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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여행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유명한 관광지 외에도 일본의 공공 도서관을 꼭 한번 구경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만큼 일본의 도서관은 체계가 잘 잡혀있고 사서들의 전문성과
시민들의 높은 이용률, 서가의 배치, 서비스 등이 훌륭하다.
특히 각 지역의  어느 도서관이나 제법 큰 공간을 차지하는 어린이 도서관은
지난 반세기동안 꾸준하게 성장, 발달해 온 일본의 어린이책 문화를
공공 기관을 통해 만날 수 있어, 아이가 있는 가정의 부모들에게는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된다.

거의 매 주말마다 도서관 나들이를 하는 우리 가족에게
올해는 큰 즐거움이 하나 더 늘었다.
가장 자주 이용하는 가까운 도서관을 포함해, 3군데 정도를 번갈아 다니던 중에
우리집에서도 멀지 않은 곳에 새로운 공공 도서관이 생긴 것이다.
시설이 깨끗하고 쾌적할 뿐만 아니라, 서가에 꽂힌 책들 모두가 거의 새책이라는 사실!
홍보전단지에는 작은 도서관 규모라고 소개되어 있었지만,
약 7만권의 책이나 구비되어 있다고 했다.

이 도서관이 문을 연 이번 봄,
식구들과 함께 처음 찾아갔을 때, 와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초록 나무들이 창 밖을 에워싼 도서관 실내는 밝고 쾌적한 분위기와
고운 나무결의 책장에는 새책들이 정성스럽게 진열되어 있었다.
도서관 전체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넓은 어린이책 공간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국내외의 그림책들이 가득했는데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온 책들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문득, 좋은 도서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커다란 보석상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로 만들어진 다양한 보석들을 무료로 대출받고 반납할 수 있는 곳.
도서관은 시민사회가 만들어낸 가장 훌륭한 공공기관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새 도서관에서 무엇보다도 감동적이었던 건,
그림책 책장 위에 장식되어 있던, 인형들이었다.
아이와 어른이 모두 좋아하는 걸작 그림책들에 나오는 캐릭터를
손바느질로 직접 만들어 둔 것인데, 한국에서도 꽤 유명한
하야시아키코의 <은지와 푹신이>에 나오는 여우 인형이 특히 눈에 띄었다.
이 글 맨 위에 있는 사진이 바로 그 모습을 찍은 것이다.

이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사서가 직접 손바느질로 만든 것이라는데
인형에게 입힐 옷까지 손수 한땀한땀 정성껏 만들 만큼, 어린이책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사서가 있는 도서관, 그것만으로도 매력적이지 않은가.
인형이 입고있는 멜빵 바지에 달린 단추를 실제 그림책 그림과 비교해가며
열심히 고르고 있었을 인형을 만든 분의 마음을 생각하니,
그곳에 있는 책들이 더욱 더 특별하게 보였다.

이렇게 책과 도서관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독서환경이지 않을까.
"이렇게 인형을 이쁘게 만드시다니, 너무 대단하세요"
라고 말했더니,
"그림책 뒷표지에 있는 밑그림을 본떠서 만든 것 뿐인걸요."
하며 부끄러워 하시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독서교육은 크게
독서지도와 독서환경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15년이나 이곳에서 살며 느끼는 것은,
일본인들의 독서교육은 독후감을 비롯한 독후활동에 집중하는 독서지도보다
어린이를 둘러싼 다양한 독서환경을 가꾸는 일에 더 많은 공을 들인다는 사실이다.
억지로 읽고 쓰게 하거나, 독서와 연관된 평가나 상을 주거나 하는 일이
일본의 초등학교에서는 거의 없다.
여름방학 숙제로 추천도서를 읽고 독후감을 내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도 의무가 아닌 아이들 각자의 선택이다.

올해 13살, 초등6학년이 된 큰아이에게도
아주 어릴 때부터 그림책을 읽어주고, 함께 도서관을 다니고
꼭 갖고싶은 책은 서점에서 몇 권씩 직접 골아서 사주고 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내가 책이 좋아서 도서관을 자주 찾은 이유도 있지만,
아이들이 좀 더 좋은 책, 좀 더 많은 책과 만날 수 있었음 하는 바램과 욕심에
도서관 나들이만큼은 지난 13년 동안 꾸준히 해오고 있다.

