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어른들의 글쓰기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의 삶에 글쓰기는 어떤 영향을 줄까.

남의 글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고

나의 글은 나 자신에게, 또는 남에게 어떤 의미일까.


일단, 어떤 작가의 글을 좀 읽고 시작해 보자.

가사분담을 둘러싼 남편과의 관계에 대해 쓴 글이다.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마님의 분부만 기다리겠다는 머슴같은 대사가 그다지 기쁘지가 않다.

그 말의 행간에 스스로가 가사일에 대한 주인의식이 없음이 드러난다.

주도권이나 자발성, 책임을 갖지 않겠다는 얄미운 선언처럼도 들린다.

그러니까 자신은 어디까지나 '협조적인' 비관련자의 입장으로 남고 싶다는 거?

뭐 하나 시킬 때마다 사랑과 존중의 마음으로 '부탁'하고

일을 어설프게 끝내놓은 다음에도 반드시

'칭찬'해 주는 것,

아. 이것 자체도 피곤한 일이다.


형식적으로는 집안일과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듯 보이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뭔가 개운치않은 심리를 잘 표현한 글이다.

시키는 대로 한다는 태도는 어찌보면, 상대에 모든 것을 맞추는 행동같지만

사실은 그 일의 책임도 결과도 모두 '시키는 사람'에게 떠넘길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일의 결과가 안 좋거나, 다툼이 일어났을 때

'네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 난 아무 잘못도 없다' 식의 논리를 세울 수 있으니까.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남편을 향한 고질적인 불만의 근원이

그가 집안일이나 육아를 잘 돕지 않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가정의 육아가 자신의 일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

아내가 주체가 되어 하는 일에 자신은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걸로 충분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다른 남편들보다 훨씬 잘하고 있다는 우월감에 당당함마저

장착하고 있는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 작가의 글을 좀 더 읽어보자.


대부분의 남자들은 사랑의 마음이 우러나서라기보다

단지 아내한테 잔소리를 듣기 싫기 때문에 가사일을 하기 시작한다.

아내의 심기가 불편하면 본인도 불편하니까.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은 지시받고 조종당하는 기분을 싫어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남자에게 일을 다 하면

칭찬을 꼭 해줘서 기분 좋게 해 다음에 또 하게 하라는 '칭찬 요법'을 권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다. 아니, 하기 싫다!

가사일이 끝났을 때 아무도 그에 대한 고마움이나 고됨을 평해주지 않는

그 적적함과 허탈함을 그도 느껴봐야만 한다. ... ...


뚜껑을 덮어 반찬 통들을 냉장고에 집어넣는 것부터가 설거지임을

깨달을 날이 올 때까지 칭찬은 하고 싶지가 않다.


아이고, 시원해라. 좀 더 써 보세요!!


우리 가정은 남편과 나, 둘이 같이 구축한 세계다.

우리가 더럽힌 것, 먹는 것, 우리가 낳은 것, 모두

우리가 직접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

평등의 모습이 항상 5 대 5일 필요는 없다.

어떨 때는 1 대 9일 수도, 3 대 7일 수도, 6 대 4일 수도 있다.

서로의 노고를 고마워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걸로 경시하지 않는 것,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많은 것들은 사랑으로 함께 해 나갈 수 있다.

악처를 연기할 필요도,

현모양처로 무리할 필요도 없다.

인간적인 공정함과 낭만적인 관대함을 최선을 다해 양립해 나가고 싶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더 나아질 것이다.


이상, 임경선 에세이 <태도에 관하여>에 나온 글이었다.

읽으면서 잘한다, 잘한다, 더 읽고 싶다, 마지막엔 뭐라고 정리할까?

이런 생각이 드는 글이라면 중간에 읽다 그만두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좀 더 좋은 글이라면,

빨리 글이 끝나는게 아쉬워서.. 뒤에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해 보거나 일부러 아껴서 읽게 되지 않을까.

더 더 좋은 글이라면,

읽는 내내, 혹은 다 읽고 난 다음,

나도 뭔가 쓰고 싶어 근질거리게 될 것 같다.


그런데 어른들의 글쓰기가 참 힘든 건

잘 써야 한다는 부담감(특히 남들에게 보이는 글일 때)이

편하고 자연스럽게 쓰려는 마음을 너무나 크게 방해하기 때문이다.

