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멀어도 

너무 가까워도 어려운 관계.

때로는 시댁보다 더 조심스럽고 까다로울 수 있는 관계,

바로 동네 엄마들과의 관계가 그렇다.


인간관계가 빈약해질대로 빈약해진 일본이지만

아이가 있는 엄마에겐 같은 지역이나 동네 엄마들과의 인맥은 무척 중요한데

아무리 자상한 남편이 있다 해도 이 관계의 역할만큼은 대신해 줄 수 없다.

사는 동네와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까지 같은 공통분모가

많을수록 그 관계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더 커진다.

그만큼 일본은 육아를 둘러싼 지역사회의 관계망이 치밀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긴장되고 조심스럽게 시작되는 관계지만

어느 정도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마음맞는 엄마 친구들을 사귀게 되면

동네에서 아이 키우기는 엄청 수월해진다.

동네 일대의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에 대한 각종 정보와 소문은 물론

최신 육아용품이나 사교육에 대한 무궁무진한 정보,

요주의 인물로 찍힌 엄마들 소문이나 동네 맛집에 대한 분석과 평가 ...

우리 동네에 처음 이사온 사람이라 해도 엄마들의 브리핑을 1,2시간만 들으면

동네의 전체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지 싶다.


무난하게 적응하며 이 네트워크를 잘만 활용하면

알짜배기 육아&교육 정보와 아이들의 친구는 물론, 즐거운 수다를 나눌 수 있는 엄마 친구까지,

비상시에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지만..

모든 관계가 그렇듯이, 이런 저런 예기치 못한 문제도 발생한다.

큰아이를 초등4학년까지 키우는 동안, 가장 어렵고 괴로운 순간의 대부분이

바로 이 엄마들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지난 10여년 동안 수많은 엄마를 만나고 겪었다.

친절하고 따뜻하고 위기의 순간에 구세주처럼 나타나 도와주는 엄마들도 있었지만

이기적인 엄마, 남의 좋은 부분만 이용하는 엄마, 내 뒤에서 욕하는 엄마,

자기 아이만 최고고 남의 아이는 안중에도 없는 엄마,

남의 아이를 자기멋대로 관찰하고 분석하는 엄마, 필요가 없어지면 관계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엄마..

이런 엄마들도 어쩌면 그저그런 평범한 엄마들이고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정말 용.서.할.수.없.는. 엄마들과 얽히게 되는 경우도 있다.

나 혼자만 얽힌 관계라면 냉정하게 돌아서면 그만이지만, 엄마들과의 관계가 그리 간단하지않은건

그 중간에 아이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큰아이를 키우면서 그런 경우를 2,3번 겪었는데,

내가 태어나 살면서 가장 고민을 많이 한 때가 그때였던 것 같다.

온통 일본인 엄마들 속에서 언어와 문화, 정서의 벽까지 내 앞엔 가로막혀 있어 매일이 힘겨웠다.


그런데, 그런 엄마들과의 힘든 과정을 내가 잘 극복하도록 도와준 것도

역시 동네 엄마들이다.

내가 가까운 선배 엄마들에게 조심스럽게 상담과 조언을 부탁했을 때,

"유리 엄마! 지금 너무 좋은 경험하고 있는 거야!^^"  하면서,

자신이 겪은 나보다 더한 사례를 얘기해주고, 아이도 엄마도 이런 경험을 통해

더 성숙하는 거라며, 아이도 일찌감치 이런 경험을 겪어두면 친구관계에서 더 강해지게 된다며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그때는 그런 말만이라도 그렇게 힘이 나고 든든할 수가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겉으론 담담하게 보이지만, 엄마들 모두가 이런 크고작은 상처들을 겪으면서

단련되어가고 있다는 모습들이 조금씩 느껴졌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생각하니, 모든 엄마들이 동지로 느껴지고 마음이 편안해 졌다.


