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jpg

 

일요일 오전....
느긋하게 일어나 아침상을 물리고 토요일 신문을 뒤적이고 있는데 강릉에 계신 어머님과 통화하던
남편이 말하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감자요? 아직 안 심었어요. 씨감자를 많이 얻어 놓으셨다구요? 그럼 어머님이 가져다 주세요.
오늘... 네.... 안산 시외버스 터미널로 오세요. '

 

오늘? 어머님이? 시외버스 타고? 오신다고???

 

결혼 10년차, 나름대로 슬슬 살림에 이력이 붙어가는 전업주부로서 신혼때처럼 시어머님의
존재가 부담스럽고 어려운건 아니다. 이젠 시댁식구 누구나 내 집에 와주면 고마운 일이지
귀찮거나 힘들기만 할리는 없다. 그렇지만 언제나 준비는 하고 맞이한다. 그런데 더구나 시어머님이
갑자기 오신다니... 어수선한 집안과 벌려놓고 마무리 안 해 놓은 겨울 물건 정리들과 무엇보다
반찬이 다 떨어졌으니 갑자기 발등에 불 떨어진 꼴이 되어 허둥거렸다.

'당신, 윤정이 방 좀 빨리 치워. 나는 부엌 치워 놓고 장 보고 올께'
남편은 마누라에게 의논도 안 하고 갑자기 어머님을 불러 놓은게 미안했는지 군소리없이
애들 방으로 들어간다. 남편을 원망하는 게 아니다. 다만 준비할것들이 있어서 마음이 바빴다.

 

강릉에 계신 시부모님이 내 집에 오시는 일은 별로 없다. 집안 행사나 있어야 발걸음을 하실까,
그러니까 정말 오랜만에 오시는건데 똑소리 나게 살림하는 큰 며느리나 막내 며느리에 비해
게으르고 손 느린데다 집안일 미루어 두고 엉뚱한 일 잘하기로 유명한 둘째 며느리인 나는
어머님이 오신다고 하면 그동안 숙제처럼 미루어두었던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느라 정신이 없다.
어머님은 절때 냉장고며 집안 여기 저기를 살펴보시는 분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도둑이 제발
저리듯이 마음에 걸려 냉동실 정리하고 겨울 내내 청소도 하지 않았던 세탁실까지 말끔히 물청소를
했다.

부리나케 집안을 치우고 부엌을 정리하고 가까운 마트로 장보러 다녀왔다.
어머님이 신 김치를 싫어하시는데 풋 김치가 없어 아쉬운대로 오이소박이를 만들겠다고 재료는
사 왔는데 평소에 자주 안하던 음식을 하려니 요리책이 펼쳐지고 부엌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래도 가까스로 시간을 맞추어 어머님 저녁상에 오이 김치를 올려 놓았다. 전날 필규 학교
친구 엄마가 우리집에 와서 함께 쑥을 캐어 만들어 놓고 간 쑥버무리를 나 혼자 다 만든양 하며
맛 보시라고 내 놓았다. (사실은 옆에서 구경만 했다.ㅋㅋ)

그나저나 내일부터 바쁘겠구나.. 어머님이 오셨으니 평소같으면 남편 출근할때까지 자고 있는건
어림도 없는 소리고.. 잘 챙겨주는 척... 애 좀 써야겠네...
에고.. 난 너무 이중적인 며느리인가봐..

 

드디어 월요일..
남편은 늘 아침 다섯시 반이면 일어나 여섯시 10분에 출근을 하는데 그 시간엔 거의 내가
일어나지 못한다. 신혼때는 새벽밥도 짓고 현관에 서서 배웅도 했지만 애가 늘어나고 늘 고단하게
잠들게 되면서부터 지금은 아예 그 시간엔 일어나지도 못한다. 내 알람은 늘 일곱시게 맞추어 있다.
그러나 평생 식구들 따스한 밥 먹이는 일을 하늘처럼 여기며 살아오신 어머님이 계신데 평소처럼
할 수는 없다. 나는 남편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부엌에 들어가 달그락 거리다가 식탁위에
사과와 쑥버무리 찐 것을 올려 놓았다. 그리고 습관처럼 볼 일을 보고 바로 이를 닦는 남편에게
가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서 사과랑 쑥버무리랑 먹고 나가. 그냥 나가지말고..  생전 아침을 안 차려주네 어쩌네 하는
말, 하면 안돼. 10년째 완전범죄인데... 알았지?'
남편은 눈치껏 이를 닦고 와서 상에 앉아 요기를 한다.
거실에서 일찌감치 이부자리를 개고 계신 어머님을 향해 평소에도 아범을 굶겨서 내보내지는 않는다는
무언의 얘기를 건넨 샘이다.

