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야미역.jpg

 

토요일 오전 아홉시 넘어 혼자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온수에 있는 한 공동육아 어린이집이다. 한겨레 교육부 

김청연 기자와 함께 '아이와 책'이란 주제로 강의를 부탁받았던 것이다.

주말이라 온 가족이 함께 있는 날이어서 맘만 먹으면 온 가족이 같이

갈 수 도 있었다. 실제로 주말에 강의가 있을때는 늘 그렇게 해 왔다.

그러나 이번엔 나 혼자 나왔다. 작년 겨울에 젖을 떼면서 막내 이룸이도

나와 잘 떨어지는데다가 이제 강의에 아이들을 달고 다니는 일은

그만하고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 남편이 아이들을 챙길테니 혼자

다녀오라고 응원도 해 주었다.

 

일찍 일어나 아이들 아침거리를 장만해 놓고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서는데

마음이 어찌나 흥분되고 설레던지..

주최측에서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주말 오전에 강의를 부탁한것을 퍽이나

미안해 하는 눈치였지만 나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이런 기회는

정말이지 내겐 선물같은 여행과도 같기 때문이다.

 

대야미역 근처에 차를 대 놓고 날듯이 개찰구를 빠져나가 계단을 올랐다.

아아아.. 아이들없이 나 혼자 다니니 정말 옆구리에 날개가 돋은 것 같다.

이렇게 홀가분할 수 가 없다. 유모차 안 밀어도 되고, 엘레베이터나

에스컬레이서 찾느라 동동거릴 필요도 없고, 애들 걸음에 맞추어

내 보폭을 늦출 필요도 없이 내 리듬대로, 내 기분대로 맘 놓고

걸을 수 있는 자유란 얼마나 근사한 것인가.

전철이 붐벼도 자리가 없어도 상관없다. 챙겨온 시사잡지에 눈을 주면서

가끔씩 창밖을 보며 마음껏 생각에도 잠겨보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수다떠는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이면서 아무런 말 할 필요 없이 전철을

타고 갈 수 있는 것도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 아이 셋을 데리고 전철을

타면 쉼없는 요구에 귀 기울여야 하고, 대답해주어야 하고, 장난치려는

아이들 단속하며 지루하지 않게 온갖 재주를 다 동원해야 한다. 게다가

갑자기 막내가 오줌이라도 마렵다고 하면 머리속이 다 하애져서 아무

역이나 내려 화장실을 찾느라 정신없이 달려야 할 때도 있다.

그런것에 비하면 혼자 전철을 타는 일은 하루 종일이라해도 신나게

즐길 수 있겠다.

 

스므명 남짓 모여있는 부모들 앞에서 수다처럼 재미나게 이야기를 했다.

애들 달고와서 강의할때는 강의하면서도 애들 신경쓰여서 늘 초긴장이었다.

가끔은 강의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애들때문에 기겁을

하기도 했다. 그런 신경 쓸 일 없이 혼자 맘 놓고 얘기할 수 있다니

말 하기 좋아하는 나로서는 한 시간이 아니라 몇 시간이라도 즐겁게

떠들 수 있다. 일이 아니라 정말이지 내겐 휴식같은 시간이었다.

 

강의를 끝내고 김기자와 둘이서 밥을 먹고 태어나 처음으로 '캬라멜마끼아또'를

주문해 마시면서 (만화 '다이어터'의 주인공 '신수지'가 제일 좋아하는 이 메뉴를

나는 지금껏 한번도 먹어본 일이 없다.ㅠㅠ) 신나는 수다를 떨었다.

아이들 책 이야기부터 결혼전 연애와 결혼 후 부부생활, 세 아이를 키우면서 겪은

갖가지 일들, 그리고 요즘 고민하고 느끼는 일들까지 맘 통하고 말 통하는 두 여자의

수다는 때론 깔깔거리며 웃고, 때론 서로 눈물 글썽거리며 쉼 없이 이어졌다.

아이들이 계속 내게 전화를 걸어와 언제 오냐고 성화를 부리느 바람에

아쉽게 오후 2시 반쯤 헤어졌지만 반 나절을 혼자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 것 만으로도 나는 맛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은 사람처럼

행복하고 뿌듯했던 것이다.

 

대야미 역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이 부탁한 치킨 사러 뛰어 갔다가 집에 와보니

그때까지 아무도 점심을 먹은 사람이 없다. 생라면 세 개를 먹고 있었단다.

아이고머니...

점심을 안 먹이면 어떻하냐고 남편에게 한 마디 했더니 아무도 배고프다고

'하지 않았다며 남편은 내게 버럭 화를 냈다. 반 나절을 애들 챙기느라

애썼는데 오자마자 잔소리를 하는게 못 마땅했으리라. 흥.. 제대로 먹이지도

않았으면서 큰 소리는... 그래도 아무말 하지 않았다. 나는 부지런히 애들을

챙겨 먹이고 그때까지 고스란히 빨래바구니에 담겨 있던 빨래를 세탁기에

해 널고 집 정리를 했다. 반 나절 휴가 얻은 것 처럼 집을 나가 있더라도

돌아오면 내 몫의 일은 그대로지만 그래도 그 반나절은 꿀 같이 달콤했다.

 

생각해보니 결혼하고 애 키워온 11년간 단 하루도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본 적이

없다. 친구들과 카페에서 맘 놓고 수다를 떨어 본 일도 없고 혼자 영화 한 편 본 일이

없다. 늘 아이들과 함께였다. 어린 애가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막내가 아직 네살이지만 이젠 한달에 한 번쯤은 종일 나 만을 위해 보내고 싶다.

좋아하는 영화도 보고, 그냥 좋아하는 거리를 맘 놓고 쏘다니고, 느긋하게

찜질방에서 굴러도 보고, 아니 하루 종일 말 하지 않고 지내기만 해도 휴식이

될 것 같다. 그래, 그래.. 이젠 이 정도는 누리고 살아도 되는데...

 

남편이여..

이제 나에게도 안식일을 달라.

나 혼자 영화를 보고, 나 혼자 밥을 먹고, 나 혼자 울고 웃는 시간이 필요하단 말이다!!!!
응답하라, 응답하라, 응답하라!!!!!!   

아니지, 이건 남편에게 응답받을 일이 아니구나. 내가 선언하면 되는구나.

마누라는 이제부터 한 달에 하루씩 안식일을 쓰겠으니 그날은 당신이 애들을 책임져라.

생라면을 먹든, 생고기를 먹든, 생쌀을 먹든 알아서 하라.

그날 하루 나는 신나게 집을 나가겠노라. 으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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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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