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밥 줘라. 요즈음 들어 부쩍 크는 아이. 일어나자마자 밥을 찾았다. 전날 남은 찌개가 있으면 그래도 다행이지만 부엌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텅 빈 가스레인지. 냄비 하나 보이지 않는 날엔 냉장고를 위에서 아래까지 훑어봐야 했다. 이왕 하는 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해야 하는 일 앞에서는 그 생각이 앞섰다. 음식을 할 때에도 이왕 하는 거. 맛있는 음식이란, 바로 직전에 만든 음식이란 사실을 기억해 냈다. 가급적 끼니 직전에 음식을 만들다 보니 비교적 빨리 음식을 만드는 노하우를 익혀갔다. 가끔씩 간이 맞지 않아 아이에게 핀잔을 듣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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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픽사베이)

 이제 몇 개월 뒤면 대학원도 졸업이다. 코 앞에 닥친 졸업 논문. 어떤 논문을 쓸까?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싶었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길은 시시할 것 같았다. 경마공원에 트랙을 따라 달리는 경주마보다는 거칠고 힘들 수는 있겠지만 들판에서 뛰노는 야생마가 주는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싶었다. 새로운 숲을 발견하자, 며 주제를 정했다. 본격적으로 논문 준비 시작.
야생의 세계를 만날 줄 알았는데 영어의 세계를 만났다. 참고할 논문을 찾는데,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이다 보니 국내에 관련 논문이 많지 않았다. 지능보다는 감성을 인공보다는 자연을 좋아했던 나였지만 논문을 쓸 때만큼은 푸른 감성은 그닥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매일 인터넷번역기에다가 해석이 되지 않는 문장을 입력했다. 한 두 문장이면 다행이련만. 단락 전체를 복사를 해서 붙여 넣은 적도 있었다. 예전엔 시집을 끼고 살았는데 지금은 인터넷 번역기를 끼고 산다. 그래도, 이왕 쓰는 논문인데. 


 아이가 여름 방학이라고 해서 아파트 관리비를 내는 일도 방학을 하는 건 아니었다. 꼬박 꼬박 내야 하는 보험금, 그리고 아이 교육비. 경제 활동을 하는 일도 방학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래도 일주일에 책 한 권을 읽고 글을 쓰는 수업을 받겠다는 아이들이 꾸준히 문을 두드렸다. 남들은 불황이라는데, 감사하자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보면 또 힘들었던 마음은 사라져갔다. 아이들이 원고지에 풀어놓은 글자 하나하나에 관심을 기울였다. 매서운 여름,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을 보면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이왕 수업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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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픽사베이) 

그러던 어느 날 바람의 온도가 바뀌었다. 지난 여름엔 바람마저 매섭게 뜨겁더니만, 어느덧 밤마다 선선한 바람이 귀뚜라미 소리를 실어 날랐다. 가을이 오는구나. 문득 계절이 알려주는 시간을 느끼면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계 안에 있는 시간과 선선한 바람이 알려주는 시간은 달랐다. 시계를 바라보면 계획했던 일을 확인하고 더 분주하게 몸을 움직였지만, 계절이 알려주는 시간 앞에선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게 했다. 벌써 가을인가 란 생각. 가을을 알리는 바람은 올 한 해도 이렇게 빠르게 끝나갈 것 같은 안타까움을 함께 몰고 왔다.


 잠자리에 들기 직전 밖에서 들리는 귀뚜라미 소리는 가을이라고 알렸지만 내게는 왜 이렇게 바쁘세요?라고 들리는 듯 했다. 몸에 붙은 군살이 싫어 체중을 줄였더니만 어머니는 혼자서 하는 일이 많아 살이 빠졌다며 걱정이셨다. 살을 뺀 건 의도적이었지만 할 일이 많은 건 사실이었다. 음식을 만들고 집안을 정리하고 땀에 젖은 옷을 빨래 하는 난 영락없는 ‘엄마’였다. 관리비와 보험금, 아이 교육비를 벌고 있는 ‘아빠’의 모습과 시간이 나면 학교 도서관에 접속해 논문을 찾고 사전을 찾아 보는 난 ‘학생’이기도 했다. 엄마이면서 아빠이고 학생인 역할. 각기 다른 세 가지 역할. 하지만 다른 역할을 하더라도 공통된 생각 하나. 이왕 하는 거. 한 가정 세 식구가 하는 일을 혼자서 도맡아 하려니 올 여름은 별다른 기억을 남기지 않은 채 지나갔다. 


 이왕 하는 거란 생각에 가끔 집을 찾는 손님들은 집이 깨끗하다는 칭찬을 했으며, 아이도 예전보다 아빠 음식을 두고 호평이 조.금.은. 늘었다. 호화로울 정도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경제생활을 할 정도의 벌이에다 학교 성적도 괜찮은 편이었다. 결과가 좋으면 행복해야 할 텐데. 쉽게 ‘행복해요’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얼마 전 카톡으로 연락이 온 한 기자 분이 묻는 안부에 “토할 것 같은 요즈음”이라고 대답을 했다. 하루 24시간, 빼곡히 짜인 일과 계획. 아빠이면서 엄마이고 학생이었던 난 그렇게 하루하루 허덕였다. 


 프로이트는 행복한 삶에 대해 “사랑하고 일하고, 일하고 사랑하라, 그것이 삶의 전부”라고 말했다. 그가 사랑.하.고. 일하라고 했던 건 일을 하는 것만큼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의미일 테다. 다만 어떤 일을 할지 누구를 사랑할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일을 열심히 했고 아이도 가까이서 사랑을 했지만 지난 여름이 준 공허함. 그건 내 이름을 아빠와 엄마, 그리고 학생이란 일반 명사가 덮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을 생각하지 않고 해야 하는 일의 압박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은 없었다. 프로이트의 말이 자신을 사랑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 는 말처럼 다가왔다.


잃어버린 지난 여름. 이번 가을엔 역할에서 잠시 벗어나 하루에 단 몇 시간 나를 위한 시간을 갖기로 했다. 역할이 주는 일반 명사를 지우고 그 자리에 내 이름을 쓰기로 했다. 아침마다 시를 읽고 단상을 적어놓은 내 시간부터 찾자, 고 다짐했다. 어쩌면 그게 오랫동안 내 일을 지키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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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픽사베이)

번아웃 신드롬. 일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가치가 떨어진다 생각하고 손에 일이 없으면 불안해하거나 죄의식을 느끼는 현상. 성격적으로 완벽주의자, 책임감이 강해 자신이 맡은 일은 만족할 때까지 끝내려 하는 직장인뿐만 아니라 주부나 자영업자, 학생들에게 나타나는 현상. 어떠한 일에 몰두하다가 신체적·정신적 스트레스가 계속 쌓여 무기력증이나 심한 불안감과 자기혐오, 분노, 의욕 상실 등에 빠지는 증상을 말한다 ?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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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를 만들고 다듬느라 35년을 흘려보냈다. 아내와 사별하고 나니 수식어에 가려진 내 이름이 보였다.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고 기자 생활을 접고 아이가 있는 가정으로 돌아왔다. 일 때문에 미뤄둔 사랑의 의미도 찾고 싶었다. 경험만으로는 그 의미를 찾을 자신이 없어 마흔에 상담심리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 지은 책으로는 '지금 꼭 안아줄 것' '나의 안부를 나에게 물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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