속에 든 감정과 생각들은 고급진 언어들로 가득한 것 같은데

막상 문자화된 글들은 왜 그리 저렴하기만 한지..ㅠㅠ

읽히기도 전에 자기검열에 걸려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한 채 방치된 글들.

그게 반복이 되다보면 다음, 그 다음 글을 쓸 때 더 자신감을 읽게 된다.


서론이 길어져서 너무 미안하지만

(아니, 지금까지 쓴 게 서론이었단 말야? ... 미안하지만..그러네요;;)

아이들의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바로 이러한 어른들의 글쓰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정말 부러운 건,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데 있어

대부분의 어른들과 같은 선입견이나 남을 의식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잘 쓰려는 노력을 크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느낀대로 생각한 대로 그때그때 떠오르는 것들을

직관적으로 표현한다.


다만, 억지로 쓰게 하는 글쓰기, 독서감상문 대회같은 문화가

어린 아이들마저 글쓰기는 귀찮은 것, 이란 등식을 심어주고 만 것이다.

또 글을 빨리 익히게 되면서 아이들의 생각 자체가

언어식 사고에 빨리 종속되어버릴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이 인지하는 것에 비해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건 턱없이 적으니까.


두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한 일본인 작가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일본어로도 독일어로도,

나의 감정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그렇다.

한국어로도 일본어로도, 정확히 언어화시킬 수 없는 감정을

나도 자주 경험한다.

그런데, 이 어려운 일을 우리 어린이들은 가끔, 아니 자주

그것도 너무도 쉽게 해 버린다.

초등 2학년 아이가 쓴 글을 한번 보자.


크기변환_DSCN5535.JPG

가만히 쳐다보고 있을 땐 안 움직이는 것 같은데
뭔가를 하다가 문득 시계를 쳐다봤을 때, 저만치 달아나버린 느낌.
어릴 때 한번쯤은 경험해 보지 않았을까?
나는 어렸을 때, 한번은 날을 잡고 오늘은 기필코 움직이는 순간을 보고야 말리라
마음먹고 눈이 빠지도록 시계를 노려본 적이 자주 있었다.

시계에 대한 자신만의 내면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드러낸 것도 좋은데
'똑딱똑딱'과 '뚝딱뚝', '달아나지요'와 '가만히 있지요'
운율도 기가 막히고, 뭘 하다 도중에 얼른 본 '뚝딱뚝' 이란 표현이 긴장감을 더한다.
아무 이유도 없이 시계가 범인(?)이 되고
아이는 현장검거(?)를 노리는 경찰같은 느낌이 이 글에서 드는 건 나만 그런가??

10세 이하의 아이들에게 글을 쓰게 할 때는
이렇게 자신이 경험하고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쓸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게 글쓰기의 시작이다.
운율이 잘 구분되도록 줄을 바꿔 쓰라거나
맞춤법 지적, 틀린 부분을 고치지않고 그대로 쓴 것(마지막 '있지요') 등을
먼저 엄격하게 가르치는 건 아이들을 글쓰기와 멀어지게 하는 지름길이다.

평가에 앞서
'아, 이런 걸 느꼈구나. 나도 어릴 때 그런 적 있는데' 식으로
아이가 쓴 글에 대한 공감을 먼저 표현해 주는 게 좋다.
형식적인 부분은 그 다음에 가르쳐도 절대 늦지 않다.
저학년까지는 솔직하게 자기를 표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두고,
아이 스스로 자신의 표현에 대한 자신감을 갖도록 하는게 좋다.
그렇게 해도 글을 쓰기 어려워 하는 아이들에게는
그냥 한줄평하듯이 말로 한마디 표현해 보도록 해도 좋은데,
다음 사진을 한번 보자.

크기변환_DSCN3221.JPG

무더운 여름,
동물원에 갔을 때 북극곰이 물 속에서 첨벙거리는 모습을 구경했을 때인데
여러분은 이 사진에 한줄로 느낌을 표현하라면 뭐라고 하고 싶은가?

"와, 사이다 같다."
이 장면을 보자마자 우리집 큰아이가 했던 말인데
나는 해마다 여름이면 사이다같이 시원한 이 사진이 두고두고 생각이 난다.
군더더기없이 딱 맞는 표현이라서.
이렇게 지나가듯 무심히 한마디씩 뱉어내는 아이들의 말이나 표현을,
어른이 글로 대신 써서 남겨주면
글쓰기를 싫어하는 아이들도 조금씩 관심을 가질 수 있다.

