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규 19.jpg

 

"엄마, 엄마, 여기 좀 보세요. 내가 여드름이 났나봐요"

학교 다녀온 아들이 소파에 비스듬하게 누워 나를 부른다.

나는 아들이 들쳐 올리고 있는 앞머리 사이를 힐끗 바라보았다.

과연 뭔가 아주 조그맣게 돋아 있긴 하다.

 

"엄마, 여드름 맞죠, 그렇지요?"

"글쎄 그게 여드름인지 뭔지 잘 모르겠다만, 뭐 날때도 됬으니까 여드름이라 해도

이상할 리는 없지"

"아... 그런데 많이 나면 어떻해요. 여드름이 심해지면요."

"내가 보기엔 여드름이 심해질 것을 걱정하기 전에 자주 씻고 개인 위생에 더 신경쓰는 편이

나을것 같은데?"

아들은 내 말엔 아랑곳 않고 다시 거울을 보러 목욕탕으로 달려간다.

"이제 본격적으로 네 몸 안에 호르몬들이 변하고 있다는 증거야. 나이에 비해 빠른 것도 아니고

늦은 것도 아니고 지극히 정상이고...사촌 형아들도 중학교까지는 여드름이 나더니 고등학교 들어가니까 얼굴이 매끈해진던데?"

"정말요?"

조금은 안심을 하는 것 같더니 그 날부터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내가 쓰는 물비누로 얼굴을 씻는 것이었다.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었다. 손 씻는 것도 귀찮아해서 내가 확인하지 않으면 흐르는 물에

두 손만 대충 적시고 내빼는 녀석이었다. 세수도 하는 둥, 마는 둥 눈꼽과 침자국을 그대로

달고 학교에 가는 날도 많은 녀석이 집에 오자마자 손은 물론이고 비누로 얼굴을 씻다니...

어머나 세상에, 갑자기 아들 얼굴에 난 것이 다 반가와질 지경이다.

 

"엄마, 여드름 전용 세안제 좀 사주세요"

비누로 씻고 나온 아들은 이제 이런 부탁을 하고 있다.

"여드름에 바르는 크림도 있겠지요?"

이런, 이런..

겨우 한 두개 돋아난, 그것도 아직 여드름인지 그냥 지나가는 피부 트러블인지도

잘 모르는 것을 가지고 벌써 전용 세안제니 크림이니 하고 있으니 이러다간

조만간 피부과 예약해달라고 할 기세다.

 

워워..아들아, 좀 천천히 가면 안되겠니?

 

퇴근한 남편에게 이 이야기르 들려주니 대번에 콧방귀부터 뀐다.

"전용 세안제 찾기전에 제대로 씻으라고나 해. 목욕도 대충 대충

머리도 물로만 감는 녀석이 여드름 났다고 전용 세안제라니 나원 참.."

그래도 그날 밤 남편은 모처럼 아들과 욕조에 들어가 아들의 머리도 감겨주고

몸도 비누 묻힌 타월로 고루 문질러 주었다. 자꾸 자꾸 커가는 아들이

웃기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을 것이다.

 

"아빠는 어렸을때 여드름 얼마나 났어요?"

"아빠는 여드름  안나고 지나갔어"

"와, 다행이다. 나도 아빠처럼 그랬으면 좋겠다."

 

남편의 피부를 보면 썩 믿기지 않는 얘기지만 아빠랑 같이 목욕하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야말로 대학시절까지 심한 여드름으로 마음고생을 했던 것은 말 안해주기로 했다.

아들아, 피부는 엄마 닮지 않을거야.

 

"필규야, 여드름이 나기 시작하면 머리카락이 깨끗해야돼.

머리카락 끝에 먼지가 제일 많은데 지저분한 머리카락이 얼굴에 난 여드름에

자꾸 쓸리면 당연히 더 심해지겠지"

"그래요? 그럼 앞머리 짧게 자를래요"

 

호오.. 놀라워라. 머리를 기르겠다며 미용실 가자고 해도 미적거리는 녀석이

여드름때문에 머리도 짧게 자르겠다고?

 

호오... 이참에 여드르을 잘 이용하면 좀 깔끔해 지겠는걸?

 

저녁에 삼겹살을 아구아구 먹고 있는 아들에게 말했다.

"여드름이 나기 시작하면 육식은 줄이는 것이 좋을걸?

아무래도 기름진 음식을 자주 먹으면 피부에 좋을리는 없을테니까.."

"그럼... 엄마, 나 이제부터 고기를 끊을래요"

 

으하하. 이거 정말 대박이다. 고기라면 자다가 일어나서라도 먹는 녀석이,

고기향만 나면 채소도 한 접시씩 먹어치우는 녀석이 여드름때문에 고기를 끊겠다니말이다.

물론 말은 이렇게 해도 당장 눈앞에 노릇노릇 구운 고기가 있으면 참지 못하겠지만

이 녀석, 여드름때문에 피부가 상할까봐 어지간히 고민하고 있나보다.

 

세아이 12.jpg

 

열두살 가을을 살고 있는 사내아이는 아이에서 소년으로 성큼성큼 가고 있는 중이다.

얼마전엔 몽정을 하게 되었다며 으쓱거리더니 이젠 여드름이구나.

곧 변성기도 오고, 어깨도 벌어지고 키도 더 쑥쑥 자라겠지.

아직은 나보다 시선이 낮지만 머지않아 내가 올려다 볼 날이 오겠다.

 

여동생들 손을 잡고 아침길을 걸어가는 아들의  모습은 여전한 개구장이인데

내게로 다가와 척 하니 어깨에 손을 올릴때는 제법 청소년 티가 난다.

내 젖길을 처음 열어주던 첫 아기가 어느새 이렇게 자랐을까.

 

그나저나 아들에게 정말 사춘기가 온 모양이다.

스스로 씻기 시작하면 사춘기라더니 잔소리 안 해도 얼굴에 비누칠을 다 하고 말이다.

아들아, 아들아. 여드름나기 시작한 아들아.

조금 더 청결에 신경 쓰고 먹는 것에 신경 쓰면서 네 피부와 네 호르몬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기를 바란다. 열심히 응원하고 도울테니 네 성장기가

부디 고민과 괴로움은 적고 두근거림과 설레임이 더 많게 채워지기를...

 

유난히 뽀송하고 매끄러운 아들의 잠든 얼굴에 내 얼굴을 부벼보다가

이쁘고 고마워서, 건강하게 잘 커주는 것이 새삼 마음에 사무쳐서

나는 슬쩍 눈물을 찍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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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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