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사귀가 바람에 하늘거리는 창밖을 내다보며
깔끔하게 차려진 식탁 위에 갖가지 색으로 골고루 차려진 음식들을 천천히 맛보고 난 뒤,
따뜻한 커피와 신선한 과일, 달콤한 후식 몇 가지를 여유있게 맛보며
아! 너무 잘 먹었다! 는 말로 식사를 행복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것.

어린 아이가 있는 엄마아빠들에게 이건 가장 간절한 일상의 소망 아닐까?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힘든 것 두 가지를 꼽으라면, 첫째가 밤에 푹 못 잘 때.
둘째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만큼,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
이 차지할 듯 싶은데..
그래도 밤에 자는 문제는 빠르면 돌 전후, 보통은 두 돌 전후, 늦어도 세 돌 전후면
대부분 해결된다. 하지만, 엄마아빠가 제대로, 시간과 상황에 쫒기지 않고 느긋하게
밥을 먹을 수 있으려면 그것보다 꽤 오랜 세월이 걸린다.
이런 세월을 꼬박 11년째 겪고 있어서 그런지,
나는 제대로 천천히 밥을 먹고 싶어하는 욕망이 꽤 강한 편이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보다 더 어린 아이를 둔 친구에게는 
한번쯤 그런 밥상을 차려주고 싶은 욕망 역시 강한 편이다.
함께 먹는 걸 통해 힘들었던 지난 시간들을 보상받으며
어떤 평화로움(?)같은 걸 나누고 확인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DSCN2714.JPG


작년 말, 몸이 좀 안 좋은 바람에 이번 겨울은 만남을 자제하며 비교적 조용히 지냈다.

그러다 꽤 오랫만에 가족 손님이 우리집에 나들이를 하셨는데,

바로  2014 베이비트리 도쿄팀 신년회!  주말에 가족 모임으로 만나기로 했지만

마침 우리 시댁 행사가 같은 날에 겹쳐, 남편과 둘째 아이는 시동생네로 고고씽.

나와 큰아이만 집에 남아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다 함께 만나지 못해 좀 섭섭하긴 했지만

내심 나는 속으로 즐거웠다. 이래저래 편식이 심하고 먹다 흘리고 쏟고 하는 일이 많은 둘째가

없다 생각하니,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손이 날아갈 것 같이 가벼웠다.

이미 손님맞이 준비에 익숙한 큰아이는 장난감 칠판에 나와 함께 메뉴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DSCN2715.JPG

냉동해둔 우동 면을 꺼내 미리 준비해둔 국물에 투척하고

역시 냉동해둔 피자 반죽에 소스, 소시지, 햇양파, 시금치와 치즈를 듬뿍 뿌려 오븐에 굽고

샐러드용 야채를 씻어두니, 준비 끝!!  냉장고를 열어 어제 준비해둔 케잌들을 확인하고는

아! 이제 저것들을, 천천히 수다를 떨면서 먹는 일만 남았구나! 생각하니 이렇게 즐거울수가!

마침, 남편에게서 온 문자.

- 잘 도착해서 맛있는 점심중. 둘째도 신나게 잘 먹고 있음. 손님들께 안부 전해줘! -

를 확인하고 나니, 좀 정신없기는 해도 그냥 다같이 만났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다시 들었지만, 따뜻한 봄이 오면 그때 또 같이 모여 놀지 뭐.

아마 두 남편은 한국인을 아내로 둔 같은 처지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거다.
그러는 사이, 현관 벨이 울리고 lotus님네 가족 도착.
네모난 이쁜 상자 선물을 주셨는데, 그 속에는 남편분께서 직접 만드신 초콜릿이!!

