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나에겐 많은 영웅이 있었다. 하늘을 나는 슈퍼맨, 건물을 맨손으로 올라가는 스파이더맨.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어깨에 두른 보자기는 곧잘 내 등을 덮었다. 슈퍼맨~ 소리를 지르며 동네를 한 바퀴 돌면 난 어느새 더 이상 꼬마가 아닌 슈퍼맨이었다. 원하는 옷을 스스로 골라 입기 시작할 즈음 내 마음 속 영웅들은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라는 걸 알아가기 시작했다. 생각이 변하는 것도 물감이 퍼지는 것과 같아서 마음 속 영웅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기보다는 조금씩 흐릿해갔다.
또 다른 영웅을 찾아야 할 즈음 TV 속에 한 사람이 보여다. 내 아이는 단 한 번도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겠지만 그는 다재 다능했다. 우람한 근육은 없어도 주변에 보이는 못 하나 클립 하나를 이용해 자신과 타인을 위험에서 구출해 냈다.
‘맥가이버’가 생각이 난 건 화장실 문고리를 바라보면서였다. 손잡이와 문 사이가 조금씩 벌어지더니 결국 문손잡이가 덜렁거린 채 밖으로 튀어 나왔다. 평소에는 잘 쓰지 않던 드라이버를 찾아 손에 쥐었다. 주.부. 맥.가.이.버. 주부가 되어보니 주부들은 음식을 만들고 집안을 청소하고 빨래만 하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때로는 주부는 가끔씩 수도꼭지 호수를 갈아야 했고, 덮개를 열고 전등을 갈아 끼우기도 해야 했다. 겨울에 세탁기에 급수가 되지 않으면 연결 호수를 살펴보며 원인을 찾아야 한 적도 있었다. 이번에 내게 주어진 임무는 바로 화장실 손잡이를 고치는 일이었다.
맥가이버처럼 물건을 이용하는 지식은 없었지만 나에겐 지식을 연결해주는 인터넷이 있었다. 인터넷 동영상을 찾아보면 세면대를 고치는 일부터 문고리 수리까지 각종 정보와 영상들이 가득했다. 먼저 화장실 손잡이를 흔들어보니 화장실 밖 손잡이와 화장실 안 손잡이가 서로 연결돼 있었다. 손잡이 위 동그란 덮개부터 풀었다. 일단 성공. 손잡이를 문에 분리해보니 안 쪽에는 두 개의 나사와 함께 연결장치들이 보였다. 나사는 헐거운 상태였다. 손잡이가 헛도는 이유는 나사가 단단히 조여지지 않아서라고 했다. 별 거 아니네. 준비한 드라이버로 나사를 조였다.
문제의 원인을 해결했으니 이제 원래대로 원상복구를 하면 끝이었다. 출장 수리비 2만원을 벌었다. 으.쓱. 아이를 돌보기 전에는 전등 하나를 갈아 끼기 위해서 두꺼비집을 내릴 만큼 무지했었는데, 어느덧 화장실 손잡이를 풀어내 안쪽 부품 나사까지 고정을 하는 실력까지 갖췄다. 맥가이버가 부럽지 않았다.
이제 거꾸로 덮개와 손잡이만 고정하면 그 동안 골칫거리인 화장실 손잡이 수리가 끝이 났다. 진작 할 걸. 일을 미루는 건 결국 두려움 때문이라던데 사실 난 손잡이 수리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풀릴 때에는 슬슬 풀리던 문고리 덮개와 손잡이가 다시 조이려고 했더니만 내부 부속품과 서로 맞물리지 않았다. 부품을 돌려보며 서로 들어가고 나온 부분을 확인한 뒤 다시 조여보았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목적지를 향해 갔지만 돌아오는 길이 낯선 것처럼 부품을 풀어내고 다시 복구하는 일은 서로 다른 작업을 하는 듯 했다.
