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막.jpg

 

탄핵안 투표가 국회에서 진행되던 순간, 나는 아이들 학교 대토론회에서 발표를 하고 있었다.

1년 동안의 교육 과정을 놓고,

학부모, 학생들, 교사들이 모여 평가하고 제안하며 토론하는 자리였다.

생태 교육에 대해 제안을 하던 한 학부모가 발표 끝에 뜬금없이

"방금 여러분이 원하시던 일이 이루어졌음을 알려드립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 앉는 것이었다.

나는 맥락이 닿지않는 그 이야기의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다가

앉아 있는 이들의 들뜬 표정들을 보고서야 `아하..' 하고 깨달았다.

 

정치적 견해는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리임을 알고 있기에

누구도 '탄핵안 가결"이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으나

'모두가 원하던 일'이었음은 모두의 표정을 보고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기쁘고 뿌듯한 마음으로 충실하게 토론회를 마칠 수 있었다.

잊지못할 대 토론회였다.

 

그날 저녁, 나는 산본 시내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열리는 '군포 시민, 청년, 학생 촛불집회'에

마을 기타모임의 일원으로 참가해 무대에서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라는 곡을 힘차게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

 

이 노래만큼 지금 우리의 마음을 잘 대변하는 곡이 또 있을까.

오래 어두웠지만 결국 빛이 비쳐드는 것을 보고 있다.

거짓이 판을 쳤지만 참이 거짓을 밝혀내는 것도 보고 있다.

은폐하려는 추악한 진실은 결국 수면 위로 떠오르고 만다는 것도 낱낱이 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매 주 밝혀지는 촛불을 통해 느끼고 있다.

 

이번 주에 나온 '한겨레21'에서 안수찬 편집장은

"2016년 12월이 위대하다면 대통령을 끌어내렸다는 성취 때문이 아니다.

10대와 20대가 이 과정을 모두 보고 겪었다. 그들은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공간에서

이전까지 꿈꾸지 못했던 것을 만들고 치르며 옛 세대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낼 것이다.

87년 6월 세대가 늙어 버려렸어도, 이제 다 괜찮다.

지금부터 2016년 12월 세대가 주인공이다"라고 썼다.

나는 이 대목을 세 아이들에게 소리 내어 읽어 주었다.

 

일곱 살 막내와도 탄핵안 가결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살고 있다.

이런 12월은 정말 내 인생에도 처음이다.

크리스마스가 다음주로 다가왔지만 트리조차 설치할 정신이 없었다.

하루 하루 역사의 소용돌이 속을 살아내는 일상이라, 

너무 중요한 12월이라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끼어들 여력이 없었다.

이제 탄핵안은 가결되었고, 판결은 헌법재판소의 몫으로 넘어갔다.

끝이 아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집 앞 텃밭 그물에 '국민의 명령이다. 박근혜는 퇴진하라'는 현수막을 걸었다.

아파트 베란다마다 이 현수막을 걸자는 운동에 동참해서 주문한 것이다.

우리는 단독주택이므로 베란다가 없어 집 앞 텃밭쪽에 걸었다.

덕분에 더 잘 보인다.

가끔 대통령을 옹호하는 동네 어르신들이 눈살을 찌뿌리시는 모양이지만

그 분들 마음도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당당히

내 걸었다. 지금 국민들의 마음임을 당당히 내세웠다.

 

대통령은 아직 청와대에 있다.

대통령의 부정에 부역한 세력들도 아직 누구도 분명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

모든 것은 진행중이고,

우리는 그 결과의 끝까지 지켜보고,

옳은 결정을 내리도록 요청하고, 압력을 넣을 책임이 있다.

한 번에 모든것이 달라질 수 는 없다.

그러나 한 번 눈 뜬 국민이 다시 장님이 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진실을 모았고, 그것이 우리를 매 순간 강하게 하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천천히, 오래, 꾸준히 가는 것이다.

참이 거짓을 이기고, 빛이 어둠을 몰아내고, 진실이 드러나고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을 때 까지 수없이 촛불을 들고 외치며 나아갈 뿐이다.

 

매일 아침 아이들과 학교를 가면서 현수막의 글을 다시 한 번 읽는다.

집으로 돌아올때도 제일 먼저 현수막을 보게 된다.

그날 새로 밝혀진 뉴스들, 청문회 이야기들, 앞으로 이어져야 할 과정들을

매일 아이들과 이야기하며 하루를 산다.

반짝이는 트리와 선물과 신나고 행복한 성탄절보다

국민의 심판을 헌법재판소가 공식화 하는 그 순간을

더 열렬히 고대하며 살아가는 12월이란

그 어느 때 보다도 특별한 연말일 것이다.

 

2016년 12월 세대들인 세 아이의 세상은 국민이 진정한 주인이 되고

헌법의 가치가 고스란히 지켜지며,

정의가 사회를 이끌어가는 세상이기를 원한다.

 

이제 정치가 일상인 시대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정치를 지켜보고, 고민하고, 말할 줄 알게된

아이들을 키우게 되었으니 부모로서,엄마로서 더 귀한 책임을 느낀다.

 

2016년 12월의 아이들과

천천히, 오래, 꾸준히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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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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