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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아들이 다니는 대안학교 아이들 열두명이 놀러와서 하루 자고 갔다.

아들이 대안학교에 다니게 되면서부터 1년에 두 세번씩은 학교 아이들을

집으로 불러 재우곤 하는데 이번에는 조금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있었다.

아이들 중 두 명이 채식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집으로 부르면 아이들 좋아하는 음식을 넉넉히 준비하는데

대개 고기 요리다. 나물이나 다른 반찬에는 호불호가 갈려도

어지간해서 고기를 싫어하는 아이는 본 적이 없다보니 늘 그렇게 된다.

그런데 채식만 하는 아이가 둘 온다고 하니 고민이 되었다.

열 네살 하늘이는 여덟살때부터 채식을 하기 시작해서 계란도 안 먹는다 하고

올 1월부터 채식을 시작한 한글이도 그렇다고 하니 음식이며 간식을 준비할때

채식 아이들을 위한 것들을 따로 준비해야 했다.

생협 매장에서 장을 보면서 평소에는 신경쓰지 않던 '전성분표시'를 아들과

꼼꼼히 살펴 보았다.

전혀 뜻밖의 과자에도 고기 원료나 계란 등이 들어간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어

놀라기도 했다. 아침에 먹을 빵을 살 때도 모든 식빵에 계란이 들어간다고 해서

채식 아이들을 위한 것으로는 계란이 들어가지 않은 바게뜨를 샀다.

저녁 메뉴로는 나물이 주가 되는 비빔밥을 준비했더니 크게 어렵지 않았다.

 

일반 아이들에게는 비빔밥에 불고기를 듬뿍 올려주고, 채식 아이들에겐

고소한 김가루를 뿌려 주었더니 모두가 맛있게 먹었다.

그중에 올 1월부터 채식을 시작한 한글이가 감자 요리를 해주겠다며 재료를

준비해 왔다.

후라이펜에 껍질째 굵게 썬 감자를 넣고 후추와 소금을 뿌려 가며 굽고 있는

한글이 옆에서 설거지를 하며 얘기를 나누었다.

 

"갑자기 채식을 결정한 이유가 있었어? 이런 질문.. 많이 받았겠다.."

"네.. 아 뭐.... " 한글이는 쑥쓰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대단한건 아니구요, 그냥.. 나를 좀 이겨보고 싶다고 해야 하나? 도전하고 싶어서요"

"아.. 일종의 극기.. 같은거?"

"네.. 물론 공장사육에 관한 수업도 듣긴 했는데 솔직히 동물들의 생명을 위해서라고

하면 기만일 것 같고요, 그런 면도 있기는 하지만 저 자신에게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요. 음식에 너무 좌우되더라구요, 제가..

그게 저를 너무 크게 휘두르는 것 같아서 한 번 1년 동안 채식에 도전해보자..

이렇게 된거죠"

"힘들지는 않니?"

"생각보다 힘들지는 않은데, 아빠랑 자주 외식을 못하게 되어서 아빠는 서운해하세요.

학교에서는 다들 아해해 주시니까, 어렵지 않구요"

"그래, 그래도 참 다행이다. 너희 학교는 육류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밖에 안 나오니까

힘들지 않은데 일반학교 다닌다고 하면 급식도 어려울거고 애들이 놀릴수도 있고.."

"그럼요. 그럼 정말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채식이라니... 정말 대단해. 필규라면 상상도 못 할거야.

나는 채식주의자는 아닌데, 채식 선호자라고 할까? 육식을 일부러 즐기지 않는..

그런데 필규는 너무 너무 고기를 좋아하는 거야. 그것때문에 정말 많이 싸우고

실망하고, 내 자식인데도 식성때문에 혐오감을 느낀 적도 있고 힘들었어.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음식인데 아들 떄문에 만들어야 할 때 기분같은거..

별로였거든"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음식 준비 하는 사람 입장이라면.."

"내 속에서 나왔는데 식성이 너무 다르니까, 늘 고기를 먹고 싶어하니까

그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거든. 사실 필규 잘못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타고난건데..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내 자식이라도 나와 다른 것을 이해하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이구나... 아들 키우면서 배웠다고나 할까.."

"정말 힘든 일이죠. 맞아요"

"근데 하늘이 있잖아. 하늘이는 어렸을떄부터 채식을 해오고 있다고 필규가

얘기해 주더라. 언젠가 하늘이랑 같은 모둠이 되어서 도시락을 싸 가야 할 떄

필규가 그러는거야, 하늘도 먹을 수 있는 메뉴로 싸 달라고..

