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바이올린?
아루가 초등학생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 악기 수업을 권했다. 음악이 삶의 의욕을 북돋아 주고 힘들때 위로가 되며 평생 좋은 친구가 된다는 것을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아이가 음악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기를, 듣고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악기 하나쯤은 자유롭게 다루어 표현해낼 수 있기를 바랐다.

 

초등학교 때 배운 내 피아노 실력은 체르니 30번 초반에 머물러 있다. 어른이 되어 더 배우려고도 했는데 꾸준히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마음은 모차르트, 쇼팽을 동경하는데 손가락이 따라주지 않으니 답답하고 한숨만 났다. 타고난 재능이 부족함을 탓하다가 ‘매일매일 연습하는 게 지겹더라도, 엄마를 졸라서라도 어릴 때 더 배웠어야 했어.’라는 결론에 이르곤 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다른 건 몰라도 악기만큼은 꾸준히 배우도록 할 생각이었다. 악기를 배우는 과정이 지루할지라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 자체로도 충분히 교육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싫어!”
하지만, 아이는 단호했다. 어릴 때 악기를 배우면 얼마나 좋은지 조목조목 설명을 해도, 첼로 공연을 가까이서 보여주고 “멋지지? 아름답지?” 호들갑을 떨어도, 심지어 “발표회 하면 저렇게 예쁜 드레스 입을 수 있는데...” 아이가 솔깃할 이야기로 꼬드겨 보아도, 급기야 집에 있는 쿼터 바이올린(1/4크기)은 올해 지나면 쓰지 못할 거라는 현실적인 이유를 대서 압박을 했지만 조금도 끄떡하지 않았다.

 

내가 뭘 많이 시키는 엄마도 아니고, 이렇게 진지하고 집요하게 뭔가를 배우라고 권한 것이 처음인데 어쩜 이럴 수 있을까? 한 번 해보지도 않고 무조건 싫다고 하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0.001초의 주저함도 없이 단칼에 싫다고 하는 게 몹시 서운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옳고, 악기 교육이 아이의 현재와 미래에 중요한 경험이 될 것이라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렇지만 싫다는 아이를 억지로 시킬 수는 없는 노릇, 아이가 원하지 않는데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네가 싫다면 할 수 없지.”
밀당의 기본은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최대한 쿠~울하게 포장을 하려 했지만,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았다. 왜냐면 나는 아루에게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정말 간절했으니까.
‘배우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 언젠가 유치원에서 친구 누가 피아노를 아주 잘 친다며 부러움을 살짝 비친 적도 있었지!’ 싫다는 말을 인정할 수 없어 아이가 마음을 바꾸기를 바라고 그럴 가능성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러나 여러 달 지나도록 아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피아노, 싫어! 바이올린, 싫어! 나는 더이상 아루에게 피아노, 바이올린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 보니 아루가 “싫어.”를 입에 달고 산 지 꽤 오래되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학교 들어간 이후 몇 달 동안 매사에 싫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방 정리하자, 숙제해야지, 샤워해! 하는 소리에 ‘싫어!’는 당연
(설거지하는데 어디선가 전화벨이 울려서) “내 전화기 좀 갖다 줄래?” “냉동실에서 얼음 좀 꺼내줘.” 꼭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부탁할 때에도 한마디로 거절하고
때로는
“저녁에 스파게티 해 먹을까?” “놀이터 갈래?” 제가 좋아하는 것에도 무조건 싫다고 했다가 후회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싫어!”라는 대답은 불쾌했고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매몰차게 싫다고 끊어버리는 아이를 보면 약이 올랐다. 그리고 아이가 꼭 들어주었으면 하는 이야기를 할 때는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애가 또 싫다고 하면 어쩌나, 눈치를 보게 되었다. 거절당할까 두려워 조심조심 말을 고르다 보면 여덟 살 꼬맹이에게 쩔쩔매는 내 신세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동안 아이를 존중한다는 생각에 너무 많은 선택권을 주었던 것은 아닌가? 매사에 아이의 의견을 묻고 선택할 수 있도록 했던 양육 방식에 큰 회의가 들었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 1학년, 이렇게 내 의견을 따르지 않는데 나중에 더 커서 중학생이라도 되면?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과 시댁에 내려갔을 때였다. 아버님께서 아루에게 책을 주시며 읽어 보라 권하는데 역시나 아루가 싫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버님은 어떻게 하시나 보았더니
“아루야, 부모님이나 선생님, 동무, 할머니, 할아버지가 권하는 건 받아보고 의견을 말하는 게 좋아.” 라고 타이르셨다.

그동안 아이의 싫다는 말에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기분 나쁘고 화나는 내 감정을 처리하는데 급급하여 아이에게 어떻게 말해주어야 하는가를 고민하지 못했다. ‘칫, 누구 좋으라고 하는 말인데. 싫다고? 나중에 후회하지 마.’ 토라지고 볼멘소리를 하고, 마치 친구나 애인으로부터 싫다는 말을 듣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사람처럼 굴었던 것이다. 아이들에게 권위적이지 않은 부모가 되려던 것이 분별을 잃고 아이랑 똑같이 맞선 것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좌린은, 아루가 나를 무시하기로 작정한 것 같다며 분개하는 내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상대방의 말을 거스르지 못하고 무조건 네, 알겠습니다! 하는 것은 군대에서나 있는 일이 아닐까? 무조건 따르기보다 싫다고 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적어도 자기 의견이 있다는 거니까. 그리고 내 보기에는 아루가 싫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엄마 말을 무시하는 것 같지는 않아.”

