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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공간과 어떤 희망이 일치했을 때

우리는 그곳을 '집'이라 부른다.

             

               

 

우리 부부는 집에 관심이 많다.

여행을 통해 만났고 지금도 여전히 여행을 좋아하지만,

언제부턴가 집에서 즐기며 노는 것도 아주 좋아하게 되었다.

밖에 나가 돈을 쓰고 사람들 많은 곳에서 피곤해져 돌아오는 일요일 저녁이면,

왠지 모르게 우울해지고 마음이 허전했다.

 

그래서 밖에서라면 꽤 비싼 돈을 주어야 가능한 일들을

집안에서도 해결할 수 있도록 12년의 결혼생활동안 하나씩 장비(?)를 갖추었다.

성능이 좋은 오디오나 베이킹이 가능한 오븐, 소박하지만 기분전환할 수 있는

인테리어 소품이나 책, 마음에 드는 식기, 원두를 금방 갈아 마실 수 있는

커피 관련 도구들... 

집안에 있으면 언제든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쉬는 날이면, 일단 집을 쾌적하게 치우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아이들과 함께 피자를 만들어 먹고,

원두를 갈아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려마신다.

비오는 날이면 호떡도 구워먹고

여름이면 이중창이 없는 베란다(지진영향으로 일본 아파트는 이중창이 없다)

는 야외 테라스같아서  채소도 키우고 그 옆에 돗자리도 펴고 논다.

네 식구가 푸짐하게 먹고 마시고 해도 집에서라면 다 공짜다.

경제적인 이유뿐 아니라 우리 곁엔 어린 아이가 늘 있었으니,

사실 집만큼 편한 곳은 없다.

 

이건 우리집만 그런 게 아니다.

소비가 미덕이던 시대를 지나 장기간 불황이 이어지는 일본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제법 오래전부터 '밖'이 아닌 '집'에서

즐거움을 찾기 시작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들을 갖추고 홈파티를 연다거나

밖에서 만나던 약속들을 집으로 잡아 각자 만든 요리와 마실 것을

지참해 편하게 즐기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다.

여행도 친척, 친구 가족과 함께 하는 캠핑을 선호하는데

전반적으로 나가서 돈을 쓰던 문화에서 이제는 자기 스스로 해결하며

불필요한 지출을 최대한 줄이는 소비문화가 정착된 듯 하다.

또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도쿄는 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도시니

한 푼이라도 아끼지 않으면 생활을 이어나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밖보다 집에서 많은 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분위기 탓인지

정리정돈, 수납 등과 연관된 책들이 서점가를 몇년째 휩쓸고 있다.

<인생이 두근거리는 정리정돈>같은 재밌는 제목의 책들은

소유와 물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고  

집을 투자의 대상이 아닌 일상의 공간으로서 바라보게 해 주고 있다.

나 역시, 단순히 큰 집, 좋은 집으로 집을 바라볼 게 아니라

작고 낡은 집이라도 그 집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최대한 끌어내

활용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일본 아파트는 20평이 조금 넘는 작은 집이긴 하지만,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해서 큰 불만은 없다.

네 식구의 짐이 점점 늘어 스트레스가 될 때도 있지만,

입주자 공동 시설도 갖추고 있고 무엇보다

아이들 친구가 많아 이사를 생각하기 어려웠다.

좀 다른 형태의 집을 꿈꾸면서도 이미 적응된 아파트의 편리함을

버리기도 힘들어 여기서 좀 비좁더라도 오래 살자 싶었다.

 

그런데 남편도 나도 마흔이 넘으면서 좀 많이 달라졌다.

더 늦기 전에 절실하게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이루어보고 싶었다.

막연하게 이런저런 집이면 좋겠다..하는 얘기를 취미생활처럼 즐기던

우리는 작고 작은 집이더라도,

손바닥만하더라도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 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름대로 즐기며 그럭저럭 만족했던 아파트의 삶이

역시 삭막하고 한계가 많다는 걸 깨닫게 되는 일을 요즘 자주 겪었기 때문이다.

