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이다.
1년 중 제일 힘든 여정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강릉이 시댁인 우리는 추석과 구정엔 민족의 대 이동에 동참해야 한다.
세 살, 여섯 살, 열 살인 세 아이를 데리고 한 겨울에 떠나는 구정맞이는 짐 싸는 일부터
어마어마하다.
겨울이라 옷도 두껍고, 얼마전에 대 소변을 가리기 시작한 막내는 막약을 대비해서 기저귀에
속옷, 내복을 넉넉히 챙겨가야 하는데 다섯 식구가 3박 4일간 지낼 옷들을 꺼내 놓기 시작하면
짐은 금새 수북하게 쌓이기 마련이다.
게다가 눈이 귀한 올 겨울에 눈 구경을 못한 아이들은 할머니 집에 가면 눈을
볼 수 있다는 기대에 설레어 있으니 혹시 모를 눈 놀이에 대비해 장갑이며 모자, 목도리에 여분의
신발까지 챙겨야 한다. 특히 장갑은 두 켤레씩은 기본이다.
설 날 큰댁에 세배 드리러 갈때는 특히나 애들 옷 차림에 신경 써야 한다. 모든 친지들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선을 보이는 자리니 이날 만큼은 특별한 때때옷이 나와야 한다. 손으로 빤
레이스 치마며 이쁘장한 옷들을 가방에 넣을 땐 주름 생길까도 신경 쓰인다.
나도 집안일 할 옷에, 세배 드리러 갈 옷 따로 넣어야 하고, 아이들이 동네 방네 입고 다녀
지저분한 때가 묻은 겨울 외투에 설 날 용 깨끗한 외투 한 벌은 또 따로 챙겨야 하니
아아아... 정말이지 짐 싸다 힘이 주욱 빠지고 만다.
게다가 집안일은 오죽 또 많은가.. 다섯 식구 밥 해 먹고 부엌도 말끔히 치우고 가야한다.
음식물 쓰레기는 말끔히 정리해서 윗 밭에 묻어야 하고, 구정 연휴기간에 이웃에게 하루 한 번
사료와 물을 챙겨주십사 부탁하고 가는 두 마리 개들에게 특식도 챙겨줘야 하고, 한파가 온다는데
닭장 비닐 지붕도 한 번 살펴야 하니, 남편과 나는 머리가 터질 것 처럼 복잡하고 바쁘다.
이 와중에도 아이들은 종이를 오리고, 책을 펴 들고, 인형을 꺼내며 쉼 없이 어지른다.
혹시 필요할지 모르는 물건 목록을 떠올려 보다가, 냉장고에 있는 상할 염려가 있는 식재료 생각에
아차.. 하고, 아이들이 할머니 집에 가져가야 한다고 내 놓는 장난감 꾸러미들 챙기다 짜증이
솟기도 한다.
정말 구정 한 번 치르려면 집안이 온통 전쟁터 처럼 뒤집어 진다.
결혼해서 10년이면 이제 구정에 고향에 내려가는 것도 좀 가뿐해지고, 아이들도 커서 제 물건
스스로 챙기고 꺼 내 놓을 나이도 될 법 하지만, 띄엄 띄엄 세 아이를 낳은 우리는
10년째 기저귀 챙기고, 속옷 챙기고, 아이들 장난감 만으로 한 짐이 되고 마는 처지라
아직도 이 아우성이다.
그래도 마음이 설레인다.
말썽은 부리지만 건강하게 자라나는 세 아이 앞세우고 떠나는 고향행은 뿌듯함이 먼저 든다.
몇 달 사이에 키가 훌쩍 커서 온 동네 엄마들의 부러움을 받고 있는 필규도 기특하고
매끈한 긴 머리 찰랑이며 생글거리는 큰 딸도 자랑스럽고, 어딜 데려가든 이쁜 짓으로 사랑받는
막내는 올 설에 친지들에게 가장 귀여움을 받을 것을 알기에 설레는 엄마 마음이다.
오고 가는 길 멀고, 챙기고 해 내야 하는 일 끝이 없어도 바리바리 짐가방에 선물, 세뱃돈에
부모님 드릴 용돈까지 넣고 출발할 수 있으니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찾아갈 고향이 있고, 연로하시지만 부모님 살아 계시고, 형제 자매들 모두 먼 곳에서 달려 올테니
부쩍 부쩍 자라는 조카들도 보고 싶고, 애쓰시는 형님과 동서도 보고 싶고, 추석과 구정에만
만나는 친지 어르신들도 뵙고 싶다.
눈도 온다고 하고, 한파도 닥친다고 하지만 명랑한 세 아이 앞세우고 대관령 넘어 찾아가는 고향을
누가 말리랴.
기다리시라. 다섯 식구 출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