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의 부엌과 시댁의 부엌 문화가
하나로 만나는 공간이 바로 우리집 부엌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의 근원은 어린 시절 우리의 부모님들이
만들어 먹여주신 것들의 영향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기 마련인데
대부분의 가정에서 요리를 주로 담당하는 사람이 여성인 만큼,
처음엔 친정의 부엌문화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긴 하겠지만
결혼 생활이 길어질수록 시댁의 부엌문화 영향도 점점 스며들게 된다.

언젠가 신순화 님의 글에서 명절 때마다 방문하는 시댁에서
처음엔 낯설었던 강원도의 음식문화를 하나씩 알아가고 익숙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기억난다.
아마 다들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본에 살면서 만나는 한국 친구들과 서로의 음식를 나눠먹을 때마다
그 맛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들을 때가 참 재미있다.
서울이 고향인 친구가 우리 친정에서 보내온 부산 김치를 먹고
진한 젓갈 맛에 굉장히 놀랐다거나, 강원도가 고향인 친구집의 전기밥솥에서
밥과 함께 지어진 감자들을 보고 내가 놀란 일이나..^^

우리집 부엌은 한국 부산 출신인 내 친정의 부엌과
일본 도쿄 출신인 남편 시댁의 부엌 문화가 만나는 곳이다.
올해로 결혼한 지 16년째.
한국과 일본의 음식 문화가 뒤섞여 가끔은 무국적 요리가 태어나기도 하던
우리집 부엌에서 이제는 어느정도 제자리를 잡은 음식들이 하나둘 정리되고 있다.

이제 얼마 안 있어 결혼생활이 50주년에 이르는 양가 어머님들의 음식문화에
나의 16년 경력이 더해지고, 조금만 더 지나면 우리 아이들이 자라
가정을 이루고 스스로 부엌을 책임질 때가 되면
그동안 대대로 이어져 온 음식들이 100년 역사를 채우겠구나
하는 생각에 닿았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식구들과 먹는 음식들은
조부모 세대와 아이들 세대를 잇는 중간 역할을 하는 셈이고
한국과 일본 음식문화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가교 역할도 하는 셈이다.

내가 좀 더 만들면서 연습하고 싶은 음식들,
그래서 아이들에게 꼭 물려주고 싶은 음식들을
<우리집 100년 레시피>라는 이름으로 하나씩 정리를 해 보면 어떨까 싶었다.
친정엄마께서 만드는 음식은 대부분 외할머니께서 만들어 주셨던 음식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나의 세대까지만 계산해도 거의 100년쯤 되어가는 것 같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먹고싶은 음식들이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그런 음식들을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동안 실컷 얻어먹고
나 역시도 그 맛을 부지런히 연습해 스스로 만들 줄 알게 된다면.
아직은 레시피가 얼마 안 되지만, 그동안의 부엌육아를 통해
하나씩 쌓이고 있는 우리집의 100년 레시피, 지금부터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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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떠나 살며 늘 애틋해지는 음식은 뭐니뭐니해도 역시 김치다.
친정 엄마께선 부산분답게 늘 젓갈이 많이 들어간 짭고 매운 경상도 김치를
만드신다. 근데 내가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너무 심한 입덧으로
그런 김치를 먹기 힘들어했는데, 그때쯤부터 젓갈을 가볍게 넣고
짜지도 맵지도 않게 담아, 샐러드처럼 많이 먹어도 부담이 없고
시원-한 김치를 만들어 주셨다.
엄마 말씀으론 이런 김치가 익숙하지 않아서 굉장히 긴장하며 만들었다고 하셨는데
이게 내 입맛에는 꼭 맞았다.

세상에서 나 하나만을 위해 만든 김치 레시피가 있다니!
눈물나도록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다.
내가 흉내내어 만들어보면 그럭저럭 비슷한 맛이 될 때도 있고
그 근처에도 못 갈 때도 있지만, 더 연습해서 이 맛 만큼은 꼭 이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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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하면 떠오르는 음식이 나에겐 전복죽이다.

