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을 앞두고 마지막 마무리 잔칫날 모둠별로 인형극을 하기로 했다는 얘기를
이룸이한테 들은 것은 한참 전이다. 모둠에 속한 아이들끼리 인형극 준비물도 만들고
역할을 나누어 마무리 잔치 때 공연을 하기로 했는데 이룸이 모둠 친구들이 제 맘처럼
움직여주지 않는다고, 그래서 연습이 잘 안된다고 속상해 했다.
힘들겠네, 저런 속상하겠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도 해주며 잘 준비해보라고
도닥였는데 그래도 잘 안되는 모양인지 인형극 공연 때문에 집에 와서 부려대는 짜증과 분노가
날로 더해갔다.
" 애들이 연습도 안 하고 장난만 치고 다른 모둠은 다 연습도 잘 되는데 우리는 완전 망했어요"
"선생님께 말씀 드리고 도움을 청해보면 어때?"
"선생님도 아시는데 소용없어요. 장난만 계속 친다구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나도 모른다구요. 어떻게하면 좋냐구요. 왜 나만 이런 모둠이 걸려서 이렇게 고생하냐고...엉엉"
나중에는 소리 소리 질러가며 울기도 여러번 했다.
학교 행사에 욕심도 많고 열정도 많은 아이인데 마음대로 안 되는게 얼마나 힘들까..
이해가 되면서도 아침마다 징징거리고, 학교 다녀와서 신경질 부리고, 느닷없이 소리 지르며
꺼이 꺼이 울어대는데는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그 친구들을 감당해가며 준비해 가는 이룸이가 제일 힘들겠지 싶어 생난리를 치며
짜증 부려도 꾹 참았다. 다른 식구들한테도 모른척 해 달라고 부탁했다.
드디어 마무리 잔치날인 오늘, 이룸이는 깨우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이불위에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오늘인데 어떻해. 준비도 하나도 못했는데, 아아, 학교 안 갔으면 좋겠어.. "
바쁜 아침에 서둘러 준비해도 시간이 빠듯한데 깨어나자마자 울고불고 뒹굴고 있으니 난감했다.
화내지 않고 살살 달래가며 재촉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울며울며 느릿느릿 준비를 하는 것도
꾹 참으며 한 마디 하고 싶어하는 윤정이에게도 아무말 말라고 단속을 해가며 밥상에 앉았는데
이룸이는 상 옆에 주저앉아 소리를 질러가며 울기 시작했다. 짜증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꾹 참았다.
퉁퉁 부은 얼굴로 제일 늦게 상에 앉은가 싶었는데 갑자기 비명을 꽥 지르는 것이다.
" 아악 .. 어떻하냐고!!! "
윤정이가 깜짝 놀라 황당한 얼굴로 나를 보고, 나도 너무 놀라서 수저를 떨어뜨릴 뻔 했다.
더 이상 참을 수 가 없었다.
"학교 가지마! 결석해. 그렇게 괴로우면 학교 빠지고 연극 하지마!"
울고 있는 이룸이한테 꽥 소리를 질렀다.
"... 학교는 갈꺼예요"
이룸이는 내 소리에 놀라서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수구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빨리 준비하고 밥 먹고 학교 가. 가서 죽이되든 밥이되든 알아서 해"
"내가 잘 하고 싶어도 다른 친구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내 대사도 할 수 없다구요. 그럼 어떻해요?"
"뭘 어떻해, 연극을 망쳐야지!"
단호한 내 이야기에 이룸이가 눈물이 얼룩진 얼굴을 들어 바라보았다.
"망치면... 어떻해요..."
"넌 할 수 있는거 다 했잖아. 그런데 너 혼자만 잘 한다고 되지 않잖아. 선생님께 말 했어도
소용없다면서..
당장 오늘이 공연인데 준비는 하나도 안됬으면 당연히 공연을 망치겠지.
그럼 보란듯이 망치고 내려오면 되지"
".. 나는 잘 하고 싶다구요.. 흑흑.."
이룸이는 다시 눈물을 떨구었다.
"니가 잘 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을때가 있어. 이번처럼.. 아무리 잘 하고 싶어도
잘 할 수 없는게 세상엔 더 많아. 남들이 니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두 친구들도 아무리해도 네 생각대로 안 되잖아.
그럼 어떻해. 안되는거 인정하고 포기해야지. 준비안된대로 공연해서 웃음거리 되야지.
