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 보육 기관에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는 다른 아이들의 피부색을 민감하게 인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하원하는 길에 ‘오늘 누구랑 제일 잘 놀았어? 뭐가 제일 재미있었어?’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이가 갑자기 같은 반에 있는 흑인 친구를 언급하며 “그 친구는 왜 얼굴 색깔이 갈색이야? 얼굴 색깔이 달라서 좀 이상해. 별로 안 좋아.”라고 말하는 것 아니겠어요? 순간 매우 당황했지만 얼른 머리를 굴려 얼굴 색깔이 다른 만화 캐릭터를 떠올리려 애썼습니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은 분홍색 돼지 캐릭터가 등장하는 만화 페파피그(Peppa Pig). 하지만 이건 동물들을 의인화 한 거니까 좀 아닌가? 하고 생각한 것도 잠시. 급한대로 당장 이거라도 써먹어야겠단 생각에 얼른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너 페파피그 좋아하잖아. 근데 페파는 얼굴 색깔이 무슨 색이야?”
“음.. 분홍색!”
“그래 맞아. 또 거기 나오는 수지 쉽은?”
“음.. 흰색!”
“대니 독은?”
“갈색!”
“맞아. 페파랑 페파 친구들 모두 얼굴 색이 다 다르지? 페파랑 페파 친구들처럼, 우리 반 에 있는 친구들도 얼굴 색이 조금씩 달라. 그건 이상한 게 아니라,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어서 그래.”
아이와 이렇게 짧게 대화를 하고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어갔지만, 은근히 마음이 불편하고 조급해졌습니다. 처음으로 부딪히는, ‘차이’에 관한 아이의 시선. 게다가 그동안 다른 아이들이 우리 아이의 발과 다리를 보고 수군거린 적은 있어도,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의 겉모습을 보고 ‘이상하다’고 표현한 건 처음 있는 일이어서 엄마로서 제법 충격을 받았습니다. 피부색이 다른 친구를 만난 게 처음도 아닌데 갑자기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돌이켜보면 실은 피부색보다는 다른 부분에서 그 아이에게 반감이 생긴 상황에서, 그 ‘다른 부분’을 정확히 서술하기 어려우니 가장 눈에 띄는 특질인 피부색을 들어 이상하다고 표현한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당시 아이가 드러내는 불편한 감정은 미국에 살고 있는 아시안으로서 그간 겪어온 불편하고 불쾌한 경험을 모두 끄집어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이주 초기 언젠가 남편과 길을 걷다 만난 한 중년의 백인 남성에 관한 경험입니다. 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마주친 그 남성은 우리에게 매우 호의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불쑥 자신의 팔뚝을 걷어 올려 그 팔을 우리 가까이에 가져다 댔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지요. “어이, 이것 봐. 너랑 나랑 피부색 크게 차이 안 나지? 우린 말하자면, ‘형제’ 같은 거라고.”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의 말과는 달리, 그가 정말 우리를 ‘형제’ 같은 걸로 생각할 리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같은 땅에서 나고 자란 아프리칸 아메리칸들이나 라틴계 후손들보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땅에서 이주해 온 멕시코인들보다, 멀리 아시아에서 온 우리를 더 가깝게 느낀다는 게, 그리고 그런 속내를 훤히 드러내 보인다는 게, 매우 황당하고 불쾌했습니다. 그가 정말 호의로 던진 말이라 해도, 우리는 그걸 호의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내가 그의 형제이길 바란 적도 없는데, 마치 ‘넌 내 형제로 인정해줄게’ 하듯이 던진 말을 호의라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지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면서 다짜고짜 “니 하오!” 하고 소리치고는 자기들끼리 깔깔 웃는 이곳의 수많은 대학생들, (보아하니 어디 아시안 독재국가에서 왔나 본데) “여긴 자유의 땅 미국이니 하고 싶은 말 마음껏 하고 살라”며 격려(!)하는 사람들 모두 ‘백인’들이었습니다. 아직 이런 말과 행위의 의미를 다 알지 못하는 나이이지만, 혹여나 우리 아이가 스스로를 ‘백인’과 더 가깝다고 보고 피부색이 어두운 다른 사람들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는 그런 무지하고 무례한 태도를 갖게 될까봐, 문득 겁이 났습니다.
그 날, 아이와 대화를 하며 집에 오는 내내 이 상황을 어떻게 활용해야 이 ‘처음’의 충격을 아이와 나 모두에게 긍정적인 경험으로 만들어갈 수 있을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다행히 가까이에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친구가 있어 곧장 그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친구는 처음으로 다양한 아이들을 겪게 되는 지금 시기에 아이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건 아주 중요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였지요. “물론 더 중요한 건, 지금 네가 하듯이 이런 순간들을 알고 적절히 대처하는 거지. 이런 개입이 전혀 없으면, 아이는 결국 그런 차이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법을 모른 채 자라기 쉬울 거야.” 그러면서 친구는 아이와 함께 읽기 좋은 그림책 몇 권을 권했는데, 그 중 하나가 멤 폭스(Mem Fox)의 그림책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Whoever You Are)이었습니다.