비행기를 타고 친정에 다니러 갈 때는 한밤중에 도착해도

엄마는 꼭 이 전복죽을 끓여놓고 기다리신다.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이걸 한 그릇 다 먹을 때까지 곁에 앉아 감시(?)하시는데

무거웠던 아기띠를 내려놓고

엄마의 식탁에 앉아먹는 전복죽을 마주할 때마다 얼마나 자주 울컥했는지..

싱싱한 해산물이 풍부한 부산 출신이라 자주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이란 걸 나중에 크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제주 출신인 친구에게 그가 어린시절 먹었던 해산물에 대한 버라이어티한

얘길 들었을 때, 부산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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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톳나물..
집집마다 톳나물은 무쳐먹는 방법이 다양하겠지만
엄마는 물기를 꽉 짠 두부에다 깨소금을 듬뿍 넣어 무쳐 주셨다.
어릴 때부터 본 밥상에 거의 빠질 때가 없었던 이 톳나물은
나에겐 좀 특별한 음식이었다.

우리 가족은 늘 동그란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는데
나물 반찬이 많았던 여러 음식 중에 이 톳나물의 존재감은
어린 내 눈에는 유난히 커 보였다.
마치 한겨울 하얀 눈 속에 바다 채소들이 숨어있는 것 같은 비주얼이
다른 평범한 반찬들 속에서 보석처럼 빛나 보였다.
한입 먹으면 향긋한 바다냄새가 나는 고소한 맛.. 이 반찬만 있어도 밥을 먹곤 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건, 아직도 여전히 엄마는 우리가 찾아갈 때마다
이 반찬을 만들어 주시는데도 요즘의 나에겐 옛날의 그 맛이 안 느껴지는 거다.
그렇게 눈부시게 보였던 자태도 이젠 너무 평범하게 보여
가끔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보곤 한다.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어릴 때 감성이란게 그래서 중요하구나, 하는.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감수성이 풍부한 어린 시절일수록 더 크고 진하게
남는다는 것, 먹는 음식도 역시 그런게 아닐까 하는.
아이 입맛에 맞는 음식을 아이들이 어릴 때 하나라도 더 경험하게 해 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톳나물 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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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젠 친정 엄마의 레시피에 이은 나만의 레시피다.
우엉조림!  금방 만든 따뜻한 우엉조림을 먹을 때마다
고기를 먹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때가 있다.
고소하고 달콤짭짤한 우엉조림을 보면 갑자기 김밥을 싸고 싶어진다.
다른 재료없이 우엉조림만 넣은 김밥도 나는 무척 좋아한다.
친정엄마의 음식에 의존해있다, 결혼생활 연차가 늘어갈수록
내가 내 입맛에 맛는 음식들을 나에게 해 먹일 때의 그 뿌듯함이란.

그리고 우엉이란 식재료를 대할 때마다
동북아시아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우엉은 같은 아시아인 중에서도 한국과 일본, 먹는 나라들이
몇 안 된다고 들었다. 예전 2차대전 때인가 서양인 포로들에게 우엉 반찬을
주었더니 나무 뿌리를 먹이며 학대를 한다고 오해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어쩌면 서양인들에게 우엉은 '굳이 그런 것까지 먹어야하나' 싶은 음식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양도 많고 몸에 좋은 뿌리식물들을 다양한 조리법으로 요리할 줄 아는
동북 아시아인들의 지혜에 감사하고 싶어진다.
채소를 조금 멀리하고 익숙치않은 반찬에 대한 도전정신이 약한
아들이 이 우엉조림을 조심스레 한입 먹더니,
입에 넣자마자  "어? 맛있네." 하며 활짝 웃는 걸 보며
나만 맛있다 느끼는게 아니네..싶어 반가웠던 반찬.
"이건 어떻게 만들어요?" 하며
엄마랑 같이 우엉조림 만들어보고 싶다는 아들. 너도 이젠 곧 우엉의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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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시댁 부엌으로 좀 가 보자.
사진을 너무 많이 올릴 수 없어 좀 아쉬운데, 시어머님의 가장 맛있는 음식들을
하나로 묶어보면 그 공통점은 바로 <튀김 종류>다.
한국 가정과 크게 차이나는 것 중 하나가,
일본은 가정에서도 튀김 요리를 일상적으로 쉽게 해 먹는 것인데
시어머님은 야채, 버섯, 새우 튀김 등 튀김 요리의 달인이시다.

