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큰아이 또래 아이를 둔 엄마들 모임에 나갔다가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4학년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고 있는 큰아이의 여자 친구들 중에

벌써 생리를 시작한 아이들이 몇몇 있다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빠르면 4학년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 어리게만 느껴지고 이제 겨우 열 살을 막 넘긴 아이들이

어른들도 가끔은 불편하고 힘든 생리를 매달 꼬박꼬박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안스러운 마음부터 들었다.


아직 한참 뛰어놀 나이인데 학교 생활할 때 불편하진 않을까..

학교에서 갑자기 초경이 시작되면 얼마나 놀라고 당황스러울까..

단체 활동이나 체육 시간엔 또 어떡하나..


한번 시작하면 3, 40년은 매달 겪어야 할텐데

가능하다면 1년이라도 아니 반년이라도 좀 더 자라 몸과 마음이 더 여문 다음에

시작하면 좋을텐데.. 하는, 걱정인지 바람인지 모를 생각이 앞섰다.

"우리 아이도 키가 큰 편인데 빨리 시작하면 어떡하지?

 6학년 쯤 시작하면 딱 좋을텐데.. 5학년도 아직 어린앤데.. 잘 할 수 있을까??"


내가 이런 말을 하자마자,

이제 막 초경을 시작한 아이를 둔 엄마들과 중학생 언니까지 있는 엄마들의 생생한 증언(?)이

엄청 쏟아지기 시작했다. 역시 딸을 둔 엄마들답게 그들의 경험담과 조언은

섬세하기 그지없었는데, 그날 들은 내용을 종합/정리해 보면


- 키보다는 몸무게가 어느 정도 나갈 때 시작한다. 40kg가 넘으면서 대부분 시작하는 듯.

- 초경이 시작되기 전에 아이가 엄청 예민/신경질적으로 변한다. 엄마와 싸움 요주의.

- 아직 어리니까 양이 적겠지 생각하면 오산이다. 위생용품을 사이즈별로 다양하게 준비할 것.

- 위생용품 뿐 아니라 생리용 속옷, 방수요 등도 미리 준비해야 한다.

- 학교 가방에 위생용품과 여벌 속옷을 넣은 작은 주머니를 챙겨넣어 주어라.

- 아이의 초경이 시작되면서 엄마와 함께 사용하게 되니, 위생용품 구입비가 배로 늘게 된다.

- 단 것을 엄청 좋아하고 식욕도 는다. 한참 성장할 시기니 잘 먹여야 한다.

- 너무 늦게 시작하는 것도 별로 좋지 않다. 리듬이 불규칙할 경우가 많은데 한달 내내 하는

  때도 있어 아이가 너무 힘들어했다. 속옷에 이불 빨래까지 늘어나 엄마도 같이 고생했다.


딸의 초경을 미리 겪은 선배 엄마들의 말을, 입을 다물 새도 없이

하..! 하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그저 듣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는데

이건 뭐, 신생아 용품 준비하기 전이랑 비슷하네?!


딸의 초경에 대해 아직까지 관념적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엄마들의 이야기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어서 놀라울 따름이었다.

나도 다 겪어온 일들인데 뭐 새로울 거 있겠나, 싶었는데 내가 겪은 것과

나의 아이가 겪을 일을 준비하고 대처하는 건 또 좀 다른 일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내 마음 한 편에서는 아직, 어린 딸아이를

일상의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생리의 세계(?)로 보내고 싶지 않은 지도 모른다.

1,2년 만이라도 그냥 철부지처럼 행동의 제약을 받지않고 마음껏 뛰놀며

어린이로 있어주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이랄까..

아이가 얼른 자라 어른이 되어 부모로서의 나의 짐을 덜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조금이라도 더 어린양을 부리며 작은 아이로 내 곁에 남아주었으면, 하는 욕심이

내 내면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다.


실은 훨씬 전부터 혹시라도 모르니, 아이의 가방 안에 만약을 대비해 작은 주머니를

준비해 넣어줘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는 있었다. 담임도 마침 여자 선생님이라

아이가 학교에서 시작하게 되면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면담 때마다 잊지않고 해 두었더랬다.

그런 마음의 준비 정도로 엄마인 내 역할을 다했다 싶었는데

그날 엄마들과의 모임이 있고난 뒤엔 좀 더 실제적인 준비를 서두르게 되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서둘러 재봉틀을 꺼내, 쓰다 남은 조각 천들이 담긴 상자를 뒤졌다.

'분홍색이 젤 이쁠라나?'

'고운 레이스가 놀란 마음을 좀 위로해주지 않을까?'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생리대를 이쁜 포장지로 싸서 다녔던 일을 떠올리며

고르고 고른 천조각을 이어붙여 재봉틀로 박아 작은 주머니를 만들었다.


DSCN2328.JPG

여기에 깨끗한 새 속옷과 생리대를 넣은 다음, 딸아이를 불러 이런저런 설명을 했다.
"엄마가 전에도 몇 번 얘기한 적 있지? 네 친구들 중에도 몇 명 시작했다더라.
 언제가 될 진 모르지만, 학교에서 갑자기 시작할 수도 있으니까 가방에 잘 넣어둬."
"응, 엄마. 우리반 여자애들 중에도 이렇게 해서 가방안에 넣어다니는 애들 많아요."

아! 그렇구나. 벌써 너희들 그럴 때가 됐구나!
딸이랑 달마다 생리를 함께 치르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그 날'만 가까워오면 초콜릿이 먹고싶고 그런데 우리 딸도 그럴까?
'그 날'마다 둘이 같이 머리맞대고 앉아 달콤한 거 나눠먹는 거 상상하니 재밌을 거 같기도 하고..
아니야! 이럴 때가 아니지. 방수요랑 생리용 속옷도 미리미리 준비해두라고 그랬는데
그거나 얼른 사러가야 겠다. 방수요는 둘째가 아기 때 쓰던 거 아직 있는데 그걸로도 괜찮을까??
그날 만난 엄마들에게 문자로 물어볼까??

아휴, 마음이 왜 이리 안절부절 허둥지둥 .. 하는거지?
친정엄마께 이런 내 마음을 전화로 얘기하니 하시는 말씀,
"자식 일이 원래 다 그래.
 자기 일보다 더 어렵고 긴장되고 그런 거야."

그래.. 자식 일이라서 그렇구나..!
아이가 새로운 세계에 들어서는 순간을 지켜보는 부모 마음이 이런 건가 보다.
긴장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지만,
나의 첫 아이에게 그런 때가 찾아오는 날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며
그녀의 새로운 시작 앞에 무지개빛 색종이 가루를 뿌려주고 마음껏 축하해 줘야겠다.
우리 딸에게도 '그 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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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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