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의료 수가가 높은 곳으로 유명한 나라다. 그래서 보험이 없으면 병원 갈 생각을 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월 납입 보험료도 워낙 비싸서 보험 가입조차 쉽지 않다. 유학생 가족의 경우 학생 본인은 학교 연계 보험에 의무 가입해야 하고 배우자 및 가족은 선택 가입하게 되어 있는데, 보험에 가입하면 1인당 매달 300달러(한화 30만원 상당)를 보험료로 내야 한다. 남편이 인문계(사회학) 박사과정생이자 조교/강사로서 장학금(월급)조로 받는 돈은 월 1400달러(143만원). 결혼 전에 둘 다 학생이자 학원강사였던지라 모아둔 돈 따위 없는 우리는 저 월급 1400달러로 집 월세, 전기세, 통신비, 식비를 모두 해결해야 하는 처지. 그래서 나는 학생 배우자 보험에 가입해 있기가 어려웠다. 미국 의료비 사정을 아는 지인들은 내 임신 소식을 듣고 걱정했지만, 어찌저찌 알아보니 방법이 다 있더라. 가난한 학생 처지인 우리가 외국에서 성공적(!)으로 출산할 수 있었던 이유 몇 가지를 얘기해보고자 한다. 


1. 보건소 산부인과에서 출산 전 준비 끝


보험 미가입자/저소득층 임산부의 경우 보건소 산부인과를 다니면 출산 전에 필요한 모든 검사를 최저비용으로 받을 수 있다. 내가 사는 지역의 경우 보험 없이 일반 병원 산부인과를 다니면 1회 검진에 약 170달러(17만 4천원)이 드는데, 보건소에 등록해 최저비용을 내게 되면 1회 검진에 25달러(2만 5천원)가 든다. 임신 36주까지 보건소에서 모든 검사를 마치고 나면 37주 부터는 보건소에서 지정한 근처 종합병원을 다니면서 막달 검사를 받고 그 병원에서 분만을 하게 된다.  


( 미국에서는 보건소를 이용하더라도 보험 가입/저소득층 여부에 따라 진료비가 차등 책정되는 반면, 한국은 국민 건강보험이 비교적 잘 되어 있고 출산율 문제가 있어서인지 소득과 무관하게 모든 임산부에게 무료 검사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람직한 일이다.)


2. 저소득층을 위한 일회성 특수 보험 가입+병원 자체 재정지원 시스템으로 분만 비용 커버


임신부 등록을 하러 보건소에 가니 담당자가 내게 '응급 메디케이드' 신청서를 같이 내밀었다. 응급 메디케이드란 저소득층에게 '응급' 의료 상황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지원해주는 1년짜리 단기/특수 보험인데, 저소득층 임산부가 응급 메디케이드에 가입되어 있으면 분만 과정에 드는 모든 비용이 커버된다. '출산'을 '응급상황'으로 분류한 것. 아마 '출산'과 '양육'이란 것이 경제적 취약 계층에게는 여러모로 특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 있는 것 같다. 병원에서 분만하면 자연분만의 경우 9.600달러(984만원), 제왕절개의 경우 15,800달러(1,620만원, 모두 2008년 기준)가 든다고 하니 이유를 알 만하다. 


내 경우는 케이티가 진통 중에 역아가 된 데다 다리 문제가 있어서 예정에 없던 제왕절개를 해야했다. 이런 경우에는 응급 메디케이드를 갖고 있어도 어떤 건 보험 처리가 되고 어떤 건 안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전체 30,000달러(3천 76만원!!!) 중에서 대부분은 응급 메디케이드로 처리되고 최종적으로 5,600달러가 청구됐는데, 이 금액은 결국 병원 자체 재정지원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해결했다. (비싼 의료비+ 미국 특유의 기부/자선 문화로 인해 미국의 대형 대학병원/종합병원은 환자의 소득 수준에 따라 병원비를 감면해 주는 자체 재정지원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3. 지역 종교단체에서 지원하는 산모교육 시설에서 무료 산모교육 이수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산모교육 센터가 있어 한달에 두 번씩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종교단체와 연계된 곳이어서 비종교인인 우리로서는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종교적인 내용을 강요하기는 커녕 언급조차 안하는 분위기여서 마음 편히 다닐 수 있었다. 교육을 진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이었는데, 모유 수유 교육은 연세 지긋한 할머니 봉사자가, 신생아 육아 교육은 비교적 최근에 육아 경험이 있는 젊은 봉사자가 맡았다. (우리가 후반부에 만난 한 젊은 봉사자는 이제 갓 스무살이 된, 그러나 이미 두 돌을 지난 아들을 둔 '학생 엄마'였다.) 그리고 임산부가 알아야 할 건강 및 실제 분만 관련 교육은 근처 종합병원 소속 간호사가 맡고 있었다. 대개 DVD를 함께 시청하고 관련 내용을 묻고 답하거나 토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거라 교육 내용은 그다지 거창하지 않았지만 윗 세대의 경험, 동세대의 최근 경험을 함께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 무료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참가자에게 매번 쿠폰을 주는데, 이 쿠폰으로 아기 옷, 요, 쿠션, 신생아용 장난감 같은 소소한 육아용품을 살 수 있는 것도 좋은 점이었다. 남편/남자친구/동거인을 대동하면 쿠폰을 두 배로 받을 수 있어서 남편과 산책삼아 다녀오곤 했다.  


케이티를 품어 낳기까지 이렇게나 많은 도움을 받았다니. 이렇게 돌이켜보며 글을 써보니 새삼 더 깨닫게 된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데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 했던가. 내 뱃속 내 자식이지만 참 많은 사람들이 함께 뱃속 아이를 키워주었다. 태어난 후에는 말할 것도 없고. 가진 것 없는 외국인 유학생 신분의 우리가, 그것도 희소질환을 갖고 태어난 아이를 이만큼이나마 키워내고 있는 것은 모두 이런 여러 기관/제도/자원봉사자들 덕분이다. 


이쯤 해서 질문 하나 던지고 싶다. 

한국에 유학 온, 일하러 온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임신/출산/육아를 하는 경우엔 어떤 지원이 이뤄지고 있을까? 한국에선 '건강보험 가입자'면 누구나 보건소를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외국인 유학생/노동자들은 어떻게 해야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으며, 그 과정은 쉬운가, 어려운가? 최근 외국인들의 건강보험 '편법'이용이 늘고 있다는 기사(http://www.kyeongin.com/?mod=news&act=articleView&idxno=840454)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런 편법 이용이 과연 이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나빠서' 생기는 것일까, 아니면 이 사람들이 건강보험에 접근하기 어려운 뭔가가 있는 것일까. 기사에서는 현재 병원에서 건강보험증으로 신원을 조회하면 얼굴 확인이 안 되기 때문에 외국인들이 이걸 악용하는 거라고 하는데, 그럼 신원 조회를 철저히 하고 누구나 쉽게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게 하면 되는 것 아닐까? 보험 미가입자라서, 휴일에도 쉬기 어려운 공장 노동자라서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는 외국인들을 위해 병원 하나, 의사 수십 명이 '자원봉사'로 그들을 돕기도 한다는 기사도 읽은 적이 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615464.html) 보험 없는 외국인이 90만명이 넘는다는데, 이들을 어떻게 '자원봉사'만으로 도울 수 있을까? 외국에서 '외국인 유학생' 신분으로 아픈 아이를낳아 기르고 있는 입장에서, 한국에도 존재할 수많은 '외국인 엄마 아빠'와 '아픈 외국인 아이'들의 처지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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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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