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들은 열 네살 12월을 보내고 있다.
여전히 레고와 마블을 좋아하고, 게임과 웹툰을 무척 사랑하며,
맛있는 음식에 대한 열정은 어릴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녀석이다.
윤정이와 함께 종일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온 날, 모처럼 잠실의 남편 회사 근처에서
온 가족이 함께 저녁을 먹고 전철로 돌아왔다.
아들은 내 앞자리에 앉아 교보문고에서 산 마블 책에 빠져 들었다.
덕분에 아들 사진 하나 슬쩍 찍을 수 있었다.
아들이 커가는 모습은 내겐 여전히 신비롭다.
첫 아이 이기도 하고, 여자인 내가 겪어보지 못한 과정이어서 더 그럴 것이다.
열 다섯살을 앞두고 있는 아들은 소년과 청년 사이, 그 어디쯤에 서 있는 것 같다.
과자를 가지고 어린 여동생들과 다툴때는 아직도 철부지 같지만
매일 아침을 먹으며 신문을 읽고, 시국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다 큰 어른 같을 때도 있다.
변함없는 건 어릴때나 지금이나 엄마를 아주 아주 좋아한다는 것과,
잠들기전 학교 가기 전에 꼭 내가
안아주고 뽀뽀해주길 바란다는 것이다.

아들 모습을 엿보다가 잠시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누군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와서
화들짝 놀라 깨었다.
어느새 아들이 내 옆자리로 옮겨 앉아있었다.
제 키가 한참이나 더 큰데도, 기댄다면 내가 녀석의 어깨에 기대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데도
아들은 기어코 자세를 낮추어 제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댄채로 책을 보고 있다.
그래서 나도 아들의 머리에 내 머리를 기대었다.
아들은 살그머니 내 손을 가져다 쥐었다. 크고 섬세한 아들의 손이 따듯했다.
우린 그렇게 나란히 앉아 연인들처럼 서로에게 기댄체 깍지낀 손을 어루만졌다.
오래전에 우리가 한 몸이었던 때처럼 그 순간 우리는 서로에게 꼭 포개어 있었다.
마음으로 밀물처럼 뿌듯한 행복감이 차 올랐다. 가슴마저 부풀었다.
이 순간 만큼은 더 이상 부러운 게 없을만큼 완전한 행복이었다.
첫 아이란 엄마에게 참 애틋한 존재다.
부모로서 엄마로서 가장 서툴고, 가장 무력하고, 가장 부족할때 첫 아이를 만나게 되니,
기르는 시간 내내 도리없이 서툴고, 무력하고, 어렵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랬다.
이쁜데도 힘들고, 좋은데도 막막하고, 감사하면서도 어려웠다.
내가 낳은 아이인데도 모르겠고
내가 엄마인데도 어떻게 해야 좋은지 알 수 가 없던 때는 또 얼마나 많았을까.
첫 아이를 키우는 일이란 지도 없는 길을 가는 것과 같았다.
늘 좋은 풍경을 기대하지만 기대는 아주 쉽게 어긋나곤 했고, 수없이 낮선 길 위에서 두렵고,
막막하고, 겁이 나곤 했다.
아이를 내가 키운 줄 알았지만 돌아보면 아들이 내 손을 잡고 나를 이만큼 부모로, 엄마로 만들어가며
데려와 주었다. 아들이 길잡이가 되어서 동생들은 조금 더 수월하게 키워 올 수 있었다.
아들은 지금도 엄마인 내게 많은 것을 의지한다. 아직도 이렇게 기대는 것이 많냐고, 언제쯤
너 혼자 설 거냐고 툭하면 불평하고 화를 내기도 하지만 아들은 모를 것이다.
내가 얼마나 제게 의지하고 기대고 있는지..
가만 가만 아들의 손을 어루만지며 내 뺨으로 느껴지는 아들의 까슬한 머리카락을 느껴가며
나는 모든 것에게 감사했다.
이 어지러운 날들 속에 우리가 함께 있고, 여전히 서로에게 기대고 있고, 서로를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미 충분하고, 이미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을, 더 바라면 죄 라는 것을
마음 깊이, 마음 깊이 새기었다.

이면우 시인은 '오늘 쉰이 되었다'라는 시 속에서 이렇게 읊었다.
- 쉰 전, 늦게 둔 아이를 내가 키운다고 믿었다. 돌이켜보면
그 어린 게 날 부축하며 온 길이다. 아이가 이 구절을
마음으로 읽을 때쯤이면 난 눈썹 끝 물방울 같은 게
되어 있을 게다 -
나도 머지 않아 쉰이 된다.
이젠 시인의 그 마음이 내 마음이라는 것을 알겠다.
아들과 나는 서로 기대어 서로의 손을 잡고 이때까지 걸어 왔다.
앞으로도 한참은 더 같이 걸어 갈 것이다.
언젠가 각자의 삶을 살게 되더라도, 우린 늘 서로의 삶을 부축해주는 존재일 것이다.
마음을 포갠체, 보이지 않는 손은 결코 놓지 않은체 같이 갈 것이다.
잠실에서 사당까지 오는 동안 나는 아득한 생의 한 자락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 시간이 좀 더 길었으면... 이라고, 나는 젊은 날 사랑에 빠졌을 때나 해 보던 생각을
새삼 해 보기도 했다.
내려야 할 역이 가까와 오자 아들은 용수철 처럼 힘차게 일어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내 어깨 위에 놓여져 있던 그 따스한 무게를 나는 한참은 더 마음으로 품어가며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왔다.
가슴 속에 켜진 빛 하나.. 오래 오래 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