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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를 낳기 전에 제과제빵 과정을 배운 것 외에
지금까지 요리를 제대로 배워본 적은 없다.
하지만 '요리'라는 세계가 늘 궁금해, 틈만 나면 요리 프로그램을 찾아 보거나
유명한 요리사들의 책이나 인터뷰를 즐겨 읽곤 했다.
그렇게 10여년이 지난 지금,
'요리'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란 질문에 대해, 나 나름대로 답을 찾게 되었다.
정리정돈과 상상력.

정리정돈 잘하기는 많은 요리사들이 약속이라도 한듯, 대부분 강조하는 이야기인데
위생적으로 잘 정돈된 공간일수록, 계획적으로 생각하면서 요리를 잘 할 수 있다는
뜻인 것 같다. 

주부 14년차로 부엌살림을 해보니, 그들의 말에 정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래서 작년에 이사온 지금 집의 부엌만큼은 정리정돈을 잘 하리라!  굳게 다짐했었다.

위에 있는 사진은 이사온 직후에 찍은 건데, 당시 나의 다짐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런데...

1년이 지나고, 더구나 이번 여름방학, 두 아이와 40일간이나 지지고 볶으며

집에서 밥을 해먹고 나니, 부엌은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아이들이 하루에도 열두번 아니, 수십번 드나들며 어지럽히질 않나,

뭘 해먹느라 그랬는지 벽에는 기름 얼룩이 여기저기,

식기장에서 쏟아져 나온 여러 그릇들은 갈길을 잃고 부엌 곳곳에 쌓여 있다. 

무더위 탓이었는지(우리집은 부엌이 특히 덥다)  대충 해먹고 설거지만 끝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부엌을 탈출했던 탓에 정리할 물건들이 그새 점점 쌓이고만 있었던 모양..


이제 겨우 기나긴 여름방학이 끝나가는 요즘

우리집 부엌 꼴을 깊은 한숨을 쉬며 바라보고 있노라면,

예전에 내가 좋아했던 요리사들이 왜 정리정돈을 그렇게 강조했는지 정말 잘 알 것 같다.

이렇게 한번 무너지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가 너무너무 힘들기 때문...

비좁고 정리안 된 물건들에 이리저리 치이며 스트레스를 받다보니, 음식하기가 괴롭기만 하다.

그들이 경계한 건, 요리를 즐길 수 없거나 계획적으로 일할 수 없는 바로 이런 상황이었으리라.

뭐, 완벽하게 정리할 필요는 없지만, 잘 정리된 공간은 우리를 즐겁게 하고

일의 능률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없던 의욕도 가끔은 샘솟게 하는 게 사실이다.

그런 공간 속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잘 해내고 나면 자신감이 생겨,

다음 일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이건 요리뿐 아니라 육아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잘 정돈된 공간에서는 아이도 양육자도 쾌적하게 시공간을 즐길 수 있고

아이의 수면, 식사준비, 배변, 놀이 등도 착착착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육아예능프로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보면 그런 생각이 더 자주 든다.

촬영을 위한 준비와 설정 때문에 그렇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아! 저렇게 넓고 깔끔하게 정리된 집이라면 나도 셋은 한꺼번에 키우겠다!.. 뭐 그런 생각을^^

대부분의 가정은 일상의 짐과 얼룩이 쌓이고 쌓인 틈에서 겨우겨우 하루를 보내기 마련이니까..


청소와 정리정돈이 이만큼 힘들고, 다이어트만큼이나 요요현상이 심한 일이기는 하지만

자기 나름의 요령을 잘 터득해서 실천에 옮길수만 있다면, 삶이 많이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많이 인용해서 읽는 분들이 지겨우실 것 같아 걱정스러우면서도, 또 인용할 수 밖에 없는

고미숙의 <나의 운명사용설명서>에는 이런 말이 있다.


현대인들은 청소를 할 줄 모른다.

화려하고 멋진 집과 건물을 갈망하면서 정작 그런 공간을 소유하고 나면 쓰레기통처럼 취급한다.

사방에 짐을 늘어놓고 그 위에 또 새로운 상품들을 쌓아 둔다.

일 년 동안 한번도 만지지도 쓰지도 않는 물건들이 사방 곳곳에 방치되어 있다.

... ...

요컨대, 약속과 청소, 이 두 가지만 잘 지켜도 인생역전은 어느 정도 가능하다.

아니, 이 두 가지를 지키지 않고 좋은 삶을 살기란 불가능하다.

... ...

자기 팔자가 팍팍하다고 느낀다면, 이유없이 몸이 아프고 마음이 괴롭다면,

다른 건 일단 제쳐 두고 먼저 점검해 보라.

약속을 지키고 청소를 잘 하고 있는지를. 산다는 건 별 거 아니다. 시공간이 곧 나다.

시공간과 내가 조응하는 만큼이 곧 나의 일상이다.

고로, 일상의 구원은 약속과 청소로부터 온다!


결국 청소와 정리정돈이란,

사람이 가진 에너지를 쓸데없이 뻬앗기는 일을 되도록 줄이고

꼭 해야 할 일에 에너지를 집중함으로써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을 키우기 위한

바탕이 아닐까 싶다.

지금 내가 하는 요리가 뭔가 마음에 안든다면,

지금 내가 하는 육아가 뭔가 잘 안 풀린다면,

먼저 그것이 이루어지는 시공간을 정리정돈하는 일에 시간과 마음을 투자해 보는 건 어떨까?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처럼, 어딜가나 팍팍한 요즘 우리 사회도

약속과 청소와 정리정돈을 제때에 잘 하지 못해 그런 건 아닌지

찬찬히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동선과 관계에 찌꺼기가 쌓이면 그것이 불신과 분노, 폭력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지금이야말로 개인과 가정, 사회 모두 청소와 정리정돈을 통해

각자 자기 자리를 정갈히 하고 중심을 잡아야 할 때가 아닐까.

쓸고 닦고 정돈하고 ......


욕심내지 않고 조금씩 천천히,

방학동안 어지럽혀진 부엌을 하나씩 정돈해 봐야겠다.

그래서 올해는 유난히도 빨리 찾아오는 추석을, 조금 더 정갈하게 맞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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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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