크기변환_DSCN6839.JPG

이건 꽤 유명한 그림책, 레오레오니의 <으뜸헤엄이>.
연약한 작은 물고기들이 큰 물고기에 대항하기 위해, 모두 힘을 합쳐
큰 물고기 모양을 만들고 주인공 검은 물고기가 "내가 눈이 될게."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학교에서 이 책을 읽고 감상을 써 가는 숙제가 있었는데
초등 2학년인 아들(책읽기, 글쓰기싫어하는 전형적인 아이)은 딱 한 줄로 이렇게 써 갔다.
"좋은 작전이었어!"


길다고 다 좋은 글이 아니다.

간단명료하게 표현할 길을 못 찾아 늘 길게 쓰는 사람(내가 그렇다;;)이 너무 많다.


크기변환_DSCN6819.JPG

짧은 글로 재밌고 정확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아들은
학교 선생님께 몇 번 칭찬을 받더니, 나날이 자기다운 표현이 늘고 있다.
이번 여름방학에 방울토마토 관찰일기를 쓰는데
갈색으로 변해 말라버린 잎을 아들은 이렇게 묘사했다.

"잎이 불에 탄 것 같아요."

처음에, 아이가 이 말을 했을 때, 엥?? 그랬다가
낙엽처럼 바싹 말라버린 잎을 보니, 정말 불에 탄 것 처럼 보였다!
아들의 직관력과 거침없는 표현을 마구마구 칭찬해 주며 나는 이렇게 외쳤다.
"아들, 이건 써야 해! 너무 참신한 표현이다. 유사이래 처음이지 않을까?!"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이날, 아들은 제법 길게 관찰일기를 써서 마무리했다.

본대로 느낀대로 편하게 쓰면 된다는 걸 알았으니,
한 줄에서 조금씩 글이 길어지고 내용도 풍부해지고 있다.
아이들의 글쓰기는 이렇게 조금씩 진화해 가는데
아빠나 형제, 조부모 분들에게 아이가 생각해낸 재밌는 표현들을
가족이 만난 자리나 우리 아이를 잘 아는 손님이 오셨을 때
이런 에피소드를 화제로 꺼냈을 때(빨리 얘기하라고 아이가 부추길 때도 있다^^)
어른들이 즐거워하는 경험 한번, 학교에서 자신의 글에 대한 칭찬 한번,
이렇게 가정-사회-학교에서의 칭찬이나 인정 경험이 3번 정도만 반복되면
아이는 그때부터 글쓰기를 즐기게 된다.

고학년으로 갈수록 내용뿐 아니라, 맞춤법 등의 형식적인 부분들도
다듬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고 점점 어느 정도 체계적인 글쓰기를
쓸 줄 알게 된다.
부모가 할 일은 아이의 글을 함께 읽고 이야기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가능하다면 아주 가끔이라도 부모도 글쓰기를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여름방학은 계절이 주는 감각자극이 풍부하고, 시간적인 여유도 많은 시기다.
아이들이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
글을 통해 읽다보면 아이의 성향에 대해서도 참 많이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독서는 성실한 사람을 만들고
글쓰기는 정확한 사람을 만든다

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육아의 긴 여정동안,
아이와 함께 이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크기변환_DSCN6814.JPG

김소연 시인이 그랬던가.
어린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비행기표가 있다면
아무리 비싸더라도 꼭 사고 싶다고.

살아있는 감각과 유일무이한 자신만의 표현력을 가진,
어린이 시절을 현역으로 보내고 있는 이분들과 한집에 살고 있다는게 가끔은 신기하다.
시인이 상상하는 비싼 비행기표 없이도 언제든 이분들의 세계를 엿볼 수 있으니.

** 베이비트리 가족 여러분 댁에도 한 분 이상씩 다 계시지요??
'이 주의 명언'처럼 아이만의 표현을 종이에 써서 거실에 붙여놔 보세요.
그냥 흘리듯 지나친 말들이 문자가 되어 남겨졌을 때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 아이가 자연히 느끼게 될 거예요.
얼마전에 안정숙 님네 따님이
'배꼽'과 '백곰' 발음이 비슷하다며 깔깔댔다는 글을 읽고,
저 너무 좋았어요.
새로운 발견, 새로운 말과 글은 우리 삶을 즐겁게 해 주잖아요.
이런 건, 사교육없이도 우리가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해요.
삶과 글쓰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
아이들과 함께 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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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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