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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정오..

오전 내내 윗밭에 감자를 심었던 남편이 달게 낮잠을 자고 있다.

아버님 병수발로 오래 방치했던 텃밭 농사를 다시 시작한 참이라 남편의 주말은 고단하다.

밭을 갈고, 퇴비를 뿌려 섞고, 고랑을 만들고 씨감자를 심기까지 족히 한말은 되는 땀을

흘려야 했다. 그렇게 애쓰고 돌아와 점심 먹기 전까지 꿀같은 잠에 빠져 든 것이다.

고맙다, 남편..

큰 일을 치르고 난 후에 제대로 쉴 틈도 없이 출장과 집안일, 농삿일에 바쁜 남편이다.

아직 마음도 힘들텐데 몸도 늘 고단하다. 그래서 남편을 살펴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혹 무리하지 않나, 어디 아픈 건 아닐까, 뭐가 필요할까..

힘든 일 지내고 났더니 남편이 한결 애틋해졌다.

그냥 집에 있는 것도 고맙고, 일 하고 오면 더 미안하고 고맙고, 애들한테 잘해주는 모습도

뭉클하다.

그런 남편이 힘들게 일 하고 와서 곤하게 자는 모습.. 가슴 사무치게 고맙다.

가만 가만 돌아다니며 집안일을 하다가 남편을 바라보면 한없이 깊게 자고 있다.

그 깊은 잠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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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살 아들은 정오가 넘도록 잠에 빠져있다.

그 잠도 이쁘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자동차와, 전철, 버스를 오가며 학교를 오가느라, 오후 네시까지

촘촘한 수업 받느라, 적지 않은 숙제 해 가느라 애 쓰는 아들이다.

크느라 까칠하고, 크느라 먹을 것 더 밝히고, 크느라 제 맘에 안 들땐 버럭거리는 아들이지만

학교 갈 때와 자기 전에 늘 나를 꼭 안아 주는 아들이다. 아직도 제 뺨에 입을 맞춰주기를

원하는 아들이다.

일요일만큼은 정오가 넘도록 푹 자고 일어나도 된다. 하루정도는 마음껏 풀어져서 깊게 깊게

자야한다. 그래야 다시 오는 고단한 한 주를 견딜 수 있겠지.

실컷 자고 일어나 맛있는 음식 찾고, 일주일간 못 본 텔레비젼 몰아보는 것도 안 밉다.

쑥쑥커서 이불이 작아보이는 것도 고맙고, 송송 돋는 여드름도 이쁘다.

제 나이답게 울퉁불퉁 잘 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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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는 아빠랑 같이 감자를 심었던 두 딸이다.

텔레비젼과 컴퓨터 게임과 트와이스를 너무나 좋아하는 딸들이지만 볕 좋은 봄날 주말을

마당에서 뛰어 노느라 그 모든 것을 다 잊을 수 있는 기특한 딸들이다.

매일 걸어서 학교에 다니는 동안 몸도 아주 튼튼해졌다.

자주 싸우고, 울고 불고, 소리지르기도 하지만 그건 다 크느라 그런 것 일뿐

햇빛 환한 마당에서는 가장 친한 친구다.

건강하고, 잘 웃고, 여전히 엄마, 아빠, 오빠를 좋아하고, 마을의 개들을 사랑하고

엄마가 만드는 음식이 제일 맛있다고 말 해주는 딸들..

이쁘다. 참 이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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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한 새 책들이 오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재미난 책들도 수북하다.

맘 놓고 책에 빠져들 시간이 넉넉하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에도 몸과 마음을 낼 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주말은 주부들에겐 더 일거리가 넘치는 날이라고 푸념할때도 있지만 , 남들처럼

여행이며 맛집같은 곳에도 못 가고 집에서 지내기만 한다고 불평할 때도 있지만

사실은 온 가족이 함께 있는 주말이 정말 좋다.

누구하나 빠지지 않고, 같이 있는 시간이란 가족이라도 자주 오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들이 한층 또렷하게 보인다.

젊은 날엔 주말에 세끼 밥 차리는 것도 화나고, 주말에도 낮잠자는 남편도 밉고

말썽부리는 애들이 지긋지긋할 때도 있었지만 이제 큰 아이도 내 품에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보인다.

밭 갈고 장작 쪼개는 남편의 건강도 당연한 것이 아니라 실은 정말 고마운 것이라는 것을

매 순간 느끼게 된다.

마당에서 뛰어 놀다가 내가 차린 밥을 먹으러 달려오는 어린 딸들을 품에 안아볼 수 있는

내 나이가 얼마나 소중한가.

 

이 험한 시절에 가족이 함께 있다는 것이, 여전히 웃고 떠들며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남편은 일하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나는 이따금 책을 읽을 수 있는 일상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땀 흘리고, 함께 웃고, 잘 쉬고, 같이 있는 주말이야말로 가장 빛나는 날이다.

멀리가서 근사한 풍경을 보고 맛난 음식 먹지 않아도 내 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고,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맞는다.

아무렇지 않게 보내는 하루야말로 가장 고맙고 감사한 날이기 때문이다.

 

주말 지나고 다시 시작된 나날들..

매일 아침 일찍 남편은 출근을 하고, 아이들은 학교에 간다.

돌아오면 내가 식구들을 맞는다.

 

눈물겹게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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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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