누가 먼저 손 내밀어주길 기다리지 않고

내가 먼저 우리집 문을 열고 이웃 엄마들과 아이들을 불러

함께 어울리려는 노력을 참 많이 했다. 아파트가 가진 한계 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해 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10여 년동안.

그런데도 나는 참 외로웠다. 굳게 닫힌 문들을 보고 있으면

이런 게 정말 사람처럼 사는 걸까 하는 생각에 한숨이 나곤 했다.

 

그러니 더욱 벗어나야 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이게 현실도피는 아닐까, 하는 고민은 떠나지 않은채

일단 시간만 나면 집을 열심히 보러 다녔다.

 

하지만 예상대로 1년 가까이 보러 다녀도 마땅한 집을 찾기가 참 힘들었다.

어쩔땐 보기도 전에 실망할 준비부터 하는 자동센서(?)같은게

몸 속에서 작동하는 듯 했다.

집에 관심을 가지면서 남편과 나는 집과 연관된 책도 참 많이 보았는데,

건축가 승효상이 집에 대해 말하던,

 

- 영적 성장이 가능한 곳이어야 한다, 진실 선함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

- 가난한 집에 살더라도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감격하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감수성에 젖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숭고함마저 느껴지는 문장들이 실제의 '집 보러 다니는 일'과

그 과정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이 얼마나 어울리기 힘든 건지,

슬프도록 절감했다.

한번은 계약 직전까지 일을 진행했다가 그만 둔 적이 있는데

그때는 그냥 포기하고 지금 아파트에서 맘 편하게 살자 싶어

거실에 화사한 띠벽지를 사다가 붙이거나

아이들 새 책장을 들여 정리하거나 하며 마음을 접었다.

 

그런데!  사는 게 늘 그렇듯

일은 너무 가까운 곳에서 순식간에 벌어졌다.

그렇게 멀리 차타고 힘들게 발품을 팔며 돌아다녔는데

우리집 베란다에서도 내려다 보일 만큼, 가까운 곳에

주택단지를 짓기 시작하는 거다.

설마.. 했는데 하루가 다르게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보니

거짓말처럼 우리가 바라는 그런 모습의 집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완성된 몇몇 집을 둘러보고

돈문제를 비롯한 여러 현실적인 문제로

겨울이 지나는 동안 둘이서 끙끙 앓다가

결국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우리는 정말 '손바닥만한' 마당이 있는 집으로 새봄이면 이사를 한다.

 

집이란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일까.

인생의 가장 큰 규모의 쇼핑을 혹은, 대여료를 내면서도

제대로 활용은 못 하는 건 아닐까.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만큼,

그 안에서 열심히 살고 일하고 놀고 만들어 먹으며

풍성하게 살아낼 순 없을까.. 우리 가족만의 공간이 아니라

친구와 이웃과도 문턱을 낮추고 함께 나눌 순 없을까.

현관문을 열어두고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동네문화를 만들순 없을까.

 

앞으로 겪을 현실은 이런 나의 순진한 생각과 많이 다를 것이다.

그래도 해 봐야 다음 단계가 뭔지를 알 수 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성취하는 것들을 통해 만족하기보다

내 삶 자체를 통해 성취를 이뤄내고 싶다.

그리고 그 과정을 아이들과 함께 겪어보고 싶다.

 

이제 한달 후면 아침에 땅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집으로 간다.

그동안 이래저래 제한이 많았던 아날로그 육아를 원없이 실컷 해보리라.

아파트에서 주택으로 가는 길에서 한가지 깨달은 게 있다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일단 시작해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꿈이나 바램이 자기 안에서 어떻게 자라나고 변해가는지

지켜봐야 정말 하고 싶은 일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나는 그랬다.

미루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한발 먼저 내딛어 봐야한다. 롸잇 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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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에 이사가게 될 집 마당에 핀 수선화.  꿈.만.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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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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