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 근교에 살면서 좋은 것 중의 하나는

1시간 정도면 도시 중심부에도 나들이 갈 수 있고,

반대로 도시 외곽으로도 1시간 정도만 차로 달리면
시골과 같은 자연 속으로 언제든 찾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아주 가까운 곳은 40분, 조금 멀어도 1시간 남짓한 거리에

딸기밭, 포도밭 같은 농장은 물론 농산물 직거래장이나 논밭에 이를 수 있다.


아이들의 2학기가 시작되고 나면,

운동회니 바자회니 많은 가을 행사들로 또 바빠질 것 같아

여름방학 마지막날에 배와 포도도 사러갈겸 해서 과수원으로 가족나들이를 했다.

밭에서 바로 따서 금방 먹는 과일 맛이 기가 막힐 만큼 좋기도 하고

수확 전에 땅에 떨어지거나 크기가 너무 작아 상품이 되지 않는 과일들을

덤으로 얻기도 해서, 어쩔땐 마트에서 사먹는 것보다 훨씬 싸게도 살 수 있다.

농사를 짓는 곳이다 보니, 과일 외에도 여러가지 채소나

시골 가정에서 만든 반찬들도 다양하게 구경할 수 있어

나는 요즘 점점 도쿄 근교의 농촌 매니아가 되어가고 있다.


DSCN5422.JPG

그동안 아이들을 키우면서 딸기밭, 복숭아밭, 사과밭에는 자주 가봤는데

배 농사를 짓는 곳을 가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두 손 안에 하나 가득 잡힐만큼 큼직하게 열린 배들을 보니 감탄사와 군침이 절로 났다.


배나무는 사과나무보다 잎이 훨씬 크고,

갈색에 녹두색이 살짝 섞인 몸에 하얀 점들이 무수히 많은 과일이었다.

과일 상자에 들어있거나 마트에 진열되어 있는 모습보다 이렇게 나무에 달린 배를 보니

초록 잎들과 어우러져 훨씬 '배다워' 보였다.

뭘 먹고 이리도 크게 여물었나..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을만큼 너무 큰 배 밭에 들어서니

여기저기 주렁주렁 매달린 배의 비주얼에 압도되어 아이들도 한동안 조용했다.


주인 아주머니의 설명을 들으며 우리가 먹을 배를 다 따고 나서 계산을 하는데,

둘째인 아들이 카메라를 자꾸 달라고 그런다.

밖에선 떨어뜨리거나 할까봐 아이에게 주지 않는데, 꼭 찍고 싶은게 있었던 모양인지

자꾸 조르길래 '그럼, 여기 꼭 잡고 조심해서 찍어봐.' 하고 아들에게 잠깐 맡겼더랬다.

배값을 치르는데 주인 아주머니께서 밭에서 기른 거라며, 오이와 가지를 듬뿍 챙겨주셨다.

내가 그렇게 아주머니와 수다를 떠느라 정신없는 동안, 아들은 원하던 사진을 찍었는지

나에게 카메라를 돌려주었다.


배, 포도, 땅에 떨어진 거라 공짜로 얻은 작고 귀여운 배들이 담긴 꾸러미에

갖가지 채소를 가득 싣고는 기분이 좋아진 우리 부부는

이참에 조금만 더 달려서 벼가 한참 익어가는 논을 보러가자며 또 다시 차를 달렸다.

남편이 운전하는 동안, 아까 아들이 카메라로 뭘 찍었나 궁금해서 확인해 보는데

수십장의 배밭 사진들 속에 출처를 알 수 없는 사진들이 몇 장 있었다.


DSCN5434.JPG

7살 아들이 찍은 사진은 바로 이것이었는데
아무리 금방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봐도 이런 그림이 있었던 곳이 없었는데..
이상하다.. 싶었다. 아들이 내가 계산을 하는 동안 다른 델 다녀왔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만큼.
조금 전에 찍은 사진들을 다시 차례로 천천히 돌려보면서 그제서야 아하...! 싶었는데,
이 비행기 그림의 출처는 바로..


