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이맘때 주택으로 이사를 오면서, 꼭 해 보고 싶은 몇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우리집에 있는 수많은 책들을 동네 주민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었다.
일본은 도서관 문화가 그런대로 잘 정착된 편이긴 하지만,
집과 좀 더 가까이 있었으면.. 좀 더 가정적인 분위기의 도서관이라면..
하는 아쉬움이 아이들을 키우는 내내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이사온 동네는 단독주택이 80여 가구나 밀집된 곳이라
유아들과 초등학생들이 많은 편인데, 아이들이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책이 있는 작고 소박한 공간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늘 했더랬다.
집에서 20분 정도 거리에 시립도서관이 있고 그 공간 나름의 좋은 점이 있긴 하지만
관공서와는 또 다른 소박함과 따뜻함이 있는 작은 도서관을, 아이가 있는 부모 세대들이
조금만 힘을 모으면 충분히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집집마다 아이들 책이 넘쳐나는데 그걸 좀 더 나누고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동안 미리 생각해둔 몇 가지 방법으로,
1. 지역 도서관이나 주민센터에 기증한다.
2. 가정도서관을 열기 - 한달에 1,2번 일정한 시간에 우리집 거실을 마을도서관으로
동네 아이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공개한다.
3. 집 현관앞에 책이 있는 작은 공간을 마련해 주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한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가장 간단한 방법은 1번이다.
기증이란 방법을 택하면 책을 관리하는 등의 여러 수고도 덜고
이런저런 예상치 못한 일들을 겪을 걱정도 없으니 말이다.
2번의 방법을 생각하게 된 이유는,
아주 예전, 일본에서 도서관 문화가 활발해지기 전에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가정도서관을 만들어 마을의 아이들이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랑방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 일본의 대도시에선 이런 일은 거의 드물고, 있다 해도 자신의 집을 타인에게
공개하길 꺼릴 뿐더러 남의 사적인 공간에 아이를 데리고 책을 보러
가는 일이 그리 자연스럽지 않은 현실이다.
마지막 3번은 집밖에서 책을 어디에 보관해야 할지 조금 막막했다.
맑은 날이면 작은 바구니에 넣어두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비가 오면 곤란하기도 하고 쉽게 분실될 가능성이 높다.
좀 더 자연스럽게 동네 사람들과 책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궁리하던 중에
알게 된 것이 바로 Little free library 운동이었다.
북미를 중심으로 몇 년전부터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이 운동은,
자신이 사는 집 앞에 작고 귀여운 우편함을 만들어 그곳에 이미 다 읽고 난 책을 넣어두고
동네 주민들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제공한다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한다.
베이비트리 회원이시며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계신 pororo0308님도 가까운 동네에서
이런 도서관을 보신 적이 있다며 소식을 전해주셨다.
홈페이지를 찾아가보면 좀 더 이 도서관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http://littlefreelibrary.org/

큰 공간을 차지하지않으면서도, 비에 젖을 염려도 없고 아이들도 책을 꺼내기 쉬울 뿐더러
이렇게 이쁘고 깜찍한 디자인이라니!
이런 곳에 책을 넣어두면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꺼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
동네와 거리를 낭만적이고 아름답게 하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우리집 앞에도 이런 책 우편함을 만든다면 그 곁에 작은 의자나 벤치를 놓고 싶다.
어린 아이들이 작은 벤치에 모여앉아 책을 보며 조잘대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귀엽다.
책은 집, 도서관, 학교 등 실내에서만 보는 것에 익숙한 아이들이
햇빛과 바람이 살랑대는 바깥에서 읽을 수 있다는 건, 꽤 괜찮은 독서환경이 되지 않을까.

우리 동네 80가구 집집마다 이런 우편함을 세우고, 거기에 책을 10권씩만 넣어둔다면
아이들은 걸어서 불과 5분 거리에 800권의 책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이게 정말 현실이 된다면, 좀 더 개성있고 예쁜 우편함을 만들기 위해 집집마다 은근히
경쟁을 할 것도 같은데, 뭐 이런 걸로 경쟁을 하는 사회라면 아이들의 미래도 밝지 않을까?
우편함 속의 책을 기웃거리는 지나가는 사람이 우연히 집주인과 마주치게 된다면,
이미 그 책들을 읽은 주인이 책에 대한 소개나 아이들과 읽으면서 겪은 이런저런 추억을
들려준다면 또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일까.

일본은 주변에서 아주 흔하다고 할 순 없지만,
전국 각지에 유명한 어린이서점들이 아직 존재하고 있다.
이쁜 외관에 단행본을 중심으로 한 어린이책, 전문성을 갖춘 운영자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는데, 이런 공간을 만날 때마다
동네 서점은 물론 대형 서점들마저 하나둘 문을 닫은 한국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우리에게, 우리 아이들에게 정말 서점은 더 이상 없어도 되는 존재일까.

도서관은 도서관대로,
동네 서점은 서점대로,
주민들 스스로가 만든 우편함 도서관은
또 그 나름대로 각각의 역할을 한다면, 우리 아이들의 독서 환경이 좀 더 풍성해지지 않을까.

90년대가 막 끝날 즈음으로 기억하는데 <유브 갓 메일>이란 영화가 있었다.
어머니 때부터 대를 이어 운영해온 마을의 어린이서점의 주인은, 책을 파는 일뿐 아니라
동네 아이들에게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즐겨 읽어온 책을 읽어주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책이 있는 근사한 공간을 다양하게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좋지만,
그와 더불어 책에 대한 이야기와 책에 대한 추억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의 역할도
중요하지 않을까.
주변 눈치를 보느라 우리 동네에서, 책과 연관된 어떤 시도도 아직 해보진 못했지만
우리집 아이들이 더 이상 쓰지않는 작은 장난감 자동차들을
동네의 어린 아이들이 타고 놀 수 있도록 집 앞에 놓아두고 있다.
언젠가는 그 옆에 그림책 몇 권을 넣은 작은 우편함 도서관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동네 엄마들 모임 때, 그런 이야기를 하니
분실의 위험이나 책이 파손될 걱정이 오고가긴 했지만 다들 반가워하는 의견이 많았다.
여름에는 차가 잘 다니지 않는 동네 골목에 돗자리를 펴서 집에 있는 책들을 각자
가져와서 나눠보자는 얘기도 나오고, 할로윈 때는 과자를 바구니에 담아 집 앞 현관 앞에
두어 아이들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과자를 얻어갈 수 있는 이벤트도 해 보자 한다.
모임이 있었던 날, 나는 그 자리에서 얘길 꺼내진 않았지만
무더운 여름밤, 동네 골목에 모두들 모여 누구네 집 벽에 영화를 쏘아서 보면 좋겠다 ..
하는 상상을 나는 가끔 한다. 아이들과 시원한 수박을 쪼개어 먹으며
영화 시작하는 시간은 7시도 8시도 아닌, "어두워 질 때부터"
너무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가?
하지만, 이제 우리도 그렇게 좀 살아도 되지 않을까.
우리 일상 속에서 이런 낭만적인 기획들을 좀 더 많이 만드는 것이
아이들의 창의력 향상을 위해서도 그리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집앞 우체함을 도서관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처음 낸 사람도 시작은 이렇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