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복직하고 전쟁 같은 맞벌이를 시작한지 딱 2주일이 됐다. 맞벌이 1주일 만에 나는 대상포진에 걸렸고, 아내는 지금 감기에 시달리고 있다. 아무래도 우리 부부가 맞벌이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나는 아내가 복직한 9월 1일부터 야근을 하지 않는 날은 20분 먼저 퇴근을 하면 좋겠다고 사무실에 용감하게 얘기했다. 내부에서 제법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이 말은 아내보다 내가 먼저 집에 도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을 챙기고 저녁 식사 준비를 내가 한다는 뜻이다.
사무실에서 퇴근을 한 나는 차를 몰고 은유를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간다. 윤슬이는 초등학교 돌봄교실을 마치고 태권도 학원에 간다. 태권도 학원에서 집에 오면 6시20분쯤.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들어온다. 윤슬이는 TV 앞에 쪼르르 달려가서 누구의 터치도 받지 않고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시청한다. 우리 부부는 원래 평일에는 아이들에게 TV를 보여주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맞벌이로 TV 시청 원칙이 깨졌다. 윤슬이는 나름 이 시간을 즐긴다.
어제는 저녁 반찬거리가 없었다. 은유를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나와 동네 마트를 들렀다. 은유가 오징어를 먹고 싶다고 해서, 냉동오징어를 샀다. 집에 오니 역시 윤슬이는 TV 앞에 앉아 있었다. 은유도 TV를 보기 위해 2층으로 쪼르르 올라간다.
마트까지 가야해서 퇴근도 좀 서둘렀지만, 시계를 보니 6시40분. 이제 서둘러 저녁을 준비해야 한다. 먼저 쌀을 씻는다. 끓인 물을 부어서 속성으로 물을 불린다. 이제 오징어볶음을 준비해야 한다. 오징어를 씻고 야채와 같이 썬다. 양념은 아이들 입맛에 맞추기 위해 고춧가루는 넣지 않고 간장, 설탕, 물엿, 맛술을 넣어서 짭짤달콤 데리야끼 소스를 만든다. 여기에 생협에서 산 햄을 길게 썬다. 햄도 아이들을 입맛에 맞추기 위한 재료다.
은유는 오징어볶음을 잘 먹는데, 윤슬이는 썩 좋아하지 않는다. 잠시 고민에 빠진다. 계란찜을 하기로 결정. 그릇에 계란 2개와 아침에 아이들이 먹다 남긴 계란오믈렛도 같이 넣는다. 계란오믈렛에 햄과 버섯, 양파, 대파 등이 들어가 있어 계란찜에 다른 재료를 넣지 않아도 된다. 계란찜은 압력밥솥에 넣어 밥이랑 같이 한다.
이제 밥이 되는 동안 오징어볶음을 할 차례. 오목한 후라이판을 충분히 불에 달군다. 야채를 넣는 순간 “차악~”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야채를 볶고, 오징어와 햄을 넣고, 소스를 넣고 오징어볶음을 하는 중에 아내가 들어온다.
아내가 옷을 갈아 입는 동안에 밥도 다 되고, 이제 저녁을 먹을 시간. 아내가 2층으로 올라가 TV 보는 아이들과 협상을 할 차례다. 보고 있는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이면 다 보고 저녁을 먹고, 한참 남았으면 아이들의 불평과 불만에도 과감하게 TV를 끄고 아이들을 몰아서 식탁 앞에 앉힌다.
예상대로 은유는 오징어볶음을 잘 먹는다. 나중에는 오징어볶음이랑 밥을 비벼서 싹싹 해치웠다. 윤슬이는 오징어볶음보다는 계란찜으로 저녁을 먹었다. 아이들 입맛이 달라 참 곤란할 때도 간혹 있다. 아내가 “주는 대로 먹어라”하면 윤슬이는 “입맛이 다른 걸 어떡해”라고 받아친다. 많이 컸다.
저녁을 먹으니 8시 가까이 됐다. 아내가 설거지 하는 동안 남자 셋은 집 앞 학교운동장으로 소위 ‘괴물놀이’를 하러 갔다. 우리가 이름 붙힌 괴물놀이는 내가 괴물이 되어 아이들과 태권도도 하고, 레슬링도 하고, 잡기놀이도 하는 놀이다. 남자 아이들이라서 몸으로 꼭 놀아줘야 한다. 매일 저녁 괴물놀이를 하지 않으면 놀아도 놀아주지 않는 게 되고, 은유는 심지어 울기까지 한다.
은유는 머리카락이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뛰어논다. 은유가 응가가 마렵다고 해서 괴물놀이가 급 마무리됐다. 집에 오니 8시30분, 이제 씻고 잘 준비를 해야 할 시간. 누가 먼저 씻는지도 늘 논란거리다. 오늘은 윤슬이가 순순히 먼저 씻겠다고 해서 큰 다툼 없이 아이들을 순서대로 씻겼다. 윤슬이는 요즘 자기가 머리를 헹구겠다고 한다. 어설픈 헹굼이라 내가 늘 마무리를 해줘야 하지만, 이렇게 아이들은 조금씩 조금씩 큰다.
은유는 공룡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아빠한테 공룡을 자주 그려달라고 한다. 어제는 도서관에서 빌린 공룡책을 다 반납해버려서 자기가 찾는 책이 없자 “앙~”하고 서글픈 울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안아주니 좀 진정이 되는 듯, 은유가 우리 집 책장에 꼽혀 있는 공룡책을 읽어달란다.
이제 누워서 잘 시간. 시계를 보니 9시45분, 늦었다. 맞벌이를 하다 보니 아이들을 9시에 재우는 게 쉽지 않다. 다음 날 아이들 생활을 위해서라도 9시30분에는 눕히려고 하는데, 이런 저런 사소한 실랑이로 늦어졌다.
윤슬이는 눕자 말자 잠이 든다. 은유는 이리뒹굴, 저리뒹굴. 이런 말, 저런 말. 참다 못하 내가 “눈 감아”라고 말하자 은유가 “눈 감았잖아”라고 소리친다. 어둠 속에서 가만히 보니 눈은 감았다. 내가 “빨리 자”라고 말하자, 은유가 “그런 말 하지마”라고 말한다. 에휴. 여튼 은유가 잠이 드는데 한참이나 시간이 더 걸렸다. 아이들 재우고 거실에 나오니, 10시30분. 아내는 주방에서 메추리알 조림도 하고, 지인에게 산 단호박도 찌고 있다.
이렇게 긴 하루가 끝났다. 아내는 피곤해서 빨리 자러 들어갔고, 나는 TV를 봤다. 아내가 집에 있는 동안은 조금은 여유가 있었는데, 맞벌이를 하니 많이 다르다. 아내는 작년에 맞벌이를 할 때 할만 했는데, 지금은 힘들다라고 말한다.
내가 전업주부가 하는 게 어떨까 진지하게 고민도 하고 있다. 이것도 선택의 문제. 문제는 가족관계만 있는게 아니다. 사회적 관계도 있다 보니 결정이 참 쉽지 않다. 생각보다 아이들은 잘 지내는 것 같다. 이 상황을 적응하는데 오히려 우리 부부가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 그래도 지금까지 잘해 왔듯이 앞으로도 잘 하겠지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