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엄마.jpg

 

금요일 오후,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아빠와 함께 인천대공원에 나와 있다는 것이었다.

'벗꽃이 아직 별로 피지 않아서 볼 건 없더라' 하시는 엄마의 목소리는

시들했다.

'아빠는 내일 친구들하고 1박 2일 여행가셔'

그럼, 엄마는 또 아빠없는 집에서 주말을 보내야 겠네...

잠시 생각하다가 '엄마, 그럼 우리집에 오세요. ' 했다.

'최서방 있을꺼 아녀?'

'사위가 있으면 어때. 장모 앞이라고 불편해 하는 것도 아닌데.. '

'..... 그럼... 그럴까?'

 

엄마는 보통 평일에 우리집에 오신다. 텃밭도 살피시고 나물도 뜯고

내가 신경쓰지 못하고 있는 이런 저런 집안일도 거들어 주시고

아이들과 놀아 주신다. 나와 수다도 떨고 가끔은 같이 외출도 하는 것이 큰 낙이다.

주말에는 사위도 쉬어야 한다고 오시는 것을 삼가신다.

남편은 안 불편하다고 해도 엄마 입장에서는 사위가 신경 쓰이시는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가끔 아빠 혼자 여행을 가시거나 하면 나는 엄마를

우리집으로 오시게 한다. 남편 없는 집에서 제일 먼저 소홀해지는 것은

엄마 식사일테니 말이다.

 

토요일엔 비가 내렸다.

엄마는 비가 와서 망설이고 있다고 전화를 하셨길래

상관없으니 어서 오시라 말씀드렸다. 비가 오면 텃밭도 못 가고

그럼 내 일을 도와줄 게 별로 없으니 나서기가 미안하셨을 것이다.

그냥 계셨다 가셔도 되는데, 엄마는 우리집에 오시면 뭔가 일을 많이

해 주어야 맘이 편하신 모양이다. 이젠 안 그래도 될 연세인데...

비가 오면 어떠냐는 내 성화에 엄마는 11시쯤 우리집에 오셨다.

 

주말에 우리 가족은 느즈막히 일어나 아점을 먹는다.

빵으로 먹을 때도 있다.

그렇게 아점을 먹고 나면 점심은 오후 2시가 넘어야 차려 먹는다.

하지만 엄마는 아침을 일찍 드셨을 것이었다.

방금 전에 식구들 아침 상을 치웠지만 나는 다시 엄마의 점심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어제 밭에서 뜯은 부추로 담근 오이김치가 마침 맛이 들었다.

새발나물도 새로 무쳤다.

아침상에 올렸던 어묵국도 뜨끈하게 데웠다.

틀니를 하신데다 위가 약해 매운 음식을 못 먹는 엄마를 위해서 음식엔

고춧가루를 조금씩만 넣었다.

 

12시 반 쯤 점심상을 차려 드렸다.

엄마는 '나 혼자 먹니?' 멋적어 하셨지만 천천히 맛있게 드셨다.

아이들이 할머니 주위를 뛰어 다니며 말을 걸고 웃는 것을 흐믓해 하시면서

엄마는 상위에 차려 드린 음식들을 말끔히 비우셨다.

 

아직도 출가를 하지 못한 남동생과 아빠가 있는 집에서 엄마는 50평생이 넘게

주부로 세 끼 상을 차려 오셨다. 이제 엄마 나이도 칠순을 훌쩍 넘겼는데

고단하실 것이다. 가끔은 이렇게 누군가 정성껏 차려준 밥상이 그리울 것이다.

 

살림하는 여자들은 다 그렇다.

내가 힘들고 지칠때 누군가 차려주는 따듯한 밥상만큼 힘나게 하는 건 없다.

나를 위해 새로 나물을 무치고 국을 데우고 따끈한 밥을 차려 주는 일은

내 몸와 마음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주는 일이다.

엄마에겐 딸이 차려주는 밥상이 그럴 것이다.

 

삼십년이 넘게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귀한 줄 모르고 먹다가 시집을 왔다.

내가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고 보니 식구들 끼니 챙기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었다.

내가 아프고 귀찮고 한 끼 쯤은 거르고 싶을 때에도 아이들을 위해서 부엌에 들어서햐 할 때는

서글프기도 하면서 친정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엄마도 그 많은 세월 동안 힘든 때가 많았을텐데 자식에게 더운 밥 먹이려고

그토록 수고를 하셨구나.. 생각하며 뒤늣게 철이 들었다.

 

  할머니와 이룸이.jpg

 

점심을 맛나게 드신 엄마는 이룸이에게 책을 읽어 주신다.

할머니를 좋아하는 이룸이는 그 옆에 누워 조잘거리고 깔깔거린다.

남편은 슬그머니 안방으로 자러 들어갔다.

아이들이 자기가 아닌 외할머니에게 책을 들고 달려가는 것이 오히려 고마왔을 것이다.

 

할머니가 있는 어린 시절이란 얼마나 축복인가.

나 역시 외할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엄마보다도 더 많은 정을

할머니에게서 받았다. 부모님이 가까운 곳에 계셔서 이렇게 자주

내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고맙다.

엄마는 늘 내게 미안해 하시지만 뭐라도 도움이 되려고 애쓰시지만

사실은 그 존재만으로도 나와 아이들에게 늘 선물이 된다는 것을 모르신다.

 

엄마와는 다른 방식으로 엄마보다 더 느긋하게 더 관대하게 아이들을 대하신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조부모가 필요하다. 아이는 더 다양한 애정을 받을 수 있고

풍부한 경험에서 나오는 다양한 배움, 새로운 자극과 교감을 나눌 수 있다.

나이 드신 분들을 대하는 예절도 배우고, 나이들어 가는 것이 무엇인지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세상을 보는 다른 눈도 생겨난다.

 

조부모와 함께 살던 대가족 시절에는 모든 배움은 윗 어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공경과 예의에 기초해서 사람간의 관계와 세상 살이의 이치를 배울 수 있었다.

대가족이 해체되고 연령이 다양한 관계를 경험하기 어려운 요즘 아이들은

어른에 대한 에의도 공경도 배우기 어렵다.

오로지 자아만 기형적으로 커져서 타인의 감정과 관계에 서툴고 무지하다.

 

내 아이들의 어린 시절에 할머니가 있고 할아버지가 있는 것이 정말 고맙다.

마음으로부터 따듯한 사랑을 기울여 주시고, 더 넓은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해 주시니

내겐 정말 귀한 선물이다.

 

그러니 부디 딸네 집에 편하게 오셨으면 좋겠다.

엄마는 내게 언제나 손님이 아니라 가족이다.

엄마가 오시면 나 역시 어린 딸이 되어 내 엄마에게 기대고 의지한다.

아이들이 힘들게 한다고 일러바치기도 하고, 내 편 들어달라도 떼도 쓴다.

내 엄마니까 그럴 수 있다. 엄마가 아니면 누구에게 이런 어리광을 부리겠는가.

 

엄마는 오후에 총총히 돌아가셨다.

닭들이 갓 낳은 달걀 한 꾸러미 챙겨 드린 것을 소중히 품고 전철역으로 가셨다.

언제나 딸 네 집이 편하고 따듯한 엄마의 힐링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엄마가 내게 큰 사랑을 주셨듯이 이젠 딸과 사위와 손주들이 드리는 큰 사랑도

오래 오래 누리셨으면 좋겠다.

 

아아..

엄마가 있어서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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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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