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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오늘 쓴 영수증 주세요."

저녁마다 큰 딸 윤정이가 내게 하는 말이다.

그럼 나는 하루동안 쓴 영수증을 모아 윤정이에게 건네준다.

윤정이는 가계부를 펴서 영수증의 금액을 품목별로 적고 합계를 낸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된 큰 딸이 가계부를 적는 것이다.

계기는 한 프로그램이었다.

 

며칠전에 윤정이와 나는 교육방송 체널에서 뉴질랜드 아이들이 받고 있다는

PBL 수업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함께 보았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학습이 이루어지는

PBL 수업은 뉴질랜드의 모든 학교에서 진행되고 있는 학습모형이자 활동이라 했다.

 

아이들은 '친환경 놀이터 만들기'라는 주제를 가지고 자연속에 나가 자연물과

곤충들을 관찰해서 놀이터에 응용할 수 있는 디자인을 선택하고

디자인대로 모형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수치를 얻기 위한 수학 계산을 하고 있었다.

계산이 끝나면 각종 재료를 다루며 모형을 만들기 위한 목공과 건축, 과정이 이어진다.

모둠마다 다양한 아이디어를 나누고 토론하고 설명하는 자리는 물론이다.

하나의 주제속에서 미술, 수학, 과학, 건축, 발표와 토론, 목공 등 수많은 과목들이

통합되어 다루어지고 있었다. 어렵고 지루한 공부가 아니라 재미있고 흥미로운

활동 자체가 수준높은 학습이 되고 있는 것이었다.

 

미국의 한 교실에서는 아이들이 만든 가상의 화폐로 은형계좌를 만들고 투자를 하고

세금을 내고,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소비를 하는 경제활동의 모든 과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교사는 과정을 지켜보며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만 개별적으로

살피고 있을 뿐 모든 과정이 아이들 자율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언뜻 보면 놀이같지만 아이들은 그 과정을 통해서 경제활동의 기본적인 모든 내용들을

완전하게 습득하고 있었다.

 

"와... 정말 부럽다. 저렇게 배우면 정말 재미있겠다요, 엄마"

윤정이는 눈을 반짝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생활에 실제로 쓰이는 모든 일들이 배움이 된다니, 정말 근사하다"

하다가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윤정아, 우리도 해보자. PBL수업"

"어떻게요?"

"집에서, 우리끼리... 이리와봐"

나는 윤정이를 식탁으로 데려와 가계부를 보여주었다.

"올해부터 아빠랑 엄마가 여기에 가계부를 적고 있거든. 저녁마다 모여서

아빠는 아빠대로 회사에서 쓴 돈을 적고, 엄마가 쓴 돈도 적고...

그렇게 해서 일주일마다 통계를 내고 있는데 이걸 니가 적어보면 어떨까?

한달 사는데 생활비가 얼마나 드는지, 어떤 항목에 얼만큼의 돈이 들어가는지

직접 가계부를 적어가면서 살펴보는거야. 금액 계산 하다보면 수학 실력도 늘고

소비 항목을 나누고 살펴보는 건 경제생활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와.. 해볼래요. 영수증 주세요"

이렇게 시작이 되었던 거다.

싫다고 하면 그만이었는데 다행이도 윤정이는 이 활동에 흥미를 보여 주었고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윤정이와 가계부3.jpg

 

가계부를 적기 위해서는 영수증의 금액을 항목별로 구분하는 것이 먼저고

숫자를 정확히 쓰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치 지출을 적고 나면 모두 더해서

합계를 내야 하는데 가끔은 십만 단위가 넘는 지출도 있다보니 더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윤정이와 가계부4.jpg

 

2학년까지의 수학에서 십만자리 계산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윤정이는 자릿수의 개념이 약했다.  자릿수를 신경쓰지 않고 더하면

계산이 엉뚱하게 나오기 일쑤였다.

윤정이는 끙끙거리며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며 자릿수를 익히고

차근 차근 계산 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문제집에서 나오는 더하기는 재미없는데 엄마랑 같이 다녀온 미술관 입장료와

점심값을 더하는 일은 지루하지 않았다.

아빠가 차 수리비로 큰 돈을 쓴 날은 수십만원의 지출 통계를 내느라 쩔쩔매야 했다.

그런 날은 윤정이가 걱정이 많았다.