그렇다고 니 친구들이 비웃겠니? 그냥 다들 깔깔깔 웃으면 끝나겠지.
학년 마지막 공연을 멋지게 잘 하고 싶은 마음 아는데 그게 네 생각대로 안 된다고 해서
힘든 것도 알겠는데 네 마음이 힘들다고 네 멋대로 소리지르고 화 내고 가족한테 신경질,
짜증 부리면 안돼.
너 하나때문에 다른 가족들이 피해를 보잖아. 힘들다고 얘기하고 위로를 구할수는 있지만
이렇게 마음대로 신경질부리고 히스테리 부리는 건 정말 못참겠어.
니 감정 때문에 다름 사람까지 힘들게 하면 안된다고!!"
"... 죄송해요... 엉엉"
이룸이는 구슬프게 울었다.
"아, 정말 얘때문에 저까지 스트레스예요. 완전 지 멋대로잖아요.
갑자기 소리 질러서 사람 놀라게 하고.."
윤정이도 짜증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언니도 엄마도 많이 참았어. 니가 힘드니까 잘 받아쥐야지... 생각하면서..
그런데 이건 정말 도가 지나쳐.
힘든 마음, 괴로운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 이렇게 소리소리 지르고 울고 불고 하는 것
밖에 없는건 아냐.
그렇게 하면 너를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고 싶은 사람도 다 도망갈껄? "
" ... 미안해요.."
".. 잘 하고 싶은 일이 맘대로 안되면 누구나 속상하고 힘들어. 그
래도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포기하고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도 배워야지. 살다보면 내 맘대로 안되는 일이 더 많거든. 그런데
그럴때마다 이렇게 한탄하고 좌절하고 몸부림만 칠거야? 잘 안되면 망치는 것도 배워야지.
부끄럽고, 속상하고, 아쉽고, 자존심 상하는 것도 배워야지.
끝내 연극이 네 맘대로 안되면 아무리해도 안 되는 일이 있구나를 배운다고
생각해. 연극이 망친다고 네 자신이 망쳐지는 건 아니야. 연극 한 번 망한다고
네가 형편없는 아이가 되는 것도 아니고...
잘 안되는 일도 겪어가며 커야 마음도 단단해지고 네 안에 더 큰 힘이 생기는거야.
이번엔 그런 기회로 삼으면 되지.
엄마도 학부모 회장할때 욕 많이 들었어. 엄마 재수없다고, 너무 설친다고, 잘난척 한다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있었거든. 잘 하고 싶어 애쓰는데 뒤에서 그런 소리 들으면 얼마나 화 나는데..
자존심 상하고..
그렇다고 회장을 그만 둘 수 있어? 그 사람들하고 맨날 싸우고 그 사람들 안 볼 수 있어?
그럴수없어. 다음날 또 만나서 회의하고 같이 일을 해야 하니까..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오해하고, 잘 못 보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구나. 할 수 없구나..
모든 사람을 다 만족시킬 수 없구나. 포기하자. 그렇다고 내가 할 일 안 할 수 없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최선을 다 하자.. 더 겸손해지자.. 그런 마음으로 1년 동안 회장을 했어.
그러면서 많이 배웠지. 다른 사람들 마음을 내 맘대로 할 수 없구나. 애써도 할 수 없는 일이 있구나.
그럴땐 욕도 먹고 오해를 사도 어쩔 수 없구나. 회장 하면서 마음이 훨씬 더 단단해졌다고..
그러니까 결국 고맙고 소중한 기회였지.
모든 일이 잘 되야 행복하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같지? 그렇지 않아.
실망하고, 속상하고, 좌절하고, 화나고, 포기하고, 다시 마음 잡고 하면서 우리 마음이 더 알록달록
고와지는거야. 다양한 감정이 쌓여가면서 풍성해지고... 내 안에 감정이 다양할수록 다른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더 여러가지 일들을 잘 해결해 갈 수 있어. 이룸이는 지금 그런 공부를 하는거야"
이야기를 마칠때 쯤 우리는 차가운 겨울 마당에 서 있었다.
싸늘하고 밝은 날 이었다.
"엄마... 햇님이 나를 응원해주는 것 같아요"
이룸이가 차 앞에서 내게 몸을 기대왔다.
"그러네.. 공기도 맑고 깨끗하고.. 모두 다 이룸이를 위로해주는 것 같애"
"아까는 죄송했어요."
