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한창 무르익어가는 텃밭.
고구마와 땅콩 수확을 위해 육아모임 친구들이 모였다.
땅 위에서 열매를 맺는 채소들과 달리, 땅 속에서 자라는 뿌리 채소들은
파 보기 직전까지 아이들의 호기심과 기대를 부풀게 한다.
돌이 지난지 얼마 안 된 아이부터 어른들까지
무성한 잎을 걷어낸 밭에 쪼그리고 앉아 고구마를 캐는 내내
감탄과 탄성이 그치지 않았다.
색깔도 이쁘고 푸짐한 몸매에다 맛까지 좋은 고구마는 언제 보아도 경이로운 식물이다.
보라색의 고구마가 얼핏얼핏 보일 때마다 땅 속에서 보물이라도 찾은 듯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다.
고구마를 다 캐고 난 다음은 땅콩밭.
유치원에 다닐 때 고구마는 여러번 캐 본 경험이 있지만
땅콩은 처음 보는 아이들이 많았다.
땅콩은 그야말로 땅. 콩.
고구마에 비해 가느다란 줄기를 쑥 잡아당기니
주렁주렁 달린 땅콩 다발이 쑥 뽑혔다.
땅 속에서 땅콩 다발이 나올 때마다 아이들은
"우와, 땅콩 냄새다!!"
라며 외친다.
작고 오동통한 껍질 안을 까보니 연보라색 땅콩 두 알이 얌전히 누워있었다.
다양한 콩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누에콩> 시리즈 그림책을 재밌게 읽었던
둘째는 그 그림책 속의 콩들이 자기 몸을 싸고 있던 껍질을 침대로 만들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아주 즐거워 했다.
일본에서도 엄청 인기있는 <누에콩>그림책 시리즈의 작가는
어린 시절, 집 주변 밭에서 콩을 많이 키웠는데 그때 친근하게 보고 자랐던
콩들의 모습에서 이 그림책의 캐릭터를 떠올렸다고 한다.
어린 시절 경험한 자연과의 생생한 실체험과 교감은
어른이 되어 자신이 몸담은 분야에서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나 보다.
고구마와 땅콩을 다 수확하고 흙만 남은 밭에서
아이는 한참 뭔가를 하느라 몰두해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밭을 간다, 밭을 간다, 밭을 간다..."
는 혼잣말을 반복하며 흙을 고르고 있었다.
1학기 국어 교과서에 나온 옛날 이야기 중에
"할아버지가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아이는 그 구절을 직접 몸으로 겪어보며
스스로 느끼는 중이었다.
밭을 간다는 말이 아이의 내면에
추상적인 표현에서 구체적인 의미로 체화되는 순간이었다.
텃밭농사를 좀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아이들도 나도 좀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을텐데.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가들이 있는 젊은 엄마 둘은
벌써 둘째를 가졌다는데, 아이들이 텃밭에 오는 날은
너무 잘 먹고 밤에도 잘 잔다며 얼른 둘째까지 낳아
텃밭에서 굴리고(?) 놀리면서 같이 키우고 싶다고 했다.
사실, 부모로선 참 힘들고 괴롭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밖에 나가는 걸 무조건 좋아하는 시기는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다.
초등4,5학년만 되어도 아이들은 슬슬 밖에 나가는 걸 귀찮아하기 시작한다.
되도록 몸을 움직이지 않고 집안에서 인터넷이나 게임하는 걸 더 선호한다.
놀아달라고, 밖에 나가자고 매달리고 조르던 어린 아이는
어느 순간엔가 사라지고, 작고 네모난 화면에만 몰두하는 아이 모습에
한편으론 편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걱정과 불안이 앞서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유아기와 초등 시기까지만이라도
시간과 체력이 허락하는 한 아이들과 밖에서,
자연 속에서 지내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노력한다.
매주, 매번, 새로운 자연과 새로운 놀이를 찾아해메는 것보다
텃밭이라는 공간이 특히 좋았던 건, 그곳에서 놀이와 운동과 인간관계, 식사,
아이들의 자연학습은 물론 지능과 감성까지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아이를 키우며 어떤 대안적인 삶과 교육을 찾고 있다면,
이 텃밭 농사와 활동을 가장 먼저 권해주고 싶다.
아이들에게 좋은 건 둘째치더라도 어른이 정말 많이 배우고 변한다.
읽을수록 숙제가 쌓이고 생각이 복잡해지는 육아책 100권을 읽는 것보다
더 많은 걸, 나는 이 식물키우기와 텃밭에서 배운 것 같다.
가을이 꽤 깊었는데도 햇볕이 잘 드는 우리 텃밭엔
아직도 토마토가 주렁주렁 열매를 맺고 있다.
파아란 가을 하늘과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어쩌면 저렇게 동그랗고 색이 이쁜지,
하늘 한번 토마토 한번 보는 걸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일주일의 피로와 스트레스가 씻기는 기분이 든다.
꼬깃꼬깃 구겨진 마음이 환하게 펴지는 느낌이 든다.
그런 마음에 단비까지 뿌려주듯
아이들의 행복하고 건강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가을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밭에서 아이들은 엄마가 곁에 없어도
자기들끼리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곤충이나 벌레를 잡으며 즐거워한다.
그런 아이들 곁으로 겨울 채소들인 배추와 무, 시금치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더 어렸을 때, 더 빨리 이 곳에 데리고 나오지 못한 게 아쉽기만 한 큰아이를
텃밭에서 지켜볼 때마다 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어린 채소 모종처럼 작고 여렸던 아기가 언제 이렇게 자랐을까..
이제 겨울이 지나면 벌써 중학교에 가다니..
씨앗을 심은 게 엊그제같은데, 줄기와 잎이 무성하게 자라 이제 막을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텃밭의 식물들이 제각기 본연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자라듯
이 아이도 스스로 자라고 싶은대로 잘 클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잘 지켜봐주며 돌보고 싶다.
요즘 세상은 금수저와 흙수저로 아이들의 삶이 나뉜다지만
어떤 젊은이가 한 말처럼,
아이의 삶에 좋은 흙이 될 수 있는
가정의 텃밭을 잘 일구면 되지 않을까.
요즘 큰아이의 그림을 보면
이 아이가 뿌리를 내린 우리 가정의 흙의 질감이 느껴진다.
아이가 오랫동안 좋아했던 '라이언 킹'의 두 주인공을
가을색으로 그린 나뭇잎들로 에워싼 사랑스런 그림.
섬세한 잎맥 하나하나처럼
아이 내면에도 그런 섬세한 감성과 지성의 줄기들이
좀 더 깊게 퍼져갈 수 있도록, 건강한 흙을 만드는 부모가 되어라.
올해 텃밭 농사를 통해 배운 건 바로 이거다.
이만하면 육아책 100권보다
더 건강하고 명쾌한 가르침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