"엄마.. 이렇게 돈을 많이 쓰다가는 큰일 나겠어요. 돈을 적게 버는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 걸까요"

"그래.. 우리 다섯 식구가 한달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돈이 정말 많아.

아빠가 직장이 없거나 수입이 적으면 이렇게 살 수 없겠지.

그러니까 엄마, 아빠도 아껴쓰고 필요한 곳에만 돈을 쓰려고 가계부를 적는거야"

 

처음에는 계산이 틀리나 안 틀리나에만 신경쓰던 윤정이는 며칠 가계부를 적다보니

소비의 흐름을 읽기 시작했다.

특히 다섯 식구의 한달 식비가 만만치 않게 들어간다는 것에 놀랐다.

"그러니까 외식도 자주 하면 안되고 고기반찬만 찾으면 곤란하지. 엄마도 되도록

비싼 식재료 안 사고 알뜰하고 건강하게 밥상 차리려고 애쓰거든. 그렇게 해도

돈이 이렇게 많이 들잖아"

윤정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늘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들을 졸라대던

어린 딸은 이제 그 모든 일에 돈이 들어가고 그런 돈들이 모이면 큰 돈이 된다는 것을

직접 실감했던 것이다. 갑작스런 해고를 당한 사람들의 가정이 왜 그렇게 쉽게 무너지는지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해고 무효를 외치는지 윤정이는 이해하기 시작했다.

늘 어른들한테 부탁만 하고 의지하던 소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다보니 돈이란 결코

쉽게 쓸 수 없고,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것만해도 정말 기특한 일이었다.

 

주말이 되면 한주동안 쓴 돈을 항목별로 합산한다. 어떤 지출을 어떤 항목으로 볼 것인가를

가지고 진지한 토론을 하기도 했다. 윤정이는 경조사비니, 주거비니 하는 개념들도 새로 익혔다.

적금이나 보험같은 고정비용들은 가계부에 적히지 않는다. 그래서 윤정이가 우리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비를 파악하는 것은 아니다.

아빠가 얼마를 버는지 열살 아이가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일상에서 그날 그날 쓰이는 돈의 흐름만 익혀도 얻는 것은 적지 않다는게 내 생각이다.

자칫 귀찮을 수 있는데도 그날 그날 지출을 적고 계산하는 것 만으로도 열살 아이에겐

제법 대견한 일이다.

 

윤정이와 가계부2.jpg

 

선진국의 교육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사람들은 쉽게 우리 나라의 대입을 위한

공부를 비판하고 선진국이 부럽다고 한탄을 한다.

그러나 프로젝트 수업은 교실에서만 할 수 있는게 아니다. 집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살아가는 모든 일이 다 학습이다. 그 모든 과정을 아이와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는지만 고민하면 된다. 방법이 어려운 것도 아니다.

매일  먹는 음식을 같이 하는 일, 가계부를 적는 일, 집안에 필요한 물건을

같의 의논해서 만들어 보는 일, 1년생 화초를 가꾸거나 동물을 잘 돌보고

세금을 직접 내게 하거나, 장을 함께 보는 일, 여를 휴가 계획을 아이들에게

맡기거나, 놀이동산에 다녀오는 경비를 직접 내게 하는 일등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 응용할 수 있다.

 

흔히 부모들은 공부는 학원이나 학습지를 통해서 하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그런 죽은 공부 말고 배워서 내 생활에 직접 쓸 수 있는 일상의 모든 과정이

생생한 학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윤정이와 나는 가계부를 적는 일을 열심히 하기로 했다.

딸 덕분에 슬슬 꾀가 나기 시작하던 가계부 적기에 다시 탄력이 붙었다.

자식이 들여다본다고 생각하니 헛된 소비를 할  수 가 없다.

조목 조목 항목을 따지다 보면 과했던 지출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가계부를 쓴다고 학교 수학 성적이 꼭 좋을리도 없다. 안 좋아도 된다.

사는데 필요한 지식을 쌓아가는 일이 진짜 배움일 것이다.

그것의 아주 일부만 배운다 해도 얼마나 큰 것일까.

 

같이 외출하면 윤정이는 꼬박 꼬박 영수증을 챙긴다.

쉽게 사 달라고 조르는 일도 줄었다.

왠지 이 일을 통해 내가 애초에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고 있는 기분이다.

진짜 살아있는 PBL 수업..

지금 우리집에서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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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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