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무김치.jpg

 

어릴때는 대학만 들어가면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막상 대학생이 되서 내가 깨달았던 것은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부족하고

혼란스럽고 어린가.. 하는 것이었다.

직장에 들어가 내 몫의 월급을 받게 되면 정말 어른이 되겠지.. 생각했던 적도 있다.

그렇지만 직장인이 되서도  여전히 내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부모의 도움이

절대적이었고 내 앞가림을 하는데는 형편없이 서툴렀다.

서른셋에 결혼을 한 것으로 이젠 정말 어른이 되었구나... 싶었지만

결혼이야말로 내가 얼마나 못하는 일이 많은가를 절실하게 깨닫게 했다.

첫 아이를 낳고서는 더 그랬다.

늘 친정엄마를 찾았다. 애 돌보느라 음식 할 틈도 없다고,  청소도 못 하겠다고

징징거렸다. 친정엄마는 수시로 우리집을 드나들며 장을 봐 주시고, 청소를 도와주시고

반찬을 만들어 주셨다.

살림이 어느정도 손에 잡힌 후에도 김치만큼은 엄마가 해 주시는 걸로 알고 살았다.

배추김치며 물김치, 열무김치며 총각김치... 철마다 맛있는 김치를 늘 엄마에게

부탁하곤 했다. 엄마는 딸 다섯 집 모두 돌아가며 김치를 담가 주시느라

언제나 바쁘셨지만 왠지 김치만큼은 내가 쉽게 도전할 수 없는 영역같았다.

 

그러던 내가 이젠 김치를 담그고 있다.

아파트를 떠나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텃밭 농사를 하게 된것이

계기였다. 씨를 뿌려 놓으면 무심하게 있어도 어느새 푸성귀들이 자라났다.

더 억세지기 전에 거두어서 김치를 담가야 하는데 처음엔 그럴때마다

엄마가 달려오셨다.

텃밭 농사가 한 해 두 해 이어지면서 엄마의 건강은 한 해 두 해 눈에 띄게

잦아들었다. 생각해보니 엄마는 어느새 칠순을 넘긴 노인이셨다.

엄마앞에선 늘 철부지로 돌아가는 딸이었지만 엄마는 이미 한참전부터

딸로부터 더 많은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막내 젖을 떼면서부터 나는 텃밭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김장김치는 물리고, 푸성귀들이 지천인 시절이 오면 엄마를 부르지 않고

내 손으로 거둬서 겉저이도 하고 김치도 담근다. 처음엔 서툴러서

핸드폰으로 레시피를 띄워 놓고 쩔쩔매기도 했지만 내가 김치를 담글때마다

아이들은 부엌을 오가며 관심을 보였고 그렇게 담근 김치는 맛있다며

환영해 주었다. 남편도 맛있다며 격려해 주었다.

식구들이 좋아해주니 더 기운이 났다.

 

늦은 나이에 결혼해서 처음으로 시댁식구들을 모두 초청해 집들이를 한 날

구미에 살던 형님이 얼갈이 김치를 담가 오셨는데 얼마나 맛있었는지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나와 나이는 같지만 8년 먼저 시집을 오신

형님은 그때 이미 베테랑 살림꾼이었다. 나보다 먼저 시집을 온 동서는

애 둘을 낳고 키우면서도 김장까지 혼자 척척 해내는 억척 살림꾼이었다.

그 사이에서 나는 오래토록 제일 서툴고 못하는 것이 많은 부족한 며느리였다.

시댁에 모일때마다 시부모님 드실 김치를 담가오던 두 며느리와는 달리

나는 그저 과일이나 고기같은 것들만 들고 시댁문턱을 넘곤 했다.

이제 조금 자신이 생겨 시부모님께 내가 담근 김치를 맛보여 드려도

되겠구나...싶었을때 시어머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어머님 살아계실때

내가 담근 김치 한번 제대로 맛보여 드리지 못했던 것이 두고두고

죄송스러웠다.

늘 제일 서툴고, 모자라고 부족했던 며느리가 이젠 김치를 담가서

시아버님께 가져다 드리게 된 것을 어머님은 하늘에서 대견해 하실 것이다.

진작부터 겁내지말고 도전했으면 될 일을 왜 그렇게 미루고만 있었을까.

 

밭에 뿌린 열무가 다 자라기도 전에 벌레들이 너무 많이 파 먹은 것을

몽땅 뽑아 김치를 담갔다. 국물 자박하게 만들었는데 남편이 맛있다며

끼니때마다 열무김치를 찾았다. 자신이 생긴 나는 또 뿌린 열무씨가

푸르게 자라나자 솎아내어 김치를 담갔다.

마른고추도 불려서 갈아 넣고 2년 숙성시킨 양파효소도 넣고 버무렸다.

남편뿐만 아니라 이룸이가 너무 잘 먹는다.

식구들이 맛나게 먹어주니 마음이 날아갈듯 뿌듯하다.

 

친정엄마 보시기엔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아무때고

이웃들을 불러 정성스런 밥상을 내 놓을 줄 알고, 김치까지

담글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비로소 어른이구나..

나 자신을 격려하게 된다.

 

이젠 간장이며 된장, 고추장같은 것들을 직접 담가보고 싶다.

내가 담근 장으로 간을 맞추고 맛을 낸 음식을 상에 올릴 수 있게 되면

그땐 정말 내가 귀한 일을  제대로 해 내는 어른이라고 스스로

인정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사회에 의미있는 일을 하고, 필요한 일에 나설 수 있으며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하게 되는 것도 분명 어른의 모습이겠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매일 먹는 음식들을 직접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또한

귀하고 소중한 어른의 역할일것이다.

이 나이에서야 비로소 이만큼 어른이 되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사는 내내 새롭게 배우고, 애쓰고, 깨달으며 가면 되는 일이니

느긋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토록 긴 세월동안 내게 맛있는 김치를 담가주신 엄마께

이젠 내가 담근 김치를 보내드려야지...

마음이 다시 바빠진다.

정말 철이 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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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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