 

좌린의 말을 곱씹어보니 매사에 싫다고 말하는 아이의 진심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왜 싫은지 물으면 “그냥 싫으니까.”라고 답하던 아이가 한 번은 “일단 싫다고 해놓고 생각 좀 해보는 거야.”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학교 숙제로 동네의 가게를 조사하러 나갔을 때 채소 가게 앞에서 못 들어가고 머뭇거리고 있길래 내가 물어볼 말을 몇 개 불러주며 등을 떠밀었더니 아루가 정색을 하며 “그건 엄마 생각이지 내가 생각해낸 게 아니잖아.”라고 말했다.

‘싫어!’라는 외침이 아이의 ‘독립 선언’이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아루의 마음속에 자기 뜻대로 해보려는 의지, 자의식의 나무가 크게 자라고 있음을 그제야 볼 수 있었다.
부모의 생각에 저항하고, 싫다고 선을 긋는 것이 제 생각을 펼쳐보겠다는 반사적인 행동임을 이해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청개구리 같은 아이의 행동이 나를 골탕먹이려는 ‘의도’를 가진 것처럼 여긴 내가 참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좌린이 말한 대로 아루가 실은 내 말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피아노, 바이올린은 거부했지만 아루가 스스로 청하여 방과 후 수업으로 오카리나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오카리나를 배우겠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그리 반가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집에 있는 피아노, 바이올린 놔두고 오카리나라니, 오카리나가 성에 차지 않았던 나는 아이가 열심히 연습을 할 때에도 그냥 무심히 지켜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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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토요일 아침, 늦잠을 즐기느라 이불 속에서 뭉그적거리다가 아루의 오카리나 연주를 들었다. ‘당신은 선샤인, 나만의 햇살, 힘들고 지친 날 감싸줘요~’ 영화 주제곡으로 인기를 끌었던 ‘you're my sunshine'은 나른한 주말 아침에 무척 잘 어울렸고 좌린이 옆에서 피아노 반주를 해주니 정말 듣기 좋았다.
오오, 멋진걸! 그제야 오카리나라는 악기를, 그리고 아루의 노력을 다시 보게 되었다.

오카리나에 재미를 느낀 아루는 가는 곳마다 오카리나를 들고 다녔다. 할머니 집, 친구 집에 놀러 갈 때, 친척들과 여행을 갈 때, 우리 옥상에 손님이 놀러 왔을 때에도 오카리나를 가져와 시키지도 않는데 스스로 연주를 했다. 더듬더듬 악보를 보며 계이름을 익히고 노래를 듣다가 그 소리를 오카리나로 따라 해보기도 했다.
아루는 내 말을 무시한 게 아니라, 내가 바라던 대로 일상에서 음악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고집한 것이 아루에게 그럴듯한 기술을 가르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나? 떠올려보면 어린 시절 바이엘, 체르니, 필수 코스를 이수하는 피아노 교육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음이 틀릴 때마다 플라스틱 자로 툭툭 맞아가며 고되게 연습하는 게 얼마나 싫었던가. 일 년 넘게 배우고도 지금도 틈틈이 계속 치면서도 내 실력이 하찮다고 느끼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피아노나 바이올린은 원하는 곡을 연주하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아이도 느꼈을지 모른다. 다루기 쉽고 편한 악기를 스스로 찾아낸 아루가 대견했다. 그리고 그런 아루를 보며 나도 모차르트와 쇼팽에는 근접하지 못했지만, 지금의 내 실력 안에서 충분히 즐겨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리하여 수개월의 지난한 과정을 통해,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나는 ‘매사에 싫다고 말하는 아이의 진심’을 이해하게 되었고 ‘매사에 싫다고 말하는 아이에 대처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비로소 아루와 나 사이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아이의 마음에 거의 다가갔다고, 이제는 완벽하게 잘 대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아이들은 어느새 그 단계를 벗어나 다른 단계를 통과하고 있다.

 

아루야, 해람이 좀 도와줘.
응, 알겠어.
아루야, 밤 늦었어. 그만 이 닦고 자.
응, 알겠어.
아루는 이제 더 이상 싫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지 않는다. 대신에 일단 ‘응, 알겠어.’라고 정말 예쁘게 대답한다. 그러나 문제는 대답만 할 뿐 실제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것.

천연덕스럽게 알겠다고, 곧 하겠다는 대답으로 엄마를 안심시키고 제멋대로 하는 아이,
휴~ 나는 이제 능청스런 아이에 대처하는 법을 연구해야 하는 건가?

 

머리아픈 고민에 위안을 주는 말이 있다.
“단지 단계를 겪고 있을 뿐이야.”
...
왜 사서 걱정을 하며 괴로워하는가? A.S.닐이 말했듯이 “아이는 본성적으로 이기적이고 늘 자기의 힘을 시험해볼 길을 모색한다.” 아이들은 이기적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곧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성장한다.

<즐거운 양육혁명, 톰 호지킨슨> 중에서.

 

 

그래, 이 또한 하나의 성장 단계이며 곧 지나가리라. 그러고나면 그 과정에서 성큼 자라난 아이의 모습을 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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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진향
사진으로 만난 남편과 408일간 세계일주를 했다. 서로에게 올인해 인생을 두 배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둘이 넷이 되었고, 현재를 천천히 음미하며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 돈 벌기 보다는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아루(아름다운 하루), 해람(해맑은 사람)과 함께 자연과 사람을 만나며 분주한 세상 속을 느릿느릿 걷는다. 2012년 겨울, 49일동안 네 식구 말레이시아를 여행하고 왔다. 도시텃밭에서 농사를 짓고, 사진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소중한 경험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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