처음 엄마가 되고나서,

'내가 이 아이만 아니면, 나와 이렇게 다른 사람과 억지로 맞추면서 노력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수도없이 많이 했었다.

하지만,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나는 깨닫게 되었다.

엄마들과의 관계도 하나의 사회고, 내가 사회에 나가 마음에 드는 사람만 골라 만날수 없듯이

이 세계도 그런 거라고.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골고루 다 만나면서

세상 경험을 두루 쌓는 기회로 삼자! 라고.


동네 엄마들과도 그렇다.

멀리 하고싶지만, 동네 놀이터에서 수퍼에서 학교에서 병원에서

예기치 않은 순간에 만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담담하게 대할려고 해도 그들과는 단 몇 마디만 나눠도 뭔가 이상하게 꼬이는 것 같고

뒷맛이 개운하지가 않다. 하지만, 이 노릇도 10년쯤하고 나니

그런 엄마들을 다루는 요령도 많이 늘었다. 당하기 전에 내가 먼저 약올리며 골탕먹이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나는 우리 동네에서 10년 가까이 살고 있고

큰아이가 이젠 초등 고학년에, 어느새 마흔이 넘은 베테랑 엄마가 되었다.


앞으로도 두 아이를 키우면서 겪을 일이 많겠지만

수많은 엄마들과의 관계를 통해 단련되고 나니,

어떻게 하는 것이 동네 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어가는 것인지 감이 생기는 것 같다.

좋다고 해서 너무 가까이만 하지 않고

마음에 안 든다고 너무 멀리하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 않게, 너무 멀지도 않게, 서로의 삶 사이의 거리를 적당히 유지하며

건강한 관계를 유지해 가는 게 오랫동안 잘 지내는 비결이 아닌가 싶다.


때론 비교와 질투로 돌아서서 마음 상할 때도 있을지 모르지만,

상대방 엄마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내 육아와 삶에 참고하며 서로 즐겁게 지냈으면 좋겠다.

얼마 전까지 살던 근처의 아파트 엄마들과는 한 달에 한번, 수다 모임을 갖고 있다.

달콤한 간식과 차를 마시면서 여자들만의 유쾌한 수다가 한 판 펼쳐지는데

2,3시간동안 남 사는 얘기 듣고, 웃고 울고 하다보면 뭔가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 든다.


DSCN2335.JPG


어제는 부엌을 거실 쪽으로 향하도록 집을 개조한 친구네에서 이 모임을 가졌는데,

아줌마들에겐 남의 집 구경하는 것만큼 재밌는 게 또 있을까.

새벽 4시에 일어나는 이 부지런한 엄마가 가꾸는 집안은,

냉장고에 아이가 더덕더덕 붙인 스티커마저도 이쁘게 보이게 만드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남의 삶을 기웃거리기 보다, 자기 삶과 일상에 집중하며 자신만의 육아월드를 소중하게

가꾸어가는 건강한 엄마를 만나고 돌아오는 날이면, 나도 더 잘 살고 싶은 의욕이 생긴다.


너무 가깝지도 않게, 너무 멀지도 않게 노력하는 관계도 좋지만

요즘같이 쌀쌀한 늦가을에는 그 어떤 망설임도 필요없고,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내 고향 부산 친구들이 그립기만 하다.


"저녁 아직 안 묵었제?

 아~들 데꼬 울집에 언능 묵으러 온나~"


뜨끈한 오뎅국 끓여놓고 이렇게 전화를 걸어오는

내 칭구들이 억수로 보고싶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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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희
배낭여행 중에 일본인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국제결혼, 지금은 남편과 두 아이와 함께 도쿄 근교의 작은 주택에서 살고 있다. 서둘러 완성하는 삶보다 천천히, 제대로 즐기며 배우는 아날로그적인 삶과 육아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무료로 밥을 먹는 일본의 ‘어린이식당’ 활동가로 일하며 저서로는 <아날로그로 꽃피운 슬로육아><마을육아>(공저) 가 있다.
이메일 : lindgren707@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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