DSCN2719.JPG

이날 처음 만난 남편분과 통성명, 대략적인 집구경에 이어, 간단한 점심을 식탁에 둘러앉아 먹는데
우리 가족이 그랬듯이, 둘째가 이제 막 돌을 넘긴 lotus님네는
엄마아빠가 번갈아가며 "어...!"나,  "오...!" 같은 감탄사와 함께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 아기가 벌이는 각종 사건사고(?)를 수습하기에 바빴다.
다 차려진 음식조차도 그 음식들의 온기가 가시기 전에 먹을 수 있다는 건
아기를 둔 엄마아빠에겐 아직 사치인걸까.
나는 둘째가 더 어렸던 예전 생각에 웃음이 나기도 하고, 물, 우유, 쥬스를 비롯한
간장과 같은, 뒷수습에 상당한 곤란을 겪는 액체들을 쏟아 어쩔 줄 몰라했던 기억들이
떠올라 연민이 느껴졌다.
첫아이로 딸을 키운 뒤, 둘째로 아들을 낳은 부모들이 이런 상황들에 더 어려움을 겪는 건,
첫째로 이미 아들을 키워본 부모에게 생긴 면역이 우리에겐 없기 때문이리라.
딸이 "예측가능한" 이라면, 아들은 "예측불허"랄까.
이 말은, 밥이 차려진 식탁 위에서 가장 정확하게 적용되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우리집도 많이 안정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6살 둘째와 함께 하는 밥상에는
어른들의 잔소리와 꾸중, 아이의 짜증과 울음이 자주 밑반찬처럼 오르곤 하니..
DSCN2718.JPG

딸들은 오늘 서로 처음 만났지만, 이렇게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게 잘 놀아줬다.
어느 정도 분위기에 익숙해진 아가도 슬슬 여러가지 놀이를 즐기기 시작했는데..
때는 이때다!  비워진 그릇들을 얼른 퇴장시키고, 커피&후식 타임~
lotus님 남편 분께서 설거지를 도와주시는 덕분에 두 엄마는 간만에 왕수다로 힐링..
짬짬이 아이들을 돌보면서 커피를 리필해 주시는 센스까지^^
요즘 젊은 아빠들은 다 이런가요?? 아마 주인인 나보다 부엌에서 머문 시간이 더 길었을 듯.
나중에 전화로 들은 이야기로는 "손님처럼 있고싶지 않아서" 그러셨단다.

함께 한 시간이 4시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많은 걸 느끼고 나눈 하루였다.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게 가장 좋았고,
폭풍육아중인 엄마아빠에게 간단하게나마 집에서 차린 음식을 대접할 수 있어 다행스러웠다.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무수히 찾아갔던 선배 부모들 집에서 따뜻하게 대접받았던 고마운
기억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다.
아이키우기에 지친 우리 부부에게, 무슨 말하고 싶은지 다 안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작은 식탁을 가득 채우고 음식이 든 그릇들을 우리 앞으로 밀어주던 엄마아빠들..
아마 그때 얻어먹었던 집밥들은, 우리에게 탄수화물 그 이상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참 힘든 시간을 보내다가 그렇게 한끼 얻어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면,
정서적인 포만감이 며칠동안 이어져 일상을 사는데 더 힘이 나곤 했으니까.

시댁 모임에 간 남편과 아들이 돌아온 뒤, 저녁을 하려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한 구석에 마지막 디저트로 내려고 준비해둔 <곶감 요구르트>가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베이비트리 신년회에서 보내주신 곶감이 달고 쫀득해서 요구르트에 얹어먹으면 맛있겠다
싶어 준비했는데.. 결국엔 늘 하나는 이렇게 까먹고야 만다.
아직 냉동실에 많으니, 다음을 또 기대하는 수밖에.

군대에서 먹은 음식들을 남자들이 자주 떠올리는 것처럼, 육아가 가장 치열할 때
먹은 음식들이 아이들이 크고 난 뒤에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법이다.
우리 부부가 육아 선배들이 차려주던 그때의 집밥을 자주 추억하는 것처럼,
우리집을 다녀가는 후배 엄마아빠에게도 따뜻한 시간으로 기억될 수 있다면 좋겠다.
겨울동안 쌓인 눈도 녹고 따뜻한 봄이 오면, 더 맛난 음식들을 만들어 함께 먹고 싶다.
아니, 정말은 탄수화물 그 이상의 것을 나누고 싶은 마음일테다.

DSCN2720.JPG



** 엘리사벳 님이 lotus님께 따로 챙겨보내신 책은 잊지않고 잘 전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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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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