉬었다.

 

다음날 아내가 오전 11시부터 지인이 운영하는 문화행사가 있다며 놀러가라고 했다. 무슨 행사인지도 모르고 서귀진성으로 향했다. 서귀포 바다가 보이는 솔동산이란 언덕에 옛 성터가 있고 그곳에서 다양한 행사가 펼쳐졌다. 알고 보니 대학선배인 이재정 문화기획자가 진행하는 행사였는데 지난해 나와 함께 클낭펠로우(지역 혁신 아이디어 경연의 수상자)로 선정된 사이시옷의 현택훈 시인과 아내인 김신숙 시인도 행사주최자였다.

동화책을 잔디밭에 펼쳐두고 그 책들 중 한 권을 읽으면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중섭처럼 은지에 그림을 그리고 색칠할 수도 있었고, 온 나라글자로 된 어린왕자 책들을 모으고 있는 어떤 이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음악 공연도 다양했지만 제일 좋았던 것은 아이들은 놀게 하고 오랜만에 만난 아빠들끼리 수다 떨며 낮맥을 즐길 수 있는 거였다.

오후가 되니 아이들 하나씩 데리고 아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우린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지만 희한하게도 모여들었다. 아이들이 끼리끼리 모여 놀기 시작하자 우리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제주가 바뀌고 있는 이야기, 아이들 커가는 이야기를 해가며 그늘 밑에서 그냥 몇 시간을 아무 일 없이 놀았다. 날은 볕이 나서 좋았고 바람은 적당히 불어서 좋았으며 잔디밭에 있는 크로바 속에서 네 잎이 있나 살펴볼 수 있어 좋았다.

 

오후 1시가 되어 보물찾기 시간이 있었는데 그 전에 아이들은 주최 측에서 숨겨놓은 보물쪽지들을 모두 찾았다. 뽀뇨와 유현이도 대략 10개 정도의 보물들을 찾았는데 알고 보니 1인당 한 개씩만 준다고 해서 다시 그 보물들을 숨겨야 했다. 나는 그 전에 어떤 보물들이 있는지 다 펼쳐보았으나.. 대개가 지우개, 연필 등 문구용품이었다. 다행히도 그 중에 현택훈 시인의 음악에세이를 득템했고 책을 교환하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들은 나무위에 걸린 장난감 화살촉을 어떻게 내려야 하나 한 시간을 넘게 어울리며 놀았다. 뽀뇨는 거기에서 만난 아이들을 ‘7총사’로 부르며 잘 어울렸는데 특히 어린이집 다닐 때 한 반에 있었던 유노와 잘 놀았다. 유노는 남자아이였는데 뽀뇨는 남자애와 잘 놀지 않는데 재밌게 놀았다. 오후 4시가 지나서야 뽀뇨가 아파트 친구와 놀기로 한 약속이 떠올랐다. 집에 가려고 유노에게 손을 흔들었는데 유노가 “뽀뇨야, 다음 주 토요일 스카이방방에서 꼭 만나”라고 했고 뽀뇨는 “알았어. 꼭 거기서 만나”하고 큰 소리로 답했다.

문득 ‘그럼 몇 시에 가야하는 거지?’ 궁금한 매니저 아빠지만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급하게 아파트 놀이터에 도착하니 친구와 친구엄마,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린 또 다시 자전거와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어울렸다. 아파트 놀이터에는 근처 저류지를 손잡고 돌고 있는 노인부부가 있었다. 한발짝 한발짝 힘겹게,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노부부. 자전거로 3분이면 도는 거리를 노부부는 30분이 넘게 걷고 있었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 상당시간을 할애하는 노부부를 바라보며 내게도 하릴없는 시간이 곧 오겠구나 싶었다. 그러함에도 아무 일 없었던 오늘 하루가 너무 좋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동안 뽀뇨는 내게 유노를 토요일 몇 시에 볼 건지 유노아빠에게 물어보라며 재촉했고 유노가 좋다며 어릴 때 유치원 영상을 계속 돌려봤다. 며칠 갈지 모르겠지만 성가시게 되었다.

 IMG_6386.JPG » 이중섭처럼 은지화 그리기     

회전_IMG_6393.jpg » 은지화 채색

회전_IMG_6394.jpg » 아빠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좋았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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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욱
세 가지 꿈 중 하나를 이루기 위해 아내를 설득, 제주에 이주한 뽀뇨아빠. 경상도 남자와 전라도 여자가 만든 작품인 뽀뇨, 하나와 알콩달콩 살면서 언젠가 가족끼리 세계여행을 하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다. 현재 제주의 농촌 마을에서 '무릉외갓집'을 운영하며 저서로 '제주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 '제주, 살아보니 어때?'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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