 

신랑이 출근하고 어머님은 감자밭 고랑을 파신다며 나가셨다.
애들을 깨우기전에 새 반찬을 만들었다. 그것도 전유어를...
어제 해동해 놓은 동태포에 밀가루와 계란옷을 입혀 부쳤다.  평소엔 전날 남은 반찬이나 계란
후라이 정도 해서 애들과 후다닥 먹거나 자주 빵도 먹었지만 오늘은 된장찌개에 갖은 반찬에
전유어까지 있다. 어머님 덕분에 아침부터 푸짐한 상을 누린다.
필규 학교 보내고 어머님은 다시 감자밭으로 나가셨다. 어머님이 계속 움직이시니 덩달아 나도
쉼없이 일을 한다.
본래 내게는 월요일이 휴일이다. 주말에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늘 바쁘기 때문에 남편이 회사가고
큰 애가 학교 가는 월요일이면 아침상도 대충 차리고 점심도 간단하게 해결하면서 설걷이는
뒤로 미루고 느긋하게 신문도 읽고, 전화 통화도 하고, 뒹굴거리지만 오늘은 비상시국이라 바로
설걷이를 하고 집안을 치운다.
그리고 어설픈 농삿꾼 차림을 하고 밭으로 나갔다. 어머님은 벌써 고랑을 다 파고 감자를 넣고
계셨다. 옆에서 호미 들고 일을 좀 하려니 이룸이가 계속 징징거린다.
'놔두고 애나 봐줘라'
'네..'
결국 감자는 어머님 혼자 다 심으셨다.

 

그 사이에 집안 치우고 이룸이 다시 재우고 밀렸던 블로그도 손 봤다. 워낙 일찍부터 움직였더니
꽤 많은 일을 하고도 시간이 여유롭다. 평소에도 이렇게 살면 정말 무슨 일을 해도 하겠네..싶다.
동네 엄마들 만날 약속도 취소하고 내내 집에서 보내고 있다.
모처럼 사온 배추로 겉절이 담글 생각도 해 보고 어머님이 다 껍질을 깎아 주신 씨감자로 반찬
만들어 점심상에 올릴 준비를 한다.
호오..
시부모님과 살면 정말 반찬값도 줄고, 집안도 반짝반짝 하겠구나.
평소에도 부지런하고 알뜰하게 살면 갑자기 어머님 오신다고 밀린 숙제 할 일도 없겠지만
그러나 어머님이 가시면 바로 전처럼 할 것을 안다.
월요일 오전에는 뭐니뭐니해도 인터넷으로 다운받아 놓은 드라마들을 섭렵해 줘야 하기 때문이다.
매일 함께 산다면 이중생활도 필요 없지. 서로 편해야 하니까 너무 애쓰지도 않을 것이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도 감추지 않겠지. 가끔은 간단하게 상도 차리고 어머님만 두고 외출도 하겠지.
서로 자기 스타일을 지키면서 또 함께 살기 위해 필요한 노력들을 하겠지.
그러나 이렇게 어쩌다 오시는 어머님에게 잘 해드리고 싶고, 또 조금은 잘 보이고 싶어서
평소에 하지도 않는 애를 쓰는 것 또한 어떠랴. 그만큼 어머님을 생각하는 내 마음인걸...

결혼 10년이면 이 정도로 뻔뻔스러워지는구나..

올해는 어머님 덕분에 귀한 강원도 씨감자로 푸짐하게 감자 농사를 짓게 되었다.
늘 남의 밭일 해 주시며 품값 받으시는 어머님이 이번엔 당신 자손들 먹일 감자를 심으시는 일이
덜 고단했을지도 모른다. 뭐든지 자손들에게 하나라도 더 주시려고 애쓰며 살아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새 많이 늙으셨다. 우리 어머님..
신혼때는 어렵기만 했지만 이젠 어머님께 짠한 연민을 느낀다. 그 수고로운 인생이 안스럽고
고맙고 감사한 것이다.
자주 오셔도 좋다. 그래서 이중생활이고 뭐고 신경쓰지 않고 서로 자연스럽게 섞이고 닮아가며
오래 오래 나랑 합께 사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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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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