그런데, 그동안 도서관을 통한 육아가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인 우리 부부 두 사람까지 많이 성장시킨 것 같다는 생각이
요즘 부쩍 든다. 집에 관심이 많은 남편과 나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주택 관련 책들을
오랫동안 읽고 함께 꿈꾸면서 2년 전에, 지금 살고 있는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하는
변화를 이뤄낼 수 있었다.
요즘 남편은 퇴직 후의 삶을 준비하고 꿈꾸기 위해,
나는 올해부터 시작한 텃밭 농사와 연관된 여러 책들을 빌려와 참고하고 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고,
함께 각자 나름대로 즐길 수 있는 곳 중의 하나가, 우리 가족에겐 바로 도서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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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보낸 시간과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는 큰아이는
고학년이 되면서 학교 도서관의 도서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도서관 담당교사가 따로 있긴 하지만, 기본적인 대출과 반납이나
저학년들의 도서관이용을 돕거나 하는 일은
모두 5,6학년 아이들이 맡아서 하고 있다.
큰아이와 함께 도서위원으로 활동하는 친구들은 대부분 책을 무척 많이
읽고 좋아하는 아이들이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자극을 많이 받게 되는 모양이다.

일본 초등학교에는 학부모들이 자원봉사로 책 읽어주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학년말 즈음에 자원봉사 어머니들께 아이들이 감사의 메시지를 모아 쓴 작은 책자를
선물로 만든 일이 있었다.
도서위원인 큰아이는 그 책자의 표지에 그림과 글을 맡아 썼는데,
그림은 어떤 걸 그릴까, 제목 디자인은 어떻게 할까, 이런저런 구상을 해서 만들어갔다.
큰아이가 토토로의 그림을 그려넣은 위의 사진이 완성된 책자의 모습이다.

형식적인 독후활동보다,
읽어주신 책 중에 어떤 책이 가장 재밌었다, 어떤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며
그 대상에게 직접 마음과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이런 활동이
오히려 살아있는 독후활동이 아닐까.

5학년 때 담임선생님과의 면담에서 재밌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사회 수업 시간에, <세금은 꼭 필요한가>에 대해 조별 토론을 할 때
대부분의 아이들이 "세금은 비싸기만 하고 별로 필요도 없다."라는 의견을 냈을 때,
큰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세금이 없어지면, 도서관처럼 시민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시설도
없어질 수 있기 때문에 세금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선생님과 함께 웃으면서 이야기했던,
큰아이의 '세금과 도서관'에피소드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10년이 넘는 도서관 육아가 헛되진 않았구나.^^

그런데, 아무리 좋은 환경과 양질의 책을 제공해주어도
책을 그다지 즐겨보지 않는 아이들이 어디에다 있기 마련이다.
작은아이는 똑같은 독서환경에서 자랐음에도, 큰아이에 비해 지적인 호기심이나
독서량이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다.
스토리 중심의 책을 즐겨보던 큰아이에 비해
작은아이가 좋아하는 책들은 대부분, 엉뚱하거나 신기하거나 괴상하거나..
그런 책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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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들이다.
아들을 매혹시키는 책은 주로 해골이나 뼈, 근육, 혈액 혹은 우주, 별..
이런 내용이었는데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책들을 섭렵했던 큰아이에 비해
좀 아쉬운 느낌이 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고 나니, 아이들에게는
책을 자기 나름대로 만나고 즐길 자유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형제나 친구들의 독서수준과 비교하며 아이에게 부담을 주는 순간부터,
아이들은 급속도로 책에 흥미를 잃어가기 시작한다는 걸
결혼 전에 독서지도사 일을 하면서 숱하게 경험했었다.
지금 작은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바로 책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
자기만의 방식과 취향대로 책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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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도서관까지 가는 길가에서 만난 수국 꽃. 저만치 도서관 건물이 보이자 아이가 하는 말,

"엄마, 우리 동네 한 바퀴만 더 돌다가 들어가자." 둘째아이에겐 답답한 도서관 실내보다

초여름의 기운이 가득한 바깥이 더 의미있고 큰 도서관일 것이다.^^


도서관 육아와 연관한 꽤 좋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도서관 옆집에서 살기> -

국어교사인 부부가 쓴 가족의 행복한 독서 성장기를 소개한 책인데

가족을 위한 최고의 재테크 / 가족독서모임, 북밀리의 탄생 / 글 읽기에서 글 쓰기로 /

등등 가족의 생생한 독서경험담이 우리 가족의 이야기와 겹쳐 재밌게 읽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한 구절은


도서관 가는 길에서도 아이는 자란다.



책이 있는 곳, 책 속에서만 아이는 배우고 자라지 않는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 곁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책을 아끼는 사람들이 일하는 공간 속에서도,

좋은 도서관으로 가족이 함께 집을 나서는 길 위에서도,

아이는 충분히 자라고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다는 걸,

도서관 육아 13년만에 알게 되었다.


양으로 승부하지 않는 책읽기.

억지로 시켜 하는 독후활동의 부담을 덜어내 주는 것이,

아이들이 즐겁게 책과 만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이제 곧 여름방학이다.

우리 가족이 좋아할 만한 도서관을 골라 함께 도서관 육아를 즐겨보는 건 어떨까.

줄을 서지 않아도 되고,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이만한 가족 나들이 코스는 흔치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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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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