필규는 학교에서 체험학습 같은 거 가서 도시락을 싸야 할 때도 늘 고기를

고집했던 아이거든. 그래서 불고기나 닭고기같은거 해서 보냈는데

다른 아이 때문에 자기가 좋아하는 거, 특히 음식에 대해서는 절대 양보도

타협도 안 하던 아이였는데 하늘이를 배려하는거야. 깜짝 놀랐어. 정말..

필규가 하늘이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친구 때문에 자기가 관심도

안 가지던 것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해 오던 것과 다르게 하는 건 처음 보는 모습이었거든.

그래서 결국 김치볶음인가 싸 줬는데, 그 후로도 하늘이 얘기를 참 많이 했어.

자기가 좋아하는 젤리를 만드는 성분이 젤라틴인데 그 원료가 돼지껍질이어서

하늘이는 잴리도 안 먹는다고 하고, 과자에도 고기 성분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하늘이는 그런게 안 들어가 있는 과자만 먹는다고도 하고..

 

이번에도 너희들 먹일 음식 준비하러 장보러 필규랑 같이 갔는데

모든 성분들을 아주 꼼꼼하게 살피더라. 식빵에 계란이 들어간다는 것도

나는 잘 몰랐는데 필규가 얘기해줘서 알았지. 하늘이랑 같이 생활하면서

하늘이가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어떤게 있는지 내내 관심을 가지고 있었나봐.

나도 너랑 하늘이 덕분에 새로 알게 된 게 정말 많았어.

꼭 고기 뿐만이 아니라, 무심코 먹는 과자같은 것에도 동물성 원료가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지 전에는 관심 없었거든"

"저도요, 채식 하면서 제가 뭘 먹을 수 있는지 살피면서 새로 알게 된게

정말 많아요"

"그러니까 하늘이나 너 같은 존재가 정말 소중한거야. 참 고맙더라.

나와 다르니까 더 많이 챙기게 되고, 더 자세하게 알아보게 되고..

뭐라고 해야하나. 사람을 이해하는 폭이 훨씬 더 넓어진다고 해야하나?

필규가 변하는 걸 보면서 이래서 우리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 나와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살아야 하는구나... 생각했지.

그래서 난 너랑 하늘이가 참 좋아, 고맙고.."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감사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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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아홉살 한글이는 이날 맛있는 감자 요리로 모두의 인기를 얻었다.

 

여덟살 어린 나이에 채식이라는 커다란 선택을 하고 지금껏 성실하게

지켜오고 있는 하늘이나, 음식에 좌우되지 않고싶어서, 그 욕망을 한 번 이겨보고

싶어서 채식을 선언한 한글이 같은 아이들을 만나는 일은 어른인 내게도 선물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 정도의 강한 결정을 해 본적이 있을까.

특히 먹는 것에서 나도 늘 약해서 밀가루에 대한 탐닉같은 것엔 아직도

굴복하고 마는데 그 어린 아이들이 이다지도 큰 결정을 하고 지켜가는 모습을

볼 땐 나이를 떠나 어떤 경건한 존경심 마저 드는 것이다.

 

어떤 이유든 채식을 선택하고 실천하고 있는 하늘이를 이해하고, 그

친구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챙겨보는 필규의 마음은 내게도 고맙고 애틋하다.

늘 제 고집이 강하고, 제가 원하는 것은 도무지 단념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

필규 때문에 얼마나 속을 끓였던가. 특히 먹거리에 대해서는 고집을 넘어

집착할 정도로 고기에 대한 욕구가 강해 애를 먹었는데 하늘이를 만나면서부터

14년간 해 오던 자신의 습관들을 조금씩 바꾸고 있는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 나와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 우리의 세상도 같이 넓어진다.

그 사람 때문에 보지 않았던 풍경들을 보게 되고,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다른 다람은 귀한 사람이고, 소중한 사람이고, 더 많아져야 하는 사람들이다.

세상을 더 풍성하고 다채롭게 채워주는 사람들이다.

 

하늘이와 한글이 같은 동기가 필규 곁에 있다는 것이 참 고맙다.

한글이의 도전이 꼭 성공하기를 응원하며, 하늘이의 다름이 언제나 잘 살펴지고

존중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는데 나도 더 많이 관심을 가져야 겠다고 다짐한다.

 

하늘이와 한글이..

참 이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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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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