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가 좋아하는 세계는 어떤 것일까.
어떤 것에 즐거움을 느끼고, 어떤 것을 잘 할 수 있을까.
첫아이가 태어난 이후 몇 년간은 이런 것들이 늘 궁금했다.
유아기에 아이가 보이는 어떤 대상에 대한 관심이나 재능은 사실, 일시적일 가능성이 많은데
한때 잠깐 그러고 지나갈 수도 있고, 커서까지 쭉 이어지는 경우도 있고 아이마다 다를 것이다.
우리 부부는 아이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 그때그때 아이가 가장 하고 싶어하는 것을 직접
즐기면서 해보게 하는 게 아이의 적성을 찾아가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큰아이는 12살, 초등5학년이고 아이에게 꼭 맞는 자기의 길을 찾기에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지난 12년 동안 아이가 좋아하고 즐겨왔던 것들을 이번 여름방학동안 찬찬히 돌아보니
아이의 적성이란 큰그림을 맞추기 위한 퍼즐 몇 조각을 발견하게 된 것 같아
그 이야길 한번 정리해 보았다.
큰아이는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이 아주 분명한 아이였다.
부모인 우리가 의식적으로 해 준 건, 책 읽어주기와 바깥놀이, 함께 요리를 하는 것 정도였고
그 외에 항상 아이는 자기가 하고싶은 것을 스스로 강하게 표현하는 편이었다.
돌이 조금 지나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만2살 정도까지는 아침 6시부터 일어나 현관으로 직행해
신발을 만지작거리곤 했는데, 그건 밖에 나가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냥 길을 걷든, 놀이터에서 놀든 그냥 밖에서 지내는 것 자체를 너무너무 행복해했다.
이제 막 말을 시작한 아기가 집 현관문을 열자마자 용수철이 튀듯 뛰쳐나가며
"아~시원해." 그래서 깜짝 놀라곤 했던 기억이 난다.
비가 오는 날은 자기 키보다 큰 우산을 들고, 아파트 계단이라도 오르락내리락해야 성에 찰 만큼
밖을 좋아했다. 겨우 15개월이 좀 넘은 아기 때부터.
밖에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는 그냥 집안으로 들어가기를 싫어해
15층 꼭대기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갔다가, 8층이었던 우리집으로 다시 걸어내려오는 의식(?)을
거쳐야만 겨우 만족해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엄마인 나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시절이었다.

그렇게 만2,3살 쯤이 되고나선 그림책의 세계에 푹 빠지게 되었다.
바깥 놀이도 여전히 좋아했지만, 집에 있을 때는 늘 책과 함께 놀면서 지냈다.
남편과 내가 그림책을 무척 좋아하기도 했고, 어른인 우리가 아이와 놀 때 가장 즐거운 일이
그림책을 읽어주는 일이었던 게 아이에게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양적으로 많은 책을 보여주기 보다는,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을 반복해서 자주 읽어주는 방법이었다.
아이가 좋아한 수많은 그림책 중에 <구리와 구라의 빵 만들기>는 정말 1000번은 읽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많이 본 책인데, 아이도 나도 나중에는 내용을 다 외워서 노래하듯 읽었던 기억이 난다.
바깥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고, 좋은 그림책을 많이 본 영향인지
이 시절 아이의 언어표현과 상상력은 가끔씩 놀라울 정도였다. 모든 아이들이 이 시기엔 다 그렇지만,
머그잔의 손잡이 부분을 보며 "귀처럼 생겼다"고 그러거나,
"손가락에 눈이 달려있으면 개미집 속도 볼 수 있을텐데"
"매미는 저렇게 많이 우는데도 왜 눈물을 안 흘리지?? 아! 나무가 다 마셔버려서 그런걸까?"
"아기는 엄마 뱃속에서 헤엄친다던데, 수영복은 입고 있을까?" 등등... ...
세상이 너무 신기하고 재밌어서 자는 시간도 아까운 듯,
아이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잠들 때까지 왕성한 호기심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그림책에 이어 아이가 좋아한 세계는 바로 요리!