힘이 부족했나? 힘을 줘 손잡이를 밀어 넣었다. 안쪽 나사와 맞물려야 하는 손잡이는 여전히 헛돌았다. 덕분에 엄한 문짝만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한 번 시도하고 두 번 시도하고. 좀 지치네. 일이 좀처럼 풀리지 않을 때에는 쉬는 것도 길이라는 생각에 잠시 쉬기로 했다. 화장실 밖으로 나가려고 손잡이를 돌렸다. 덜거덕. 손잡이가 헛돌았다. 다시 손잡이를 돌렸다. 여전히 덜거덕 소리만 났다. 문이 닫힌 채 손잡이가 겉돌기만 했다. 문은 꿈쩍하지를 않았다.
화장실 안은 두 걸음보다 조금 더 넓었다. 세면도구와 거울, 십자 드라이버.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 손잡이 안 쪽 부품까지 다 뜯어낼까 란 생각이 들었지만 연결고리가 자칫 잘못되면 부품 가격만 10만 원 가까이 든다는 얘기가 생각이 났다. 2만 원을 아끼려다 10만 원을 낸다? 아무리 주부라도 지키고 싶은 자존심이 있다. 맥가이버는 드라이버 하나를 가지고 많은 걸 하던데 난 쾅 닫힌 문 앞에서 필요한 건 드라이버가 아니라 휴대폰이었다. 그저 손잡이가 뜯겨져 나간 채 내부 부품을 드러낸 문고리만을 바라보았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화장실 안 기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변기에 앉으면 맞은 편에서 항상 나를 바라보았던 비상벨. 비상벨 옆에는 전화벨도 나란히 있었다. 맥가이버와 내가 다른 건 난 최신 아파트에서 산다는 거다. 전화벨을 눌렀다. 경비실과 연결될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시 눌렀다. 역시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사를 온 날부터 항상 궁금했던 변기 앞 전화벨은 아무런 작동을 하지 않는다는 걸 이 날 알았다. 그래도 비상벨이 있으니 비상벨을 누르면 경비실에서 나를 찾아와 꺼내주겠지 란 생각에, 비상벨을 눌렀다.
비상벨은 전화벨과 달랐다. 비상벨은 집안 곳곳에 울려 퍼졌다. 비상이 발생했습니다. 여성의 목소리와 섞인 기계음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던 전화벨과 달리 우렁찬 목소리를 자랑했다. 비상이 발생했습니다. 비상이 발생했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화재 경보도 몇 번 울리고 말던데 우리 비상벨은 끊임없이 이 집안에 큰 일이 일어난 걸 알렸다.
휴대폰 벨소리가 들려왔다. 관리실에 입력한 내 번호를 찾아 전화를 한 모양이다. 조금 지나 거실 전화벨이 울렸다. 비상이 발생했다는 목소리와 어우러진 거실 전화벨 소리. 하모니도 그런 하모니가 없었다. 비상 상황인데 전화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 건가? 관리실이시죠? 저에게 비상이 발생한 게 맞습니다, 라고 대답이라도 하라는 건가. 괜한 화풀이를 관리실에 했다. 이런 감정을 심리학에선 화풀이라고 하지 않고 ‘전이’라는 어려운 말을 썼다.
한참 울리던 전화벨이 멎었다. 전화벨 소리가 멎자 비상벨 목소리는 더 힘차게 들렸다. 여성은 여전히 비상이 발생했습니다, 고 소리를 질러댔다. 잠시 뒤 현관문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현관 앞에 사람이 왔다는 생각에 큰소리로 말했다. 화장실에 갇혔어요! 아, 무너지는 자존심. 자존심을 접고 큰 소리를 질렀건만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현관 초인종 소리가 몇 번 더 울렸다. 쿵. 쿵. 쿵. 이제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화장실에 갇혔어요!
