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와 함께 산 지 만 5년. 거리에서, 버스에서, 쇼핑몰에서 낯선 사람들이 불쑥 던지는 질문에 조금씩 더 익숙해져 간다. 사람들이 질문을 던지는 태도나 어조, 어휘에 따라 각기 대응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른데,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애한테 무슨 문제 있어요?” (What’s wrong with him?)
“아무 문제 없는데요.” (Nothing’s wrong.)
“애 다리에 무슨 일 있어요?” (What happened to his leg?)
“아무 일도 없는데요? 왜요?” (Nothing happened. Why?)
“애 다리가 왜 그렇게 커요? (Why is his leg so big?)
“태어날 때 이렇게 태어났는데요” (He was born this way.)
“(유모차에 탄 아이를 보며) 걸을 순 있나요?” (Can he walk?)
“그럼요. 점프도 하고 뛰기도 하는데요.” (Sure, he even jumps and runs.)
“뭐 때문에 다리가 그렇게 큰지 물어봐도 되나요?”
(May I ask what makes his leg big?)
“네, 이건 KT 증후군이라는 건데요, ( … 좀 더 길게 설명)”
(Sure, this is something called Klippel-Trenaunay Syndrome…)
이렇게 상대방의 어휘나 태도에 따라 그에 맞게(?) 대응하면, 상대방도 조금씩 다른 반응을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미안해하고, 어떤 사람들은 더 물어보고, 또 다른 사람들은 내 신경질적인 태도에 입을 닫는다. 특이한 건 우리와의 대면을 마치고 각자 제갈길을 갈 때의 반응은 대부분 하나로 통일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엄마가 참 대단하네요” (You’re such an awesome mom), “아이가 참 씩씩하네요”(He’s so strong) 하고 엄지 척, 해 준 다음 버스에서 내리는 걸 보면, 짜증이 일었다. 아니 날 얼마나 안다고 나더러 대단하다는 거지? 애가 씩씩한지 아닌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 걸을 수 있냐고 물을 땐 언제고?
사람들이 내 반응이나 설명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할 때, 그리고 “엄마가 참 대단하다”고 말할 때, 나는 화가 난다. 태어날 때부터 이랬다는 설명에, 고칠 수 없는 희소혈관질환이라는 설명에 사람들은 쉽게 ‘미안하다’고 말하는데, 대체 뭐가 왜 미안하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이가 그렇게 태어나서 안됐다는 걸까? 아님 너한테 아픈 상처인데 내가 괜히 물어서 미안하다는 걸까? 대단하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내 무엇이 대단해 보이는 걸까? 내 평소 생활이나 생각을 알지도 못하면서 어째서 그렇게 쉽게 ‘대단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가까이 사는 다양한 국적의 ‘엄마들’에게서 다른 이유로 그 말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차 없던 5년의 세월 동안, 버스를 타고 다니는 일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엄청 힘들기만 한 것도 아니었고, 재미있는 일도 생각할 거리도 많았는데, 어떤 엄마들은 도서관에서, 마트에서, 어린이집에서 나를 마주치면 “어떻게 버스를 타고 여기까지 다니냐”며 “대단하다”고 하고, “다음엔 내가 태워다 줄 테니 꼭 말하라”며 내 손을 잡고 눈을 반짝였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굳이 다른 사람과 일정을 맞추어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편이어서 그런 ‘호의’를 매번 거절하는 것도 내 편에선 감정적으로 굉장히 소모적인 일이었다.
