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이의 초등 입학을 며칠 앞둔 어느날 밤.

한국 친정에서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부지 쓰러지셨다."


친정아버지는 십수년 전, 위암 수술을 받으신 뒤 늘 몸이 좋지 않으셨다.

내가 결혼해서 일본으로 와 사는 동안에도 입퇴원을 자주 반복하셨지만

2년 전만해도 이사한 우리집에 친정 식구들과 함께 다녀 가셨을 정도로

일상 생활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겨울을 지나면서 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 지신 듯 했다.

한국에서 오는 가족들과 친척들의 연락에는 항상 우리 아버지 건강에 대한

염려가 빠지지 않았다.


외국에 살면서 가장 괴롭고 힘들 때가 바로 이런 때다.

부모형제가 인생의 위기의 순간을 겪게 될 때, 얼른 함께 하지 못한다는 것..

위급하단 연락을 받자마자 남편은 가장 빠른 도쿄-부산행 비행기표를 알아보고,

나는 두 아이를 시댁 어른들께 맡기고 정신없이 짐을 쌌다.

며칠 후면 초등 입학을 하는 둘째의 학교 준비를 밤새도록 미리 해 두면서

앞으로 닥칠 걱정과 불안으로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아버지는 괜찮으실까........'

'혹 아이 입학 전에 일본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나......'

부산행 비행기가 하늘을 오르는 직전까지

남편에게는 '엄마 없이 치르는 입학식날 메뉴얼'에 대해 장문의 문자를 여러통 보냈다.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만난 아버지는 말도 못하게 야위어 계셨다.

앉아있는 것도 힘들어 하시는 아버지를 우리 3형제가 휠체어로 끌고 부축하며

어디가 문제인지 찾기위한 검사를 힘들게 마쳤다.

결과는 노인성 폐렴.

젊은 사람에겐 심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노인에겐 사망에도 이를 수 있을만큼 위험하단다.

기침이나 다른 증상이 특별히 없어 그동안 가족들도 잘 알아채지 못했던 모양이다.

당분간 입원해서 치료할 것. 절대안정. 입원중 24시간 가족의 간병이 필요.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삶의 고통은

그래도 한결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는 걸 이번에 깨달았다.

나의 정해진 일정동안 정확한 병명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부산에 머무는 며칠동안 오빠와 남동생, 나 우리 3형제는 한마음이 되어

모두 급하게 휴가를 내고 8시간씩 교대로 아버지 곁을 지켰다.

형제가 둘 보다는 셋이라는게, 이렇게 고맙고 좋은 거구나.. 새삼 절감했다.

하루종일 누워계신 아버지도 '내가 셋이나 낳았으니 이런 호강을 하는구나..'

아프신 와중에도 희미하게 웃으셨다.


병원에 함께 있는 동안 아버지 곁에서 식사를 도와드리고, 친정엄마가 싸 주신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삶은 감자와 율무차를 챙겨드리면서

간간히 옛날 이야기들을 나누는데

문득 '아 참 행복하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한 순간 함께 하는 소중함과 함께, 급격하게 노쇠해버린 아버지의 육체를

가까이서 지켜보는 일이 괴롭기도 했다.

그래도, 그 순간 아버지와 나는 함께였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이번에 큰일을 치르게 되진 않을까, 모두들 조마조마했지만

내가 머무는 며칠만에 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몸이 좋아지셨다.

늘 멀리 각자 떨어져 사는 3형제를 이번에 모두 만나게 된게 기쁘신지

어느때보다 행복해하셨다.

며칠 전 아버지는 마지막 검사를 마치셨고,

이번주에 퇴원을 하신다. 다행스럽고.. 고맙고..

잠시라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게 무엇보다 좋았다.


노쇠한 부모와 한창 자라나는 아이를

동시에 돌봐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

빼곡한 일상의 틈을 빠져나와 그것도 국경을 넘어 부모를 만나러 가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갑작스레 비행기표를 알아보다보니, 도쿄로 바로 돌아오는

표가 없어 부산-제주-도쿄, 제주를 경유해서 올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계신 병원에서 점심 때 쯤에 공항으로 떠났는데

일본 우리집에 도착하고 나니, 밤 12시가 넘어 있었다.


병원에서 친정 아버지를 돌봐드리고 있을때,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울면서 전화를 하던 둘째..

의젓하게 동생을 돌보며 엄마를 기다린 첫째..

나리타 공항에서 무사히 다시 만났을 때의 그 고마움이란.

가족이란 이런 거구나..


세월호 가족들 마음도 이랬을 것이다.

바다에 빠졌다 해도 많이 다쳤다 해도, 얼른 구조해

아픈 곳은 고쳐주고 돌볼 곳은 돌봐주고 먹고싶은 것 잘 먹여

하루하루 생명을 되찾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싶었을 것이다.

마지막이 어떻게 되든, 가족이 함께 그런 순간들을 나눌 수 있는

기회조자 갖지 못하도록 제때 해야 일을 해내지 못한 1년 전 일이 다시 생생히 떠오른다.


세월호 가족들의 마음을 생각하니

가족이 맞은 위기의 순간을 곁에서 함께 하고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참 행복했구나 싶다.

부디 모두에게 쉽게 잊혀지지 말기를.

4월은 그들의 마음과 멀리서라도 함께 있고 싶다.


DSCN4607.JPG
부산 친정집 근처에 핀 벗꽃.
아버지 걱정으로 올해 벗꽃은 내내 슬프게만 보였다.
세월호 가족들에게도 1년 전의 봄꽃은 그렇게 보이지 않았을까..

DSCN4648.JPG

부산에서 돌아온 다음날 있었던 둘째 아이의 초등 입학식날.

이제 막 새 삶을 시작하는 8살 아이들과 벗꽃이 아름다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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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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