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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시절엔 영화 꽤나 보고 다녔다.

그 시절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이 가장 대중적인 문화생활이었기에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부천에서 퇴근하고 충무로며 종로까지 달려가곤 했다.

그렇게 영화를 보고 오면 친구들에게 입담좋게 영화 줄거리며 감상들을 들려주었는데

친구들은 진짜 영화를 보는 것보다 내가  보고 온 이야기를 듣는 것이 더 재미있다며

이다음에 영화평론가가 되는 것이 어떠냐는 조언을 하기도 했었다.

푸하하. 

 

그렇게 좋아하던 영화를 결혼 후에 바로 아이를 가지면서 잊고 살았다.

젖먹는 아이는 24시간 내 품에 붙어 있어야 했으니 극장에 가는 일은 애시당초 불가능했고

첫 아이에 이어 둘째 아이, 셋째로 이어지는 동안 영화는 그저 집에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영화를 주구장창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가끔 남편과 둘이 애들을 재워놓고

영화를 보기도 했지만 잘 자다가 한 번씩 울며 엄마를 찾는 어린 아이들 때문에

제대로 보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세월은 흘러 어느덧 막내는 밤중 수유를 끝냈고 자다가 엄마 찾는 일 없이

푹 자게 되면서부터 드디어 오랫동안 참아왔던 욕망이 꿈틀꿈틀 살아나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오롯이 혼자 보는 것 말이다.

남편에게 애들을 맡기고 극장에 갈 수 도 있지만 그때마다 내 부재만큼 남편이며

애들에게 해 주어야 할 보상도 만만치 않은걸 생각하면  모두가 잠 들었을때

거실에서 나만을 위한 영화를 상영하는 일이 더 근사했다.

 

예전에 보았지만 다시 보고 싶은 영화들과 얼마전에 개봉되었지만 극장에서

볼 수 없었던 영화의 DVD를 하나 하나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처음으로 혼자 보았던 영화가 '메디슨카운티의 다리'였다.

처녀시절 이 영화를 보다 마지막쯤에서 남자 주인공이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비를 맞으며 횡단보도 앞에 서서 여자 주인공을 기다리던 그 장면에선 웃음이

터져 나왔었다. 온통 비에 젖은 모습으로 사랑하는 여인의 선택을 기다리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이건 뭐, 완전 비맞은 빗자루같구만... 하며 클클거렸던 것이다.

그런데 12년만에 이 영화를 다시 봤을 땐 정말 달랐다.

무엇보다 내가 주인공의 나이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원작의 여주인공 나이가 마흔 다섯이었는데 여주인공을 맡은 메릴스트립은

마흔 네살 이었다. 

결혼, 남편, 아이들, 일상... 그 사이에서 12년을 보내며 중년에 이른 나는

프란체스카의 심정이 너무나 잘 이해되었던 것이다. 분명 불륜이지만

그 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버릴 수 없었던

그녀의 마음도 너무나 잘 알겠다.

비 내리는 거리, 남편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사랑하는 남자가 서 있는

모습을 보며 몇 번이고 자동차의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프란체스카의 마음과 빗속에서 그녀가 내려와 자기 곁으로 오기를

말없이 기다리는 로버트의 모습에서 나는 속절없이 울고 말았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에도 두 사람.. 얼마나 안타까운지..

촬영당시 예순 네살이었던 클린트이스트우드의 등근육이 그렇게

섹시했었는지도 다시 보니 알겠다. 환갑이 넘은 남자도 저렇게

매력적일 수 있다니... 코 고는 소리가 거실까지 들려오는 남편의 그 무렵을

상상하니 아직 50도 안 되었으면서도 진즉부터 불거져 나온 남편의 등살을

한 대 때려주고 싶기도 했다.

 

여고시절 이후에 30여년 만에 다시 본  '미션'은 또 어떤가.

학창시절엔 끝까지 원주민들과 함께 자신들을 죽이러 온 군대에 비폭력으로 맞서는

가브리엘 신분의 희생에 눈물을 흘렸는데 이번에 내내 마음을 사로잡은 인물은

잔인한 노예상이었다가 원주민의 편에 서게된 '로드리고'였다.

자신의 여자와 사랑에 빠진 동생을 홧김에 죽여버린 죄를 속죄하고자

수없이 원주민들을 죽였던 자신의 칼이며 무기를 그물에 가득 넣고

그 무거운 짐을 온 몸에 묶은 채로 미끄럽고 가파른, 맨 몸으로도 오르기 힘든

폭포를 기어 오르는 그 장면은 전율이 일 만큼 내 마음을 울렸다.

살아오면서 저지른 모든 죄의 무게를 온 몸으로 지고 고통을 스스로 선택해서

감당하려는 한 인간의 처절한 반성이, 수없이 쓰러지고 미끄러지면서도

스스로 선택한 고통을 피하지 않는 그 절절한 마음이 젊은 시절 '로버트 드 니로'의

감동적인 연기를 통해 내게까지 생생하게 전해졌던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그 길로 차를 몰아 한밤중에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나를 가게 한

'봄날은 간다'도  잊을 수 없다. 경포 해변을 걸으며 주인공들의 사랑과 이별을 생각하던

쓸쓸한 노처녀였던 내가 그 이듬해 강릉  남자를 만나 강릉에서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남편과 단 둘이 숨을 죽이며 보던 '색계'도 오랜만에 혼자 다시 보니 또 새롭다.

'혁명', '애국'이란 가치 아래 사랑과 젊음, 인생과 목숨까지 다 희생해야 했던 젋은이들의

모습과 그 사이에서 죽여야 할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끝내 그 사랑을 배신 할 수 없었던

한 여인의 기구한 운명은 또 다른 감정들을 느끼게 했다.

20분간 이어지는 올 누드의 정사신은 다시 봐도 어떻게 연기로 이 정도까지가 가능할까..

부부생활을 하고 있는 내게도 놀라울 정도였지만, 이 영화 한편만 보면 다른 야한 영화를

더 볼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고백했던 김두식 교수의 의견에도 격하게 공감하게 된다.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되어 다시 보니 '가위손'은 환타지 영화가 아니라,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편견과 오해속에 가두어 버리는 차별의 영화라는 것이 보이고

천재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핼프 갓'의 실화를 영화화했던 '샤인'에서는 자식의 재능까지

자신의 뜻대로 억압하려는 아버지를 보며 부모로서의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잠을 줄여야 하는 일이니 자주 즐길 수 는 없지만 이따금 모두가 잠 든 밤 나 홀로

만나는 영화는 일상의 새로운 설렘과 즐거움이 된다.

세월이 주는 경험과 지혜는 똑같은 영화를 매번 새롭게 볼 수 있게 하니

나이를 먹는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다.

'웰컴 투 동막골', '죽은 시인의 사회', '빌리 엘리어트', '시네마 천국', '쉘 위 댄스'...

한때 나를 기쁘게 혹은 떨리게 하던 영화들을 중년이 되어 다시 만나고 있다.

사랑했던 애인처럼 헤어졌던 친구처럼 다시 보는 일이 즐겁고 설렌다.

자 다음번엔 또 누구를 만날까..

 

모두가 잠 든 거실엔 그녀만의 은밀한 극장이 지금 또 문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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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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