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jpg

 

피아노를 샀다.
결혼 10년 동안 내내 고대하던 일이었다.
아이들에게 엄마가 돈을 벌면 제일 먼저 피아노를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었는데 올 해 1월에 나온
책의 첫 인세를 받았을때 그 약속을 떠올렸다. 여기저기에 글을 써주고 받은 원고료도 열심히
모아서 드디어 400만원이 되었을때 나는 망설이지 않고 피아노 가게로 달려갔다.
그리하여 30년 된 야마하 피아노가 딸들 방에 들어왔다. 처음엔 국내산 새 피아노를 사려고 했는데
80년대 중반에 나온 야마하 피아노 소리가 너무 예뻐서 마음을 바꾸었다.
피아노의 수명이 80년 이상 간다고 하니, 이 피아노는 이제 서른 살, 사람으로 치면 제일 혈기
왕성한 때라 하겠다.

 

딸이 다섯이나 되었던 친정은 늘 궁핍했지만 아빠는 30여년 전에 피아노를 사 주셨다.
그것도 반짝반짝하는 새 피아노였다. 가난했지만 음악을 늘 사랑하셨던 아빠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아빠는 '현대 여성은 악기 하나쯤 다룰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던
앞선 분이셨다. 그래서 우리 딸들은 모두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다.
그 시절, 집에 피아노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레슨을 다녀오면 책상위에서도 밥상위에서도 손가락을 쉬지 않았다.
피아노 치는 것이 즐거웠다.
레슨은 체르니 30번의 중간쯤에서 끝나고 말았지만 학원을 그만두고나서도 틈만 있으면 피아노를
치곤 했다.

 

아빠가 사주셨던 삼익피아노는 그 후 집안이 기울면서 오래 천덕꾸러기처럼 좁은 집안에 자리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다섯 딸들이 한 방을 쓰는 동안 한구석에 있던 피아노는 가구처럼 잡동사니를
올려놓는 선반처럼 쓰였다. 그 위에 쌓인 물건을 치우고 쳐보기에는 사는 일이 너무 고달팠고
늘 밤늣게 들어오고 주말이면 일을 만들어 집을 나가는 동안 피아노를 칠 여유는 없었다.
다시 피아노를 만난 것은 부천의 한 시민단체에 취직을 하면서였다. 강당에 낡은 피아노가 있었다.
직원 모두가 퇴근을 하거나 주말에 혼자 나와 일을 하게 될때 그 피아노를 치곤 했다.
손은 다소 굳었지만 예전에 즐겨치던 곡들을 손가락은 기억을 하고 있었다.
다시 악보를 구해 내가 좋아하는 곡들을 떠듬떠듬 치는 날들은 행복했다.

친정 자매들이 하나둘 결혼을 하면서 친정을 떠나고 드디어 서른이 넘은 내가 결혼을 하게 되었을때
나는 그 낡은 피아노를 이웃에게 주어 버리고 피아노가 있던 자리에 새 장농을 사서 들여놓고
친정을 떠나왔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나서야 그 피아노를 내가 시집올 때 가져왔었더라면...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젠가 꼭 다시 피아노를 사야지, 다시 배워야지..생각만
했다.

 

첫 아들에 이어 두 딸을 낳았더니 딸들은 피아노가 있는 집에만 가면 피아노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 모습을 보며 어서 피아노를 사야겠구나 생각했다. 블로그를 오래하다보니 조금씩 원고 요청을
받게 되었는데 원고료를 받을때마다 이 돈을 모아서 피아노를 사면 되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첫 책을 쓰게 되었고 덜컥 큰 돈을 인세로 받게 되자 오래 마음에 품고 있던
계획을 실현하게 된 것이다.

 

피아노가 오는 날은 이삿날처럼 바쁘고 흥분되었다.
제일 구석에 있는 딸들 방까지 피아노가 지나는 길에 있는 살림들을 다 들어내고, 딸들 방의
가구와 물건들을 모두 들어내어 다른 곳으로 옮기고 다시 배치하는 대공사를 한 끝에 드디어
피아노가 들어왔다.
첫 피아노가 생겼던 날로부터 30여년 만에 서른 살 된 피아노를 다시 만나게 되니
이 피아노가 마치 30년 전의 그 피아노같은 정이 느껴졌다.
아파트가 아닌 우리 집에서는 언제고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피아노를 칠 수 있다.
두 아이들이 매달려서 내가 맘 먹었을때 마음대로 쳐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여유가 생겨
피아노 앞에 앉으면 마음이 설레인다.
피아노가 들어온 날 두 딸들을 데리고 시내 서점에 가서 예전에 배웠던 악보집들을 사왔다.
세광출판사에서 나온 '명곡집'은 30여년 전에 내가 배웠던 표지 그대로여서 너무나 반가왔다.
'엘리제를 위하여'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코시크스의 우편마차', '로미오와 줄리엣 테마'
등 내가 좋아하고 즐겨 치던 곡들을 내 집에서 다시 치고 있으려니 뿌듯한 행복감이 마음에
차 오른다.

 

조실부모하시고 고학으로 대학을 마치셨던 친정아빠는 예술청년이셨다.
글을 쓰셨고 빠듯한 살림에 클래식 엘피판을 한장 한장 사 모으시며 주말 아침이면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딸들을 깨우시곤 하셨다. 피아노가 생긴 후에는 아빠도 이따금 피아노를 치곤 하셨다.
한번도 정식으로 배우신 적은 없지만 아빠는 기억하는 음정대로 건반을 누르며 어울리는
코드로 한 음계씩만 누르는 반주법으로 그럴듯한 연주를 하셨다.
내게 가끔 배우고 있는 곡을 쳐보라고 하셨는데 그때마다 나는 퍽 긴장을 했었고, 아빠는 가만히
들으시다가 '잘 치긴 하는데 감정이 안 들어가 있다'고 하셨다. 그땐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이제 마흔이 훌쩍 넘어 다신 만난 피아노앞에 앉아 그 옛날 곡들을 치고 있으려니 작은 소품
하나에도 살아온 연륜이 다 스며든다. 곡에 감정이 실린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된 것이다.
그냥 기교로 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이 주는 떨림을 고스란히 느껴가며 내 마음을 기울여
치다보면 나는 일상을 벗어나 한없이 높고 아름다운 어떤 세상에 들어가 있는 것을 느낀다.


그렇구나..
살다보면 음악이 친구가 되고, 음악이 위로가 되는 날이 온다는 것을 아빠는 알고 계셨구나.
그런 날들을 누리며 살라고 그 어려운 시절에 내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셨구나.
새삼 느껴지는 아빠의 사랑에 피아노를 치며 목이 멘다. 손이 다 떨려온다.

한 악기와 벗이 된다는 것, 그 악기와 더불어 인생을 함께 하며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그 안에서 위로받고 행복을 얻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피아노를 치면서 나는 30여년 전에 내가 받은 큰 사랑을
올올이 느끼게 된다.

 

여섯살된 윤정이는 피아노가 배우고 싶단다. 유치원도 다니지 않으니 일주일에 한번씩 개인 레슨
을 시킬까 한다. 피아노를 배운다기 보다 피아노와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30년 만에 다시 피아노가 생겼다.
오래 오래 마음을 다해 아껴주고 사랑해줘야지.
꽃사과 나무의 흰 꽃잎이 눈처럼 날리는 5월 아침, 피아노를 치며 행복하다.

 

참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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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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