이 그림책에는 다양한 모습을 한 아이들이 등장합니다. 머리카락 색깔도, 눈매와 코도, 피부 색깔도 다른 아이들이지요. 아이들이 사는 곳이 어딘지에 따라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모습도, 아이들이 뛰어 노는 땅의 모습도, 일상의 모습도 모두 다르다고, 그림책은 일러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것이 달라 보이는 가운데서도, 모든 아이들이 ‘나와 같은’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마음’(heart)이지요. 그게 누구든, 어디에 있든, 세상 모든 아이들이 나처럼 웃고, 나처럼 울며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그 아이들이 모두 나와 같은 ‘마음’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그림책은 말합니다. 어디에서 살건 어떤 모습으로 살건 누구에게나 삶의 기쁨이 있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마음도 있다고,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누구에게나 마음의 고통이 있다고, 다쳤을 때 피 흘리고 눈물 흘리며 아파하는 마음이란 게 있다고 알려주지요.
아이는 그날 이후, 이렇게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아이들이 등장하는 그림책을 몇 권 더 보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어린이집에서 다양한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시간이 점점 늘면서 아이는 처음 가졌던 그 ‘이상한’ 느낌에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그로부터 1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어린이집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J(흑인 남자 아이)와 A(히스패닉 남자 아이)라고 말합니다.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J와는 올해 서로 다른 반에 배정되었는데도, 바깥 놀이 시간에 놀이터에서 만나면 서로 반갑다고 껴안고 손을 잡고 내달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다른 아이들이 피부색은 물론이고 발과 다리 모양이 다른 우리 아이를 대하는 태도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 스스로도, 교사들도 크게 드러내놓고 의식하지 않는 분위기여서인지, 다른 아이들도 크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래도 뭔가 ‘다르다,’ ‘주의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어서, 가끔 우리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다 넘어지면 다른 아이들이 달려와 우리 아이를 살펴줍니다. 특히 J가 가장 먼저 달려와 살펴주지요. 다리는 괜찮으냐고, 아프지 않냐고 물어봐주고, 흙먼지를 털어주고, 안아주면서요.
그런데 이게 정말, 책이나 어른들의 가르침, 적절한 교육과 개입 때문에 생기는 변화일까요? 글쎄요, 어쩌면 아이들은, 우리 어른들보다도 더 먼저, 더 빨리,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김은 다르지만, 모두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게 우리라는 걸요. 어른들은 책을 찾아보고, 조언을 들어가며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겨우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아이들은 그저 함께 어울려 시간을 보내며 서로가 얼만큼 같은지, 또 어디가 다른지 자연스레 깨닫습니다. 중요한 건, 그렇게 다양한 모습을 한 친구들과 어울려 놀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있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누구는 못 살아서, 누구는 생김과 능력이 달라서 함께 어울릴 수 없다면, 누구는 시간이 없어서, 누구는 공간이 없어서 다른 아이들을 만나 교감하며 뛰어놀 수 없다면, 아이들은 점점 모르게 될 겁니다. 세상엔 나와 다른 생김을 한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나처럼 웃고, 나처럼 울며 살아간다는 걸요. 나의 사소한 말과 작은 행동에 다른 아이들이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행복해할 수도 있다는 걸요. 어른이 될수록 그 단순하고도 명백한 사실을 자꾸 잊는 이유는, 우리가 어른이 될수록 점점 더 나와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만을 찾아 어울리고 무리를 지어 살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종종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학부모 자원활동을 하느라 아이들과 어울리곤 합니다. 바깥 놀이 시간에 누군가 넘어져 울면 달려가 일으켜주고, 누군가 엄마가 보고싶다며 울면 다가가서 “나도 우리 엄마 보고 싶어. 근데, 엄마 아빠는 세 시가 되면 우리를 데리러 오잖아! 너무 슬퍼하지마!” 하고 달래주고 안아주는 아이들을 보면 새삼 어른인 내가 부끄러워집니다. 내가 남의 슬픔을, 남의 고통을 보고 다가가 진심으로 이해한다 말하며 안아준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면, 부끄러워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르게 생겼지만 누구에게나 ‘마음’이란게 있단 걸, 그래서 누구나 어떤 일에 행복해하고 어떤 일에 상처받는다는 걸 우리 어른들이 늘 기억하며 산다면 세상이 지금보단 조금 더 좋아질 수 있을까요? 작은 일에도 엄마에게, 선생님에게, 또 친구들에게 고마움과 친밀감을 표현하며 예쁜 카드를 손수 만들어 주는 내 아이의 마음을 보며, 다시 생각합니다. 이 마음을, 이 사랑을, 그리고 깨달음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말입니다.
<엄마에게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하트가 여럿 그려진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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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책: 멤 폭스,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