<구리와 구라>처럼 음식이 나오는 책을 읽고 나면, 부엌에서 빵을 만드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마침 내가 제과제빵을 배우고 있던 때이기도 했고, 생협에서 빵과 케잌을 만드는 육아모임에
참여하던 때라 아이도 자연스럽게 요리를 즐기게 되었다.
특별히 요리에 관심이나 소질이 없는 아이라 해도 만2-6세 시기의 아이들에게
부엌은 굉장히 매력적인 공간이다.
사진에서처럼, 딸아이가 밀가루나 달걀을 익숙하게 다루는 일은 그 시절의 일상이었는데
맙소사! 날짜를 보니 아직 만3살도 채 되지 않았던 때 ..
첫아이라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싶다.
아이가 자라는 유아기 내내, <구리와 구라>에 나오는 카스테라를 아마 100번 이상은
같이 만들어 먹었던 것 같다. 요리도 늘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보다, 같은 것을 여러번, 자주
반복하곤 했다. 이 시기 아이들은 새로운 것도 좋아하지만,
익숙한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즐거움을 얻고, 그렇게 반복되는 놀이와 일상 속에서
안정감과 생활의 리듬을 익혀가기 때문이다.
아이가 음식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시도를 한 건,
엄마인 나의 의식적인 노력이기도 했다. 요리하는 것만 좋아했지 입맛이 까다롭고
소식을 하는 아이라, 조금이라도 먹는 것에 흥미를 가졌으면 하는 바램에서였다.
사진은 아이가 유아기부터 초등 저학년 때까지 취미로 모은 다양한 음식 모양의 지우개다.
아기 때부터 다니는 단골 치과에선 3개월마다 한번씩 있는 정기검진에 꼬박꼬박 오는
아이들에게 이 지우개 선물을 주곤 했는데,
이걸 얻는 재미로 지금도 치과를 아주 즐겁게 다니고 있다.
아주 작은 음식 모형 장난감에 불과하지만, 각각의 음식이 가진 매력과 상상력을 즐기며
딸아이는 한가할 때마다 이걸 꺼내 부엌놀이를 하고 놀았다.
만5세-7,8세 무렵, 딸에게 장래희망을 물으면, 항상 "파티쉐"라고 얘기하곤 했다.
그땐 <내 이름은 김삼순>이란 드라마가 한참 인기였는데 나도 정말 다시 새로운 직업을
갖는다면 빵이나 케잌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을 정도로 우리 모녀에겐 그 드라마 영향도 참 컸다.
요리에 대한 관심과 꿈이 너무 강렬해 남편과 나는 정말 이 아이가 요리를 하는 사람이 될거라는
근거없는 확신이 들 정도였는데, 그 꿈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학교에 들어간 뒤, 과학 교과에서 식물과 곤충에 대해 배우기 시작하면서
아이는 갑자기 동식물에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그 시절 우리가 살던 아파트 베란다에는
각종 식물 화분과 장수풍뎅이나 작은 거북이를 키우는 곤충 상자들로 북적거렸는데
곤충과 거북이, 물고기 하나하나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불러가며 엄청난 애정을 쏟아부었다.
둘째 아이도 그런 누나를 따라 틈만 나면 베란다에서
화분에 물을 주거나 장수풍뎅이들을 꺼내 구경하고
곤충을 관찰하며 그림을 그리거나 화분에 열린 방울 토마토를 따먹거나 하며 놀았다.
학교 담임선생님을 통해서도 딸아이가 식물키우기나 관찰, 곤충이나 물고기 등의
생물에 관심이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는데, 친구들도 동물이나 과학에 관심이
많은 아이들과 부쩍 친해져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친구 집에 놀러가거나
집에서도 물고기를 키우고 싶다고 졸라 어항을 사러다니는 일이 자주 있었다.
동물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시튼 동물기>시리즈를 돌려가며 읽기도 하고,
동물이 나오는 애니메이션 특히, <라이언킹>시리즈를 지겹지도 않나..싶을만큼 자주 보고
아빠랑 함께 <라이언킹> 뮤지컬을 보러 가기도 했다.
<라이언킹>을 시작으로 애니메이션의 매력에 푹 빠져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빠짐없이, 대사까지 다 외울 정도로 보고 또 보고..
4학년 때부턴 애니메이션 주제곡을 듣는 취미까지 하나 더해 졌다.
