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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심하게 오글거리거나
허술한 스토리가 방해가 되긴 했지만
'태양의 후예'는 정말 오랜만에 다음회를 기다리게 해 준 드라마였다.
그런데 몇 번을 돌려보게 만드는 명장면과 명대사들 중에서도
내가 가장 집중하고 감정이입해서 본 장면은 송송커플의 씬이 아니라
아마 6회 쯤이었을까..
바로, 우르크에 지진이 일어나는 장면이었다.

올해로 16년째 일본에 살고 있는 나에게
그 장면은 드라마가 아니라 생생한 현실 그 자체였다.
아직 우리 가족이 살고있는 도쿄 근교에 대지진이 일어나진 않았지만,
5년 전의 동북대지진의 충격과 후유증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봉사활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가뿐한 마음으로
기념촬영을 하던 드라마 속의 의료팀들은
갑작스런 지진으로 재난이 일어난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깔끔하고 이쁘게 차려입었던 의사와 간호사들이
먼지투성이가 되어 다친 사람들 손목에 위급한 순서대로
색깔별 띠를 둘러주고 사망선고를 내린다.

일 잘 하는 의사와 군인들로 한 팀이 된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실제로도 존재해 얼른 찾아와 주었으면.. 싶은 재난 현장이
우리 현실 속에서 벌어지고 말았다.
바로 지난주 일본 구마모토에 발생한 대지진..

지진은 자신들의 운명이라 여기고 살아가는 일본인들에게도
이번 구마모토 지진은 지금까지의 기록이나 예상과는 전혀 달라
피해와 불안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진원이 이동을 하며 여러 차례 흔들리는, 흔하지 않은 경우라고 한다.
드라마 속에서도 본 지진이 일어난 후에 여진이 일어나
무너진 건물 속의 생존자들이 더 위험한 상황을 맞거나
구조자들이 다치기도 한다.
구마모토 지진은 일어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지만
본진 못지않게 강한 여진이 수백차례 일어나 주민들의 피난생활이
장기화될 전망이다.

재난은 피해 상황 그 자체만으로도 어려운 현실이지만,
그에 따른 2차적인 피해와 문제들도 만만치 않다.
드라마 속에서도 지진을 겪은 사람들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도 하고
죽음의 위기에 빠진 사람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과 트라우마 때문에 괴로워한다.
부족한 식량과 물자도 문제지만
이번 구마모토의 경우는, 지진으로 쓰레기처리장이 무너져
피난대피소의 쓰레기들이 어마어마하게 쌓이기만해 악취 때문에
사람들이 또 고통받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아수라장 속에서도 아기가 태어나고
아이들은 환하게 웃으며 빨리 밖에서 놀고 싶다고 한다.
여진으로 의료용 침대가 흔들리는 중에 태어난 아기의
부모는 이 아이가 나중에 커서 지진을 예지할 수 있는
과학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며 희망을 잃지 않았다.

드라마 속에서도 재난을 겪은 임신부를 위로하기 위해
의사가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려주는 장면이 나온다.
당장에는 다친 몸을 치료해야 하고 물과 음식이 필요하지만,
심리적으로 큰 불안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겐 정서적인 안정과 위로가
앞으로는 더 필요할 것이다.
구마모토가 다시 평범한 일상을 찾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 곳에서 살아남은 어린이들도
다시 학교생활을 시작하고 밖에서 마음껏 뛰어놀기까지는
견뎌내야 할 것들이 적지 않다.
피난 생활 속에서도 어른들이 만든 작은 놀이공간에서 지점토나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의 모습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천진난만했다.
그곳을 돌보는 어른들은,
아이들이 되도록 이런 일상의 감각을 잃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며
따뜻한 시선으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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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진 도로 위를 이불과 짐을 들고 피난생활을 하는 사람들.
무너진 도로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차들.
산산조각이 난 건물 속에서 생존자를 찾는 군인들..
드라마 속 장면들이 정말 현실이 되었다.

구마모토 지진 다음엔
에콰도르에서 강진이 일어나 400여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앞으로도 세상 어느 곳에선 재난이 일어나고 전쟁이 일어나고
끔찍한 테러가 또 벌어질 지도 모른다.
저성장과 불황이 지속되고 취업문제가 이렇게 점점 심각해져만 간다면
이런 사회문제 자체도 우리에겐, 특히 아이들의 미래에는 재난이 아닐까.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아이들은 또 어떻게 키워야 할까.
'태후' 드라마는 예기치 못한 재난으로 주인공들이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과정을 통해 자신에게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이전과는 다른 자신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을 제대로 잘 해내고, 끝까지 책임을 지는 일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지도.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들은
캐나다에서 화산이 폭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 그곳으로 향했다.
아마 우르크 지진 때, 허둥지둥 맞이했던 그 재난현장 때보다
훨씬 더 능숙하고 현명하게 '일 잘 하는 남자와 여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재난은 되도록 안 일어나길 바라고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제발 안 겪고 싶은 무서운 일이지만
그래도 재난을 통해 우리 인간이 배우고 깨달을 수 있는 것들도 많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재난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사람다울 수 있는지, 또 얼마나 사람답게
힘든 일들을 하나씩 해결해 갈 수 있는지, 그런 힘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런 힘과 지혜를 자신의 나라에 국한하지 않고
인류애로 나누고 도울 수 있다면 좋겠다.

"그 어려운 걸 우리가 또 해냈습니다."

재난을 겪을 때마다
전세계인이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세월호 가족들도
구마모토의 주민들도
에콰도르의 시민들도
하루 빨리 평온을 되찾아
가족과 함께 따뜻한 일상을 보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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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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