내가 보기에 ‘대단하다’는 말 속엔, 누군가의 삶에 대한 어떤 평가가 이미 전제되어 있다. ‘내가 너와 같은 처지에 있었다면’ 이라는 가정이 ‘역지사지’를 위한 것이기만 한 건 아니다. 때로 사람들은 그 가정을 무기로 삼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내가 아이에게 정성을 쏟고, 아이의 ‘다름’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뒤에서 지켜보는 모습을 보며 주변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말할 때, 나는 그 속에서 그런 폭력을 마주한다. “어쩜 그렇게 아이를 인내심 있게 대하니, 대단하다”하고 말하는 친구에겐 나도 때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들 때가 있다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고, “어쩜 이렇게 아이가 구김살이 없니, 대단해”하고 말하는 친구에겐 “얘도 다리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날 있어”하고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 “내가 너라면 그렇게 못했을 거야, 대단해”하고 말하는 친구에겐 ‘그럼 뭐, 당신은 아이를 방치하거나 같이 죽기라도 했을거란 말인가?’ 하는 고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혹은 심지어 선의로 던지는 말에도 나는 왜 이런 ‘고까운’ 마음을 느끼는 걸까, 내가 유독 꼬인 사람이라 그런걸까, 싶은 때가 많았다. 그런 생각이 깊어가던 어느 날, 내게 ‘네 잘못이 아니야’하고 말해주는 책 한 권을 만났다. 출생 당시의 후유증으로 일부가 마비된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해릴린 루소(Harilyn Rousso)는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Don’t Call Me Inspirational)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미안해요’라는 타인의 말은 ‘어디가 불편하세요?’라는 말 만큼이나 대처하기 어려운 말이다. (나의 장애를 밝혔을 때 그에 대한 반응으로 돌아오는) 미안하다는 말에는 내 삶에 대한 어떤 평가가 들어있다. 내 삶이 좋을 수도, 나쁠 수도, 혹은 둘 다일 수도, 둘 다 아 닐수도 있는 평범한 삶이 아니라 어딘지 ‘미안’한 삶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뜻이다. . . . 대부분 의 사람들에게 누군가의 장애는 가치중립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93)
작가이자 페미니스트 장애운동가인 그가 강연이나 포럼에 연사로 참여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반응을 묘사해 놓은 대목을 읽으면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다가와 “대단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미안하다며 얼버무리는 사람들. 해릴린 루소는 “내게 대놓고 적대적인 사람들보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만날 때 나는 더 화가 난다”고 말한다. 그가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그리고 남들이 제멋대로 붙인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꼬리표를 단 작가로, 장애 활동가로 살면서 들어온 말은, 바로 내가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KT와 함께 살며 버스를 타고 온 동네를 누비고 살면서 들어온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뭘 모르는 사람들과의 친밀한 조우 무슨 문제 있어요? 정말 대단하네요! 태어날 때부터
이랬어요? 어디 아파요? (직접 묻지 않고 부모에게, “아이가 어디 아픈가요?”) (부모에게) “이 애, 좀, 발달이 늦죠?” (몸을 가누기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며) 혹시
취했어요? 정말 용감하시네요! 내가 당신이었다면 절대 집밖에 안 나갔을 거예요. 나였다면 죽고 싶었을 것 같아요. 선택할 수 있다면, ‘정상’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나요? (물론
당신은 지금 이대로도 잘 살고 있지만 말이죠) 엄마랑 같이
사나요? 직업은 있고요? 섹스는 할 수
있나요? 남자친구 있어본
적 있어요? 남자친구도 장애인이었나요? 아니면 엄청
대단한 사람이었거나 말이죠. 정말 안됐네요. 이렇게 예쁜 여성분이 (그런 장애를 갖게 되었다니)! 용기가 정말
대단하시네요! 요즘은 그래도
장애인들 살기 많이 좋아졌지 않나요? (17) 다른 이를, 다른 이의 삶을 보며 ‘대단하다’고 찬사를 보내는
일은, 비난하고 무시하고 욕하는 것만큼이나 무지하고 무례한 일일 수 있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아직 잘 모르는 것 같다. 그 ‘뭘 모르는
사람들’에게 꼭 이 책을 쥐여주고 싶다. 잘 모르면서 함부로 넘겨짚지도 말고, 역지사지를 핑계로 ‘내가 당신이었다면’ 이라는 말을 하지도 않는, 그런 사람들이 필요하다. 먼저 구하지도 않은 도움을 굳이 주겠다고 나서지 않고, 도울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하다며 눈물 짓지도 않는, 그런 친구가 필요하다. 그저 필요할 때 있어주고, 도움을 요청할 때 거절하지
않는 정도면 된다. 그리고 사정상 도움을 줄 수 없는 형편이라면 그냥 거절하면 된다. 평범한 사람들 모두 평소에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장애가
있다고 해서, 고칠 수 없는 질환을 갖고 있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당신들의 삶보다 더 비극적인 건 아니다. 우리의 용기가 당신들의 용기보다 더 대단한 것도
아니고, 우리 아이가 당신 아이보다 특별히 씩씩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 ‘대단하다’는 흔한 말은 이제 그만
거두어주시라. -- 읽은 책: 해릴린 루소,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