비상이 발생한 집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올 경비 아저씨를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미안도 했다. 비상이 울리는 집에 들어오기가 겁이 날 테니까. 손에는 곤봉이라도 들고 있지는 않을까. 좀 더 조심할 걸이란 생각일 들 즈음, ‘툭’ 소리와 함께 갑자기 앞이 안보였다. 대낮에 문이 닫힌 화장실 안에 불이 꺼졌다. 내 손을 얼굴 앞으로 가져다 대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드디어 작전을 개시하는구나. 그리고 전기가 들어왔다. 집안에 들어오셨나? 아파트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는데.
이제 더 이상 비상이 발생했습니다 란 목소리는 들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전화벨 소리도 현관벨 소리도,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관리실이 한 건 전화를 걸고 현관문을 찾아 벨을 누른 뒤 문을 두드리고 전기를 껐다 킨 것이 전부였다. 비상이 발생했는데. 기대했던 경비아저씨의 구조 작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 때에 난 비로소 느꼈다. 난. 갇.혔.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
고개를 숙여보니 발가락이 보였다. 꼼지락, 꼼지락. 심심하니 평소에 보지 않던 발가락을 다 쳐다봤다. 거울을 쳐다보니 입가에 주름에 눈에 띄었다. 늙었구나. 볼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부푼 볼 로 주름을 없앴다. 시간이 궁금했다. 손목 시계도 차지 않고 휴대폰도 없으니 시간을 알 방법이 없었다. 처음에는 맥가이버로 시작을 했는데 지금은 영화 ‘터널’의 한 장면이 되어버렸다. 아이가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밖에서 아이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하면 아이 반응이 어떨까. 얼마 전에 나보고 백수라면서 그 이유를 묻자 자신과 정신연령이 비슷하기 때문에 돈을 벌 수 없다던 아이의 말이 생각이 났다. 아이는 우리집은 굿네이버스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고 있다고 믿었다. 대낮에 화장실에 갇힌 걸 보니 아이의 말이 꼭 틀린 것 같지는 않았다. 나사를 조일 때까지만 해도 어깨가 으쓱거렸건만. 세면대에 낀 물때가 보였다. 청소나 하자. 어렸을 때 외할머니는 틈이 나면 주변 청소를 하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청소를 좋아하시는 게 아니라 심심하셨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세면대 청소가 끝난 뒤 욕조 위에 걸터 앉아 화장실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그만 입에서 하품이 나왔다. 지루한 걸까, 란 생각을 하다가 문득 주변을 둘러봤다. 산소가 부족해지는 건 아니겠지. 비상벨을 다시 쳐다봤다. 아이가 올 때가 되었는데. 한 번 나오기 시작한 하품은 계속 나왔다. 오랜 사회부 기자 생활을 할 때에는 연쇄살인범 앞에서도 큰 소리를 쳤건만 아이를 키우다 보니 부쩍 겁이 늘었다. 아이에게 부모는 나 혼자라는 생각을 하면 더 그랬다. 비상벨을 다시 누를까 하다가 다시 전화벨이 울리고 말 거란 생각에 화장실 문 앞으로 다가갔다. 나사 한쪽으로 엄지 손가락만한 긴 철심 하나가 보였다. 문 안과 겉을 가로지르는 철심 하나. 손가락을 넣어 이리저리 돌리자, ‘딸깍’ 소리가 났다. 문이 열렸다.
시계를 쳐다봤다. 시간은 1시간 남짓 지나 있었다. 관리실에 전화를 걸었다. 화장실에 갇혀 비상벨을 눌렀다고 하니, 상대는 “아 그랬었군요.”라는 짧은 말을 남긴 채 전화를 끊었다. 왜 비상벨이 울렸는지 이해를 했으니 알았다는 반응. 세상은 타인의 위험이나 불안에는 그렇게 관심이 없었다. 가끔씩 신문지상에 오르는 독거노인의 사망과 오랜 뒤 발견의 내용이 떠올랐다. 비상벨을 울려도 나를 찾아주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일요일에 같이 식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