DSCN5435.JPG

여기였다.^^
배 판매대 아래에 둘러쳐져 있던 장난감 그림이 그려진 천 무늬를 찍었던 모양이다.
아니, 나는 바로 저 판매대 앞에서 아주머니랑 수다를 떠느라 한참을 있었는데
왜 저 무늬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아들에게 "이 사진은 왜 찍은거야?" 하고 물었더니,
"그냥"  이란 싱거운 대답이 돌아왔다.

어쩐지 한 곳에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도, 아이와 어른인 나는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온 듯한 .. 그런 느낌이 드는 순간이었다.

DSCN5476.JPG

하긴, 아이와 어른이 한시한곳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것을 보고 느끼는 게 어디 이번 뿐일까.
배밭 다음으로 간 논에서도, 남편과 나는 야무지게 여물어가는 벼 이삭에 온통 눈이 갔지만
아이들은 벼가 자라는 아래, 물 속에 사는 온갖 생물들을 구경하느라 벼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크고 멈춰 있는 것보다, 아이들은 어딘가에 숨어있는 것들, 작고 살아움직이는 것들에
더 쉽게 매혹되는 것 같다.

남편과 나만 갔다면, 논두렁에 쪼그리고 앉아 1시간이 넘도록
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진 않았을텐데^^
아이들 덕분에 어른이 보지 못하는 것들,
크고 중심이 되는 것에만 집중하는 데 익숙한 어른스러움(?)을 벗어나
늘 다른 것들을 보게 되는 것 같다.
배밭에서도 논에서도, 7살 아이에겐 배와 벼가 주인공이 아니라
비행기 그림과 소금쟁이, 물달팽이, 개구리들이 주인공이었나 보다.
어른과는 다른 아이의 시선은 일상적으로 늘 겪으면서도 신기하고, 또 신선해서 재밌다.

그런데 이 날의 화룡점정은 바로 이것!
배밭에서도 논에서도 꽤 즐거워했던 두 아이가
더 큰 함성을 지르며 달려갔던 곳은 바로 ..

DSCN5468.JPG

아이스크림 가게..;;^^
주변 밭에서 나는 과일과 채소로 만든 독특한 아이스크림 가게였다.
키위맛, 토마토맛, 단호박맛, 녹차맛, 블루베리맛, 사과맛 ...
평소엔 글자 읽는 속도가 느리기만 하더니,
다양한 아이스크림 종류를 빛의 속도로 읊어대는 아들..;;

역시나..  그랬다.
이날 아이들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배밭도 논도 아니었던 것이다.
원하는 아이스크림 하나를 얻어내고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으로
가게 벤치에 앉아 먹던 바로 그 순간이었던 것이다.
어찌된 것이 나와 남편에겐 저 멀리 콩만하게 보였던 아이스크림 가게가
아이들에겐 어쩜 그리도 잘 보였던 것일까.

DSCN5479.JPG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날 찍은 사진을 다시 돌려 보았다.
논에서 찍은 사진 중에 내 마음을 사로잡은 사진 한장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결혼한 지 얼마 되지않아 보이는 신혼부부가 개와 함께 자전거를 끌며
천천히 논 주변을 산책하는 장면이었다.
이 사진을 멀리서 줌까지 바짝 당겨서 찍은 내 마음 속엔,

'아, 둘만 저리 있으니 얼마나 편할까. 부러워라.'
'신혼 때부터 시골에서 저렇게 여유있는 슬로라이프라니, 좋겠다..'

뭐 이런 생각들을 하며, 아이스크림 사달라 극성스럽게 졸라대는 아이들이 없던
신혼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에겐 달콤한 과일맛 아이스크림,
나에게는 이나영원빈의 결혼식이 연상되던, 푸른 벼와 어우러진 신혼부부의 그림같은
사진 한 장이, 이날의 가장 좋았던 순간으로 남았다.

아이도 어른도 결국,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는 것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드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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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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