요즘 아이 방에는 온갖 동물 인형과 동물 사진이 여기저기 붙어있고
틈만 나면 할아버지께 생일 선물로 받은 <동물 스케치>책을 보며 동물 그림을 따라그리느라
몇 시간을 방에서 나오질 않는다.
이번 여름방학동안 뭔가 동물과 직접 교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마침 우리가 사는 시에서 운영하는 동물원의 <조랑말 교실>에 참가신청을 했다.
매주 일요일마다 총5번에 걸쳐 말의 생태에 대해서도 배우고, 말 갈기를 빗겨주거나
먹이도 주고 승마까지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교실이 무료로 진행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동물을 좋아하는 청소년들이 자원봉사로 참여해
동물원 사육사들의 보조역할을 도와주고 참가한 아이들의 언니, 오빠 역할을 해 준 덕분이었다.
동물에 대한 순수한 관심과 열정을 가진 언니오빠들이라
참가한 동생들에겐 큰 자극이 되고 듣고 배우는 것 또한 참 많았다.
일본 초등학교는 방학과제로 스스로 주제를 정해 탐구하는 <자유 연구>라는 게 있는데,
아이는 동물원에서 말과 함께 보낸 경험과 거기서 얻은 지식을 토대로
<나와 말이 함께 보낸 5일간>이란 제목으로 자료집을 만들어서 제출했다.
위에 있는 사진은 그 책자의 한 부분인데, 말이 달리는 속도에 따라 타고 있을 때의 다른 느낌을
그림으로 자세하게 표현한 게 인상적이다.
맨 마지막장에는 이 다음에 크면 말 한 마리를 직접 키워보고 싶다는 꿈이 쓰여 있었다.
이름까지 벌써 지어놓고, 이런 그림과 함께^^
0-12살까지 딸아이는
바깥놀이-그림책-요리-동물-그림그리기-애니메이션-음악이라는 세계 속에서
스스로 많은 걸 보고 느끼고 배우며 행복해했다.
이 모든 게 서로 다른 것 같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이는 좋아하는 대상이 바뀌어도
늘 공통된 반응을 보여왔던 것 같다. 그건 바로 아이가,
"잘 놀란다"는 사실이었다.
학교에 다녀와서 현관문을 열자마자 아이는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자주 엄마!! 엄마!! 하고 다급하게 외치곤 했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화들짝 놀라
뛰어가보면, 한다는 말들이 대부분 이런 거였다.
"엄마, 옥수수 수염이랑 옥수수 알갱이 수가 같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코알라의 이유식이 뭔지 아세요?? 세상에! 엄마 코알라 똥이 바로 이유식이라네요! 신기하죠?"
뭐 이런식 -
새롭게 알게된 하나의 세계와 지금까지 몰랐던 비밀을 하나씩 알아가는 기쁨,
이것이 있다면, 그 대상이 무엇이 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부모로서 아이에게 꼭 하나 바란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어떤 공부를 하느냐, 어떤 직업을 갖느냐 이전에
좋아하는 무언가를 보고 진심으로 놀라워할 수 있는 마음.
아직은 12살.
서둘러 적성을 찾으려 애쓰는 건 아니다.
다만, 이런 과정과 연습을 통해 아이 스스로도 부모인 우리도,
이 아이가 어떤 내면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을 할 때 가장 자기다울 수 있고 행복한지,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싶었을 뿐이다.
얼마전에 방송에서 가수 주현미가 자식교육의 성공비법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육아 전문 지식도 없지만, 아이들이 엄마를 필요로 할 시기에
같이 자고 책 읽어주고 계절이 바뀌면 풀밭에서 곤충도 잡고 뛰어놀고..
그렇게 보냈어요."
자식교육은 결국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아이와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충분하고, 실패도 좌절도 겪어 봐야 한다.
힘들 때도 많았고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지난 12년은 병 속에 담아 마개를 막고 영원히 멈추게 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그런 시간과 추억의 힘으로 이제 막 시작된 사춘기의 도입부를
잘 이겨낼 수 있길 바라며..
언제나 첫사랑처럼 아련한
첫아이의 12살 여름이, 그렇게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