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위하여2.jpg

 

지난 밤, 식구들이 모두 잠 든 후 제일 늦게 목욕탕에서 씻고 나와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자정이 다 된 시각에 울리는 전화벨소리는 다급함과 불길함이 먼저 느껴진다.

교통사고 후 재활 치료중인 아주버님한테 혹 무슨 일이? 친정 부모님?

수건을 집어 던지고 전화를 받으러 달려가는 그 짧은 시간동안 별별 생각을 다 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더니

".... 엄마... 저예요"

숨 죽여 낮으막하게 얘기하는 아들 목소리다.

"왜, 무슨 일이야?"

".... 저기요.... 혹시 내일 시간 있으세요?"

"응, 별일은 없어, 왜?"

"... 표 좀 예매해 주실 수 있나 해서요"

이어지는 설명은 주말에 '코믹 월드'라는 박람회가 열리는데 그 표를 세장 구해달라는 거다.

인터넷 예매는 벌써 끝났지만 상암동 MBC에 가면 표를 판다고, 거기 가서 표를 사 주었으면 했다.

상암동? MBC까지 가야 한다고? 여기 대야미에서? 표 세장 구하려고????

".... 엄마.. 꼭 구해주세요. 부탁드려요"

"일단 알았어. 무슨 행사인지 검색 좀 해보고"

"...... 사랑해요"

아들은 이 말을 속삭이고 전화를 끊었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기숙사에서 몰래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느라 목소리를 죽여서 얘기하고 있는

아들 얼굴이 떠올랐다. 얼마나 절실했으면 그 시간에 내게 전화를 했을까.

부탁이예요... 사랑해요.....

녀석, 나를 아주 꼼짝 못하게 하는 말들이 뭔지 너무 잘 아는구만. 쳇.

어떤 행사길래 열여섯 아들이 한 밤중에 전화를 걸어 이렇게 간곡하게 부탁을 하는지, 아무렴

내 새끼가 엄마를 믿고 부탁을 하는데 지구 끝까지라고 가서 내 기어코 구해볼테다.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졌다.

말리던 머리도 잊고 주저앉아서 폭풍 검색에 들어갔다.

코믹월드라.... 오호라... 코스프레 콘데트스에 만화 동아리들 행사에, 에미메이션 인기 케릭터 관련

물건들 전시에 판매도 하고... 그러니까 만화 덕후들이 모여서 좋아하는 주인공들로 만들어진

굿즈들을 사고 구경하고 유명 케릭터 복장을 한 코스어들 사진도 찍고 보는 그런 행사렸다.

흠... 아들이 좋아할만 하구먼.

그런데 행사 당일에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면 된다는데 왜 상암까지 가야 하는걸까?

이상해서 바로 톡을 날렸더니 그게 줄이 엄청 길어서 표를 미리 사면 바로 들어가는데

당일날 가서 사면 2-3시간 기다려야 한다고..

그런데 상암동에 있는 더쿠샵에 가면 표를 살 수 있다고...

그러니까 그 시간 좀 아낄 수 있게 엄마가 애 좀 써 달라는 말 이구나.

저까지 세명이 간다는데 다른 두 명이 누군지는 비밀이라고 안 알려주면서

(누군지 짐작간다, 이넘아!!)

그 엄마들한테는 이런 부탁 해 봤자 씨알도 안 먹힐테지만 우리 엄마는 분명 들어주실꺼야..

생각해서 오밤중에 내게 전화를 했겠지.

녀석.. 내가 그런 엄마인것은 일찌감치 알아가지고설랑은..

하여간에 나란 사람은 사랑하는 남자들 부탁엔 너무 약하다.

연애할때도 사랑하는 남자의 부탁이면

지구끝까지라도 달려가 구해올 태세를 하고 눈빛을 이글거리며 그 남자들만 바라보았었지. ㅋㅋ

그러니 어느 남자가 내 곁에 남아있겠는가.

그런 뜨거움은 사람을 쉽게 데이게 한다는 걸, 그래서 결국 떠나게 한다는 걸 젊은 날엔 몰랐다네.

데일 듯 뜨거웠던 마음이 다가오면 편안한 따스함으로 거듭나기까지 20대의 모든 날들이 걸렸었다.

그리고서야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었지.

그런데 열여섯 아들이 오랜만에 내 뜨거운 열정에 불을 지피는 것이다.

오냐, 아들아 엄마가 간다.

사랑하는 남자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다면 물 불 안 가렸던 이 엄마다.

사랑을 위하여3.jpg

 

젠장... 그런데 오늘은 서울이 무려 영하 14도까지 내려간 징그럽게 추운 날 이었다.

두 딸들 등교 시키고 꽁꽁 얼어붙은 닭장에 더운 물 부어주고, 개 네마리 밥과 물을

챙겨준 후에 단단히 입고 길을 나섰는데...

젠장... 내가 사는 대야미에서 상암동은 너무 멀다.

서울역까지 4호선을 타고 가서 공항철도로 갈아타고 디지털미디어 센터에서 내려서

마을 버스로 두 정거장을 더 가서 걸어가라는데 아들 덕에 한번도 안 타본 공항철도를 다 타게 생겼구나.