"네 잘못이 아니야. 이러면서 또 크는거지"
잠깐 안아주고 함께 차에 올랐다.
시동을 켰더니 늘 고정되어 있는 라디오 체널에서 마침 아바의 '치키티타'가 흘러나왔다.
"와, 이거 완전 딱 이룸이를 위한 노래다!"
우리 셋은 치키티타를 들으며 들길을 달렸다.
- chiquitita tell me what's wrong?
얘야 무슨 일이니
you're enchained by your own sorrow
슬픔에 사로잡혔구나
- you were always sure of yourself
늘 자신감이 넘치는 너 였는데
now i see you've broken a feather
지금은 깃털 하나가 부러졌구나
i hope we can patch it up together -
우리 같이 고쳐볼까
- im a shoulder you can cry on -
나는 네가 기대서 울 수 있는 어깨야
- how the heartaches come and they go ane the scars they're leaving
마음은 아팠다가도 다시 나아, 상처는 남겠지만
you'll be dancing once again and the pain will end-
너는 다시 춤 출 수 있을 거고 고통은 끝날거야
-but the sun is still in the sky and shining above you
태양은 여전히 하늘에서 네 위로 빛나고 있어
let me hear you sing once more like you did before
다시 한 번 네 노래를 들려줘
- try once more like you did before
예전의 너 처럼 한 번더 힘을 내 봐
sing a new song chiquitita -
새로운 노래를 불러줘 -
학교 앞 참나무 아래 차를 세워두고 노래가 끝날때까지 말없이 앉아있다 내렸다.
"이 노래, 영화 맘마미아에서 도나에게 갑자기 세 남자가 짠 하고 나타나서 정신이
나갔을때 화장실에 들어가 엉엉 우는데 두 친구가 화장실 문 위와 아래에서 얼굴 내밀고
도나를 위로해주려고 막 불러주잖아"
"맞아요. 머리 드라이도 해주고, 입에도 뭐를 막 뿌려주고.."
"그래, 도나의 기분을 좋게 해 주려고 뭐라도 막 해주는거지.
이룸이는 정말 운이 좋아. 자기의 기분을 위로해주는 딱 맞는 노래가 차를 타자마자
나올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 오늘은 정말 모든게 다 잘 될꺼야"
우리 셋은 신이 나서 영화 맘마미아 얘기를 해 가며 등교길을 걸었다.
교문을 들어서는데 윤정이가 소리쳤다.
"엄마, 저거요, 플라타너스에 목도리 두른거요, 우리 반이 뜬 거예요. "
과연 올 봄에 가지가 무참하게 잘렸던 플라타너스 둥치에 알록달록
이쁜 목도리가 둘러져 있다.
윤정이네 반 아이들이 힘을 합해 뜨게질 해서 완성한 나무 보호대다.
"엄마, 언니가 뜬게 이 빨강색이예요"
이룸이는 웃으며 플라타너스를 안았다.
"플라타너스도 기운내고 있잖아. 이렇게 이쁜 목도리를 해 줘서 정말 행복하겠다.
나무도 지금 너를 위로해주고 있을거야"
"올 여름에 아주 아주 가지랑 잎들이 많이 많이 났으면 좋겠어요"
" 아픈 일을 겪었으니까 플라타너스도 훨씬 더 단단해졌을꺼야.
올 해는 정말 멋진 잎들을 피어 올릴껄?
힘든 일을 겪을수록 나무도 사람도 더 단단해져. 기운내"
이룸이는 플라타너스를 한참 바라보다 돌아섰다.
"엄마.. 오늘 정말 미안했어요"
"아니야, 엄마도 화 내서 미안해"
"지금은 기분이 괜찮아요"
"그럼, 연극 한 번 뜻대로 안 된다고 좌절하기엔 너는 정말 너무 근사한 아이잖아. 잊지마"
"사랑해요"
이룸이랑 꼭 끌어안았다가 손을 놓았다. 이룸이는 결연한 표정으로 교실로 들어갔다.
막상 닥치면 생각보다 별 일 없을 것이다.
겪어보면 다 견뎌진다.
짧은 아침 시간동안 우리는 몇 번이고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은 감정들을 경험했다.
아이들은 하루에도 이렇게 몇 번씩 성장의 계단을 오른다.
힘들지만 돌아보면 벅차고 이쁜 모습들이다.
이룸아, 윤정아
가끔 힘 든 일이 있지만 잊지마.
우린 언제나 새로운 노래를 부를 수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