한국 어머니들이 감칠맛 나는 김치를 정확한 계량보다는 '감'으로 만드시는 것처럼,
일본 어머니들도 이 튀김의 적정온도와 바삭함, 재료들의 맛을 최대한 살리는 비법을
오랜 시간을 통해 '감'으로 익혀오신 것 같다.
우리 아이들은 시어머님의 고구마와 새우 튀김,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건 닭 튀김이다.
'카라아게'(요즘 한국에서도 '가라아게'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많이 팔린다고 들었다)
를 손으로 들고 먹기 편하게 닭 다리 부분의 고기를 말아올려 튀겨 주시는데
이게 정말 고소하고 맛있다.

튀김 온도, 방법 등 어머님 곁에서 몇 번을 보고 배워도
막상 내가 만들면 '그 맛'이 아직은 나지 않는 튀김 요리들.
손이 크신 어머님답게 한 바구니 가득 따뜻한 튀김을 눈깜짝할 사이에
만들어내시는 그 비결만큼은 꼭 배워 우리집 레시피에 담아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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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으로 달콤한 디저트 하나.

이건 순수하게 우리 네식구의 생활사에서 탄생한 요리다.

<구리와 구라>그림책을 유난히 좋아했던 딸아이와 수도 없이 만들었던 카스테라.

유아기의 딸아이와 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정말 100번 이상은 만들어 본 듯한 요리.

이젠 재료나 분량이나 레시피를 보지않아도, 눈감고도 대충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데

이 카스테라를 만들면서 

'아! 무슨 요리든 100번 정도 만들어 보면 완전히 자기 요리가 되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주었던 요리다.


카스테라 만들기에 푹 빠져있던 딸아이 사진의 날짜를 보니

맙소사!  만 3살 생일이 겨우 지난 때였다.

내가 이렇게 어린 아이를 데리고 요리를 했다니..

이렇게 어리고 작은 아이는 지금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유년의 우리 아이는 이젠 없지만

그 대신 음식에 대한 추억과 레시피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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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이 질리도록 만들었던 카스테라는

우리 가족의 생일, 입학식, 졸업식, 크리스마스 등등

우리끼리 먹을 때나 손님이 오실 때나 언제든 뚝딱 만들어내는 생크림 케잌으로

진화해 자리잡았다.

계절에 맞는 다양한 과일로 장식해 보기도 하고, 초콜릿이나 홍차맛 케잌으로

변주되기도 하지만 역시 우리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건 가장 심플한 생크림 딸기 맛.

이 덕분에 지난 10여년 간 절약된 케잌 값만 해도 어마어마하지 않을까.

우리 가정을 대표할 수 있는 맛과 요리가 있다는 건, 참 뿌듯한 일이다.



이번 봄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한 딸아이가

선물이라며 벗꽃 그림을 그려 주었다.

하루하루 우리 부엌에서 만들어진 음식들이

아이의 피와 뼈와 살이 되고, 감성과 지성과 상상력이 되어

이 그림으로 태어났을 것이다.


나는 이 벗꽃 그림을 우리집 부엌으로 향하는 입구에 걸어두고

앞으로의 부엌육아를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 보고자 한다.

유성은의 <집으로 데려가 줘>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다.


아침을 닮아있어요 햇살이 비추는 그댄

슬픔이 내려앉은 이 밤을 닮은 내겐

완벽한 하루가 된 거죠


밤하늘처럼 어두운 나의 내면을 밝게 비추어준 우리 아이들.

노래 가사처럼, 아침과 밤이 만나 완벽한 하루가 된 듯

아이들과 보낸 지난 시간들은 나에겐 그런 의미였고

그 중심에는 항상 우리의 부엌이 있었다.


100년 이상 이어져갈 레시피를 하나씩 보태며

세상살이에 조금은 어눌한 우리들이 이 부엌에서 태어난 음식들로

앞으로도 위로받으며 크게 성장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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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연재해온 부엌육아 시리즈는 여기서 잠깐 마무리를 할까 합니다.
   더 많은 이야기는 간간히 생생육아에 또 올리도록 해 볼께요.
   벗꽃이 아름다운 봄,
   아이들과 맛나는 음식 드시며 좋은 추억 쌓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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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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