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실의 1989년 광고 데뷔작.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 » 최진실의 1989년 광고 데뷔작.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

 

남자는 단순하다고들 한다. 여자를 만족시키려면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가까운 것부터 먼 것까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한 관심이 필요한 반면, 남자는 잘 먹이고 잘 재우기만 하면 충분히 만족한다고도 한다. 남자가 무슨 돼지냐 싶은 생각에, 정말 그런가 돌아본다.

 

문득, 아내가 내게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느냐고 종종 묻곤 하는 일이 떠오른다. 말없이 뭔가를 응시하며 가만히 있으니 아내는 나의 사색을 짐작하지만, 사실은 아무 생각없이 ‘멍 때리고’ 있을 때가 많다. 머릿속에선 기껏해야 ‘저 물건이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저기 먼지가 앉았구나’ 하는 정도다. 그래서 “아무 생각 안 하는데”라고 솔직히 말하면 아내는 “말도 안 해준다”며 뾰루퉁한다. 하는 수 없이 아주 사소한 고민을 지어낼 때도 있다.


아빠가 된 남자도 비슷한 ‘오해’를 산다. 언젠가 “아빠 되니까 뭐가 좋아?”라는 질문을 받고 말문이 막힌 적이 있다. 정답을 찾느라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랑 꼭 닮은 아이가 이 세상을…”라는 답변이 떠올랐다. 새끼 낳고 저 닮았다고 좋아하는, 다분히 동물적인 답변이다. “내가 태어난 세상에 대한 의무를…”이라는 판에 박힌 말도, 내 삶의 의미를 종족 번식이라고 생각하는, 또 하나의 동물적 답변이다. “남들도 다…나도 숙제를…”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생각났지만, 내 아이들이 남들 따라 시작한 초라한 인생이 될 것 같아 입을 닫았다.


“나중에 아이랑 뭐하고 싶어?”라는 질문에도 난 쉬이 답을 못하겠다. 주위에 몇몇 물어보니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아들 가진 아빠 A는 고민 끝에 “같이 목욕탕에 가겠다”고 했다. 덜렁덜렁 같은 성(性)의 확인이 그렇게 하고 싶나. 아들 아빠 B는 “캐치볼”이라고 했다. 겨우 공놀이. “자전거 세계 여행”이라 한 아들 아빠 C는 그나마 나은가. 알고보면 그 사람 취미가 어차피 자전거. 딸 가진 아빠 D는 어리둥절해하다가 ‘결혼식장에서 손잡고…’라고 한다. 기껏 하고 싶은 게 잘 키워서 누구 건네주는 거라니. 딸 가진 아빠 E, F는 결국 답을 제대로 못했다. 역시나 연애 시절에 여자를 몰랐던 남자들. 딸은 클수록 점점 아빠의 생각 밖으로 뻗어나갈 텐데.


그런 생각이 복잡하게 혼재하는 상황에서 “그냥 다 좋지”라고 웃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상대는 “아빠 된 게 별로인가봐”, “아이랑 하고 싶은 게 없나봐”라는 슬픈 반응이 돌아온다. 임신이라 했을 때 그토록 기뻐했고, 태어난 아이를 받아 안을 때 눈물을 글썽였던 바로 그 아빠들인데, 아이가 자랄수록 당장 뭘 할지도, 앞으로 아이를 어찌 대할지도 모르는 것일까. 쳐다보는 상대의, 또 아내들의 눈빛이 서글프다.


남자가 단순하다는 건, 남녀간 연애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대목이다. 남자의 행동이나 말에는 숨은 뜻이 없으니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맥락이다. 이걸 아빠들의 ‘그냥 다 좋지’에 적용하면, 아빠 된 게 싫어서, 아이랑 하고 싶은 게 없어서가 아니라, 그냥 ‘아무래도 좋다. 지극히 좋다’는 얘기가 된다. 단순함을 믿지 않는 이들에겐 핑계로 들리겠지만, 좋은 걸 어쩌라고. 그렇다고 ‘멍 때리던’ 이유를 대라 하니 갑작스레 허접한 고민을 지어내던 실력으로, 이런저런 ‘좋은 이유’를 댄다면 만족하겠는가.


내가 여자라면, 이렇게 단순한 남자들에겐 ‘당신 도대체 왜 그러냐’고 들들 볶기보단, 적당히 ‘우쭈쭈’ 해주고 살살 달래며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란 게 이런 뜻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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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외현 기자
아이 둘의 아빠인 <한겨레21> 기자. 21세기 인류에게 육아는 남녀 공통의 과제라고 믿는다. 육아휴직 등으로 나름 노력해봤지만 역시 혼자 가능한 일은 아니며,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걸 어렴풋하나마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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