서울역에서 공항철도를 갈아타는 길은 참말로 멀고 복잡했다. 외국인들은 이 복잡한 길을 어떻게

찾아가나.. 나이 드신 어르신들은 다리 아파서 어떻게 걸어가나.. 환승은 왜 이렇게 복잡한가..

길 눈 어두운 사람은 환승하다가 복장 터지겠구나... 궁시렁거리며 상암동까지 갔다.

마을버스를 타고 MBC 앞에 내렸는데 황량한 길가에 거대한 건물들.. 그런데 아들이 말한

그 표를 판다는 '더쿠샵'은 어디 있는거야.

바람을 가르며 MBC 정문까지 걸어갔더니 유명한 사람 조형물 앞에서 왠 사람이 이 추운날

비닐옷을 입고 촬영을 하고 있다. 방송에 나오기 참 어렵구나. 저렇게 5분만 있어도 얼어죽겠는데

촬영은 내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안내를 받고 다시 나올때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사랑을 위하여4.jpg

 

MBC 건물 맞은편에 있는 누리몰 지하까지 가서야 아들이 말한 '더쿠샵'을 찾았다.

더 쿠샵인줄 알았는데 '더쿠 샵'이구나. 덕후들을 위한 물건을 파는 가게라는 뜻 이었다.

사랑을 위하여5.jpg

 

당췌 신가하고 요상한 물건을 파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마침내 코믹월드 표 세장을 구했다.

어찌나 안심이 되던지 마음이 다 놓였다. 표는 가방 안에 단단히 챙겨 넣었다.

비로소 여유가 생겨 가게를 돌아보았다. 이런 물건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좋아하겠구나.

딸들을 위해 인스와 마쉬멜로우를 사서 가게를 나왔다. 아들을 위해서는 오만 노력을 다 하는데

착한 딸들은 아들만큼 까다롭지 않아서 별로 큰 애를 써 본 적이 없는게 새삼 미안했다.

이룸이가 방탄소년단 콘서트 티켓을 구해달라고 했지만 그거야 전세계의 모든 펜들이

다 원하는 일일테니 아예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았다

사랑을 위하여6.jpg

 

다시 추운 거리로 나왔더니 벌써 11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아홉시 조금 넘어 집을 나서서 두 시간 가까이 걸린 셈이다. 

 몸이 덜덜 떨려서 한가한 카페에 들어가 달달한 타르트에 라떼를 시켜 몸을 녹였다.

힘드네 어쩌네 해도 생각해보면 난 이런 일을 참 좋아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탁을 받고 그 사람을 위해 애 쓰는 일 말이다.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는 기쁨,

나를 필요로 한다는 행복을 느낄때 내 에너지가 최고로 솟아 나오곤 했다.

젊은 날 좋아했던 사람이 그때 한참 심각했던 '자하드'니 하는 성전 관련 뉴스에 대해 이야기하다

'이슬람'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다는 말을 꺼냈는데 그날로 도서관으로 달려가 라이프 세계백과

사전에서 '이슬람'편을 빌려 밤 새워 다 읽고 A4지 20장으로 요약해 그 다음날 건네주었었다.

대학시절 좋아했던 남자들 대신 리포트를 써 주는 일도 흔하게 했었다.

남편과 살짝 썸을 타던 때 남편이 미국에서만 판매하는 특정 브랜드 시계를 구하고 싶어했는데

그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해외 직구가 가능한 때가 아니어서 미국에 사는 지인에게 부탁해

구매를 해서 항공편으로 전해받아 남편에게 건네주기도 했었다.

인터넷 예매따위 없던 시절, 내게 맘을 주지 않는 남자와 영화 한 편 같이 보고 싶어서

서울극장까지 달려가 줄 서서 영화표를 산다음 마치 공짜표를 쉽게 얻은 것 처럼 내밀며

같이 영화보러 가자고 말 하던 젊은 날엔 늘 그랬다.

사랑 앞에서는 얼마든지 약해지고, 애써보고, 나를 기울일 수 있었다.

몹시 추웠던 오늘,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서 왕복 네 시간을 바쳤다.

내 사랑하는 젊은 남자는 이 표를 받고 몹시 기뻐할 것이다.

그 생각만으로도 나는 이미 보상을 받는다.

뜨거웠던 시절이 지나가고, 사랑이 일상이 되고, 그래서 더운 마음을 잊어버린채 지내고 있었는데

이렇게 한 번 내 가슴을 훅 휘저어 아직도 여전히 가슴 밑에 이글꺼리는 뜨거운 마음의 불씨를 되살려내는

아들이 있다. 덕분에 다시 알아졌다. 화롯불처럼 꺼진것 같아 보여도 슬쩍 재만 거두면 한결같이 이글거리는

그 마음이 고스란하게 있다는 것을.. 그게 나라는 것을..

아들한테 표를 구했다는 톡을 보내면서

너는 애미를 위해 불로초를 구해오거라... 고 써서 날렸지만

아들의 갑작스런 부탁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을 다녀왔던 일도

평범한 일상의 새로운 자극과 모험이 되었으니 즐거웠다.

이런 일, 수시로 부탁한다면야 어림도 없지만

다음에는 미리 미리 일정 챙겨서 스스로 준비하라고 이르겠지만

너무 급할때, 너무 절실할때 엄마를 믿고 그 마음 보여주고

부탁할 수 있는 그런 관계는 언제까지나 지켜가겠다.

 

그게 아들과 나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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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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