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아침식사는 보통 이렇습니다. 크림치즈나 피넛버터, 잼을 바른 베이글 반쪽과 오렌지 혹은 사과. 아이는 우유와 함께, 엄마 아빠는 커피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지요. 엄마 아빠 중 누구든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커피를 내리고, 오븐에 불을 올려 베이글을 살짝 굽습니다. 보통은 이렇게 간단한 메뉴로 움직임을 최소화하면서 아침 식사 준비를 하는데, 일주일에 이삼일은 이보단 조금 더 복잡한 메뉴를 차려야 합니다.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아침 메뉴인 ‘고구마 팬케이크’을 내놓아야 할 때가 바로 그 때입니다.
삶은 고구마를 잔뜩 으깨 넣어 만드는 고구마 팬케이크를 구워내는 건 남편 몫. 분명 이 메뉴를 처음 시작한 건 엄마였는데, 무슨 음식을 해도 요리 못하는 엄마가 해준 것보단 아빠가 해준 것을 더 맛있어하며 잘 먹는 탓에 이 고구마 팬케이크 만들기도 남편 몫이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아빠가 구워야 바삭바삭 맛이 있다나요. 이 팬케이크를 굽기 위해서는 우선 집 앞 아시안 마켓에 가서 고구마를 골라 사 와야 합니다. 상자 가득 담긴 고구마를 뒤져 제 맘에 드는 모양의 고구마를 고르는 것은 아이의 몫입니다. 그렇게 골라 온 고구마를 아빠에게 전달하면, 아빠는 다음 날 먹을 팬케이크를 위해 전날 저녁부터 미리 준비합니다. 고구마를 깎고, 썰어서 물에 삶고, 뜨거울 때 으깨고, 거기에 밀가루와 계란, 우유, 소금 한 꼬집을 섞어 넣어 달그락 달그락 휘젓습니다. 그렇게 만든 반죽에 비닐 랩을 씌워 냉장고에 넣어 두면 내일 아침 메뉴 준비가 끝나는 셈이죠.
그런데 아주 가끔, 아이가 내일 아침 메뉴로 ‘고구마 팬케이크’를 주문했는데 깜빡 잊고 전날 저녁에 미리 준비하지 못하는 때가 생깁니다. 그러면 그 날 아침 부엌은 그야말로 정신이 없습니다. 급히 고구마를 깎고 썰어 물에 삶고, 얼른 으깨 반죽을 휘리릭, 그런 다음 달군 팬에 반죽을 촥. 뒤집개 대신 언제나 손목 스냅을 이용해 팬케이크를 뒤집는 아빠의 솜씨에 아이는 “우와~”를 연발합니다. 지글지글 바삭바삭 방금 구워낸 고구마 팬케이크에 꿀을 듬뿍 뿌려 먹는 재미. 아이는 아빠의 수고와 정성이 듬뿍 들어간 팬케이크를 순식간에 먹어 치웁니다.
에릭 칼(Eric Carle)의 그림책 <팬케이크, 팬케이크>(Pancakes, Pancakes!)를 처음 읽게 된 것도, 아이의 이 ‘고구마 팬케이크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엔 뜻밖의 가르침이 숨어 있었습니다. 막 구워져 나오는 따끈따끈한 팬케이크 한 장,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노동이 들어 있는지를 보여주거든요. 우선 반죽에 들어가는 밀가루를 얻기 위해 누군가는 밀을 수확하고, 밀알을 털어내고, 그걸 가루로 만들어내는 노동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반죽에 들어가는 계란을 얻기 위해선 닭이 알을 낳는 수고를 했어야 하고, 그 따끈한 알을 직접 거둬오는 손이 필요합니다. 우유를 얻기 위해선 누군가 젖소에게서 젖을 짜내야 하고, 팬케이크를 굽기 위해 불을 피우고, 팬에 버터를 두르고, 반죽이 타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는 수고를 또 해야 하지요. 이 모든 과정을 아이가 하나 하나 직접 해보는 걸로 그 수고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이 그림책을 함께 읽으며, 바쁜 아침 시간에 고구마 팬케이크를 굽는 아빠의 수고, 그리고 그 반죽 안에 들어간 수많은 노동과 일하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재래시장이라곤 일주일에 한 번, 시내에서 열리는 ‘파머스 마켓’(Farmers’ Market) 뿐인 이곳 미국에서, 우리의 먹거리가 어디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오는지 아이에게 보여주기란 쉽지 않습니다. 언제 가도 식료품이 빽빽이 들어차 있는 초대형 마트에서는 식료품을 나르고 진열하는 직원조차 자주 보기 어렵습니다. 모든 것이 미리 깔끔하게 포장되어 나오고, 대량으로 구매할수록 값이 저렴해지는 곳, 심지어 물건값을 계산하는 일조차 사람을 마주하지 않고 자동으로 할 수 있는 곳에서 그 많은 식료품과 포장재, 그 가격 뒤에 숨어 있는 ‘사람’과 ‘노동’의 가치를 알아보고 인정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물론 파머스 마켓이나 소규모 유기농 매장에 가면 지역의 농산물을 포장재 없이, 제 값을 치르고 구매할 수 있지만 경제적으로 전혀 여유가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그림책이 더욱 고맙게 다가옵니다.
얼마 전, 처음으로 비지찌개를 직접 만들어 먹었습니다. 한국에선 비교적 쉽게, 싸게 살 수 있었던 비지 한 덩이를 얻기 위해 메주콩을 사서 몇 시간을 불리고, 미끌거리는 투명한 껍질을 한 시간 내내 까고, 끓이고, 갈아서 겨우 겨우 비지찌개를 끓여 먹던 날, 다시 이 그림책을 꺼내 보았습니다. 대학가 식당에서 일하며 식당에서 나오는 고기며 반찬을 직원가에 구매해 우리 집 냉장고를 채우던, 종일 남이 먹을 밥을 만들고 차려내고 치우며 한달 생활비를 벌어가며 살았던 나의 엄마가 생각났습니다. 비지찌개가 먹고 싶을 땐 그저 집 앞 두부전문 식당에 나가 천원, 2천원에 비지 한 덩이를 사오면 그만이었던, 그렇게 사온 비지 한 덩이를 엄마에게 내밀기만 하면 그만이었던 나의 지난날이 생각났습니다. 그렇게 쉽게 내 손에, 내 입에 들어오는 먹거리들에 얼마나 많은 노동이, 삶이, 이야기가 들어있는지 미처 알지 못했던 지난 날들이 말입니다.
<아빠표 팬케이크. 왼쪽이 불에 올린 팬에서 구워지고 있는 팬케이크, 오른쪽이 접시에 담긴, 조각 조각난 팬케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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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
에릭 칼, <팬케이크, 팬 케이크>
(번역서)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504543
(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