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전에 살던 아파트 친구들에게서 문자가 왔다.
"영짱! (아주 친한 일본 엄마들은 서로를 00엄마라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부른다^^)
우리 리스 만들기 모임 만들었는데, 같이 하는 거 어때??"
시간 괜찮으면 꼭 와. 재료 준비는 00짱이, 장소 제공은 00짱이 하기로 했어.
5월 15일 목요일 10:30부터. 재료비 500엔 정도(한화로 5천원?)래.
각자 도시락 지참하는 거 잊지말구.(일본인들은 친구집에 갈 때 집주인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각자 도시락을 준비하거나 간단한 점심을 사 들고 가는게 보통이다.)
그럼 연락 기다릴께~^^"
5월은 일본 엄마들에게도 너무너무 바쁜 달이다.
문자를 보내온 엄마들도 다들 바쁠텐데 아마 그때밖에 모일 시간이 안나 어렵게 만든
자리일 것이다. 같은 동네이긴 하지만 1년 전에 이사나온 나에게까지 연락을 줘서
고맙기는 했지만, 좀 망설여졌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랬듯이 지난 한달간의 시간을 너무 힘들게 보낸데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이어진 연휴에 아이들 학교와 유치원 행사와 학부모 회의,
담임선생님과의 면담과 가정방문(일본 초등학교는 가정방문이 있다;;)까지
줄줄이 이어져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바쁘기도 하지만, 뭘 만들거나 하는 일은 사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데
뭘 굳이 시간까지 따로 내서 같이 만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자를 보내온 친구들은 요가도 같이 배우고 있어, 같이 하자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지만
운동 역시 나는 혼자 하는게 좋아서 번번히 거절해온 터였다.
이번에도 애써 연락을 해주었는데 거절하기가 좀 ... 더구나, 플라스틱 조화로 만든다는데
그런 리스가 별로 마음에 들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번 세월호 사고를 통해 우리 동네의 일상문화와 아이들을 둔 엄마들과의 관계에
대해 드는 생각이 많아서, 바쁘더라도 2시간 정도만 참여해 보자 싶었다.
아직 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이들을 찾지도 못한 지 한 달이 된 부모들도 있는데,
리스같은 거나 만들고 있어도 되나 ... 하는 생각이 가시질 않았지만
마침 올해 같은 반이 된 엄마들도 있어, 아이들 얘기도 좀 나누고
일본 엄마들이 동네 모임을 어떤 식으로 꾸리고 그 속에서
뭘 얻어가는지 관찰 또는 취재(?)도 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15일 목요일 오전 10시 반.
바쁜 가족행사가 많았던 얘기, 아이들 이야기, 늘 쫒기는 살림과 파트타임 일 이야기..
(일본은 전업주부라도 비는 시간을 이용해 일을 하는 엄마들이 많다)
수다를 떨면서, 리스 만들기를 취미로 오래 해 온 엄마의 간단한 강습과 함께
만들기가 시작되었다. 자연 재료들이 덜해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경험자 엄마의 시범을
보고 나니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다른 엄마들은 스마트폰으로 다양한 디자인의 리스를
검색해 샘플이 될 만한 사진을 골라놓고, 따라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리스, 일단 사진으로 구경해 보시길^^
봄을 이미지로 만든 리스.
이건 여백이 많은 시원한 여름용 리스.
도토리나 솔방울을 이용한 가을과 겨울에 장식하면 좋을 듯한 리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바쁜 때에 시간낭비는 아닐까..'하는 마음이 가시지않았던
나는 너무 만족스러웠다. 시중에 파는 리스들이 최소한 3만원 이상은 할 뿐더러 정말
괜찮다 싶은 건 정말 돈주고 사기 뭐 할 정도로 비싸다. 그런데 이렇게 단돈 5천원 정도로
소박하지만 귀여운 리스를 만들 수 있다니.
아무런 댓가없이 장소를 제공해주고, 무거운 재료를 들고 와 강습으로 재능기부(?)까지
해 준 친구들이 너무 고마웠다. 그런데 더 행복한 일은 또 지금부터..^^
리스 만들기에 집중하느라 잔뜩 배가 고파진 엄마들이
각자 준비해온 도시락을 꺼내놓자, 장소를 제공해준 집주인 엄마가 차와 샐러드를 준비했다며
내왔다. 한국어로는 '생햄'이라 하나? 이것과 아보카도가 듬뿍 든 샐러드,
참가한 엄마들이 가져온 간식들, 디저트로 유명한 가게의 푸딩까지!
각종 행사로 지친 5월의 엄마들이 완전한 힐링을 맛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커피를 마시면서, 각자가 만든 리스를 보며
똑같은 재료로 다같이 만들었는데도 어쩜 이리 만드는 방식이나 분위기가 다를까 하며
감탄했다. 되도록 많은 재료를 빈틈없이 붙이려는 엄마, 되도록 재료를 덜어내고 여백을
만들고 싶어하는 엄마, 사진과 똑같이 만들려고 노력하는 엄마...
서로 다른 개성들을 리스를 통해 시각화해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그동안 막연히 짐작했던 서로의 성격과 스타일을 좀 더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고 할까.
완성된 리스를 자전거에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동네 모임과 공동체는 이렇게 서로 다른 스타일과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의 개성을 억누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서로 존중하며 만들어 가면 좋겠다..
서로 달라서 이렇게 더 재밌는 거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지 클루니는 없었지만^^, 그래도 오래 기억에 남을듯한 '어느 멋진 날'의 이야기.
이날 만든 다양한 리스들 중에서 제가 만든 게 저 사진들 속에 있는데
과연 어떤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