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제주도 집에 가족들이 왔다. 부산에서 외할머니가 오시고, 일산에서 아버지, 어머니, 오빠 내외와 조카들이 왔다. 제주에 온지 4년 반이 되었는데 아버지는 그동안 바쁘셔서 못 오시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우리 집에 오셨다. 외할머니는 노환으로 눈이 잘 안 보이셔서 여행을 망설이셨는데 조금이라도 더 보일 때 오셔야 된다고 내가 우겨서 오셨다. 한 달 전에 이사 온 우리 시골집도 보시고 아버지 생신 축하도 같이 할 겸 해서 잡은 가족 여행이다.
여행 첫 째 날은 아버지 생신이어서 제주도에 사시는 큰아버지, 큰어머니와 함께 식사를 하고 우리 집으로 와서 미리 준비한 아이들의 장기자랑 발표 시간을 가졌다. 가무를 좋아하는 우리 어머니께서 나의 두 딸, 바다, 하늘이와 오빠의 두 아들, 현준, 현민이에게 한 달 전부터 장기자랑을 준비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저녁마다 노래와 춤을 연습했다.
그 날만을 기다려온 바다와 하늘이는 빤스 바람에 한복 치마를 걸쳐 입고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시크릿 쥬쥬와 겨울왕국 노래를 부르면서 신나게 춤을 추었다. 못 본 사이에 무척 어른스러워진 현준이와 여전히 귀엽고 엉뚱한 현민이는 같이 가요 한 곡을 멋지게 불렀다. 하늘이가 신나게 춤을 추다가 외할머니가 웃으면서 던진 말 한마디에 울음을 터트리며 퇴장하는 예상치 못 한 사고가 있기도 했지만 부쩍 큰 아이들이 쑥스러워하면서도 즐겁게 자기를 표현하는 모습을 본 흐뭇한 시간이었다.
장기자랑을 끝내고 용돈까지 두둑하게 받은 아이들은 우리 집 마당에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마음껏 뛰어놀았다. 그네를 타고, 호수로 물을 뿌리고, 개들과 놀고, 닭장에서 계란을 꺼내고, 그 계란을 쪄서 맛있게 먹었다. 도시에서 학교와 학원을 다니느라 바쁜 조카들이 깔깔거리며 웃고 뛰어노는 걸 보니 내 마음이 다 시원했다. 일이 많고 출장이 잦은 오빠는 마당에 있는 해먹에 누워 낮잠을 자고 할머니와 부모님도 시원한 거실에 누워 낮잠을 주무셨다.
여행 두 번째 날이자 마지막 날에는 작은 시골 학교인 하례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에 다니는 바다와 하늘이의 운동회가 있었다. 오빠 가족은 잠시 따로 여행을 하고 외할머니와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돗자리와 간식 가방을 들고 학교에 들어가셔서 운동장 한 편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그리고 흐뭇한 미소로 손녀들의 율동과 달리기를 보시다가 운동회 2부쯤이 되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셨다.
부모님 이어달리기 시간에는 이미 힘을 많이 써서 지친 남편 대신 아버지가 나가셔서 있는 힘껏 달리셨고 어머니는 사람 찾아 달리기 시간에 ‘립스틱을 바른 멋쟁이’를 찾는 학생의 손을 먼저 잡고 달리셨다. 어르신 참여 시간에도 두 분이 같이 나가셔서 라면 다섯 개가 들어있는 검은 봉지를 낚싯대로 주렁주렁 세 개씩, 두 개씩 낚아 오셨다. 우리가 이렇게 휩쓸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이렇게 즐기실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의외였다. 운동도 별로 안 좋아하시고 움직이는 것 보다 가만히 계시는 걸 좋아하는 아버지라고 생각했는데 그 날은 아니었다.
나중에 얘기를 나눠보니 힘들던 일을 그만 두시고 요즘 이직을 준비하시면서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사 천 보 정도를 걷는다고 하셨다. 몸이 마른 아버지가 살도 좀 찌시고 표정도 예전보다 많이 밝아지셔서 좋다 했는데 그래서 그러셨던 거였다. 정말 반가운 일이다. 내 아이들 운동장에서 걷고 뛰고 웃으며 춤추시던 우리 부모님 모습과 돗자리 옆자리에 앉아 사과 하나 먹어라, 떡 하나 먹어라 하시며 변함없이 내 배를 채워주시던 우리 할머니의 모습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오빠 가족을 만나 산방산 근처 송악산 둘레 길을 걷고 내려와 저녁을 먹고 숙소로 갔다. 이틀 뒤인 올케 언니 생일을 축하하며 또 한 번 생일 케이크를 먹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어머니가 대뜸 속 얘기를 꺼내셨다. 넉넉하지 못 한 형편 때문에 지금까지 한 번도 마음껏 돈을 써보지 못 하셨다는 얘기로 시작해 너희한테 미안하다는 얘기 등을 하셨는데 예상치 못 한 솔직한 분위기에 오빠는 진땀을 흘리고 아버지의 표정은 굳어지고 나도 당황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얘기를 하시고 나서 다른 사람들도 할 얘기가 있으면 하라고 해서 내가 말했다. 왜 내 생일만 그렇게 매 년 까먹느냐고, 그러면서 오빠 생일은 한 달 전부터 연락해서 잊지 말라고 하는 게 더 화가 난다고. 벌써 몇 년 째냐고. 그러자 아버지가 말을 이으셨다. 내 생일을 까먹을 정도로 지난 10년 동안 사는 게 너무 힘드셨다고. 일이 너무 고되어서 집에 오면 거의 쓰러질 지경이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오빠는 어머니의 부탁이 지나쳐서 힘들 때가 있다고 했다.
맨 마지막 올케 언니의 속 얘기는 직업을 잃어버렸다는 얘기였는데 오빠가 너무 바빠서 육아를 도와줄 수가 없어서 일을 하던 언니가 점점 일을 줄이다가 이제는 전업주부가 될 상황이라는 거였다. 가족들은 그런 언니의 상황에 대해 진지하게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을 좀 덜 챙기고 일을 계속 하는 것은 어떻겠냐고 할머니와 어머니가 조언을 하기도 하셨다.
여행 마무리 겸 언니 생일 축하자리를 잠깐 갖자고 한 것이 그렇게 길어지고 깊어졌다. 다들 너무 솔직해서 얘기를 나누는 내내 긴장되고 불편했지만 한 편으로는 속이 시원했다. 가족들이 머무는 숙소에서 나와 우리 집으로 돌아오는데 가족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가 다시 생각이 났다. ‘그래서 그랬구나... 아, 그랬구나...’
그들을 이해하게 되자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졌다. 그 동안 가끔 가진 술자리에서도 나누지 못 했던 이야기들인데 그 날은 한 명도 예외 없이 자기 속 마음을 털어놓았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 시간을 가지려고 이번에 모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루만 더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가족들은 다음 날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갔다.
가족들이 있다 간지 이십 여 일이 지났다. 여전히 여행의 여운이 남아 가족들 생각이 불쑥불쑥 난다.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사는 것이 독립적이고 자유로워서 좋기도 하지만 보고 싶을 때 못 보는 것은 참 많이 아쉬운 일이다. 올 해 5월, 마침 가정의 달에 나는 가족을 더 사랑하게 됐다. 오늘도 가족들이 보고 싶다. 전화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