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 저녁 노을이 질 무렵이면 어머니 손을 잡고 집 밖으로 나섰다. 어머니 한 손은 나의 손을 쥐셨고 다른 손으로는 장바구니를 들고 있으셨다. 어스름한 시간 어머니 손을 잡고 재래시장을 가던 때, 자가용은 꿈조차 꿀 수 없었던 시절, 작은 발을 옮기며 문밖으로 나섰다

  높은 언덕 위에 집이 있어 갈 길은 멀었지만 재래시장으로 가던 길은 새로운 소풍길이었다. 집근처에서 볼 수 없었던 낯선 건물들과 낯선 사람들은 미소를 담은 낯선 상상을 불러왔다. 비온 뒤 맑은 저녁 공기를 맞으며 집에서 멀리 떨어진 문방구와 담장이 높은 집들을 만날 때면, 새 장난감을 바라보고 넓은 집에서 지내는 상상을 했다.

 

  어머니는 자주 생선가게를 들렀다. 생선가게에 들린 날이면 우리 집엔 김치맛이 밴 고등어가 상 위로 올라왔다. 어머니는 어느 가게를 들르시더라도 물건을 살 때에는 주인과 여러마디 대화를 주고 받으셨다. 어머니는 길게 말씀하셨지만 가게 주인의 말은 짧았다. 어느 가게에 들어가시더라도 더 싼 값에는 안 돼요?” 라거나 과일을 한 두 개라도 더 주세요라는 부탁의 말씀을 잊으신 적이 없으셨다

  어머니께서 물건값을 깎으시려고 하실 때면 가게 밖에서 서성대며 여러 생선이나 과일이 신기한 듯 구경을 했다. 가끔씩 가게 주인은 손님인 어머니를 향해 볼멘소리를 했는데 그 소리가 두려웠다. 어머니께서 흥정을 할 때마다 주인의 퉁명스런 말투가 들릴까 겁도 났고 한편으로는 창피하기도 했다.

 

 가슴 졸이는 흥정이 오고 갈 때에도 주위 가게에선 막바지 물건을 팔기 위한 소리가 각자의 박자에 맞춰 들려왔다. 삶을 향한 긍정과 의지가 떨이라는 목소리에 담겨 공기 중에 퍼지면 그 묵직한 긍정적인 삶의 의지는 어린 가슴을 뛰게 했다. 그 소리는 씩씩하게 지내라고 속삭이는 듯 했고 힘든 일이 있어도 일어서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런 상인들의 목소리가 있는 재래시장이 좋았다.

  어둠이 하늘을 모두 덮으면 가게 앞에 매달린 주먹만한 크기의 전구는 붉은 빛을 밝혔다. 다시 어머니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이웃들을 만나 고개 숙여 인사하는 법을 배운 공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재래시장으로 가는 길은 어머니와 함께 추억을 하나씩 간직하게 했다. 어머니는 당시 가난의 기억을 가슴 아파하셨지만 어머니와 함께 손을 잡고 함께 갔던 재래시장은 따뜻한 목소리를 담은 그림으로 여전히 가슴 속에 아직도 남았다.

 

  아홉 살 민호가 떡볶이를 먹고 싶다란 말을 할 때면 어머니 손이 떠오른다. 30여 년이 지나 아빠가 된 나는 이제 어머니 손 대신 작은 아이의 손을 잡는다. 내 작은 손은 어머니 손이 되어 아이의 손을 감싸 안는다. 아이가 좋아하는 떡볶이 가게는 재래시장에 있었다. 저녁을 다 먹은 뒤 아이와 함께 향하는 재래시장도 저녁 어스름한 시간이었다

  재래시장 안 떡볶이 가게. 그 곳은 한 어머니가 수 개월 된 아이를 등에 엎고 힘든 몸을 이끌고 떡볶이를 팔았던 곳이었다. 그렇게 지난 시간이 무려 33년이라고 했다. 서로 다른 재래시장에 있었지만 떡볶이 가게 아주머니는 33년 동안 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버티며 자녀들을 키워냈고 다른 재래시장를 어머니와 함께 갔던 어린 나는 그 사이 아빠가 됐다

  아빠와 아이 자전거가 떡볶이 가게 앞에 나란히 서는 날, 우리 두 사람은 비닐로 가려진 문을 열고 들어가 좁은 나무 의자에 나란히 앉는다. 재래시장은 예나 지금이나 주먹만한 전구로 어둠을 밝히며 저무는 하루를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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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게로 들어온 아이가 먼저 주문을 했다. “아줌마, 떡오찰순곱 주세요.” 장난기가 발동한 아이는 세로로 읽어야 할 메뉴판을 가로로 읽고 혼자 깔깔대며 웃는다아줌마, 볶쌀대창 주세요. 아니면 이뎅대음음 주세요라고 주문을 했다.

  밖에서 먹는 음식은 조미료가 많을 것 같다는 생각에 외식을 하지 않는 편이지만 떡볶이 가게만큼은 예외였다. 아이가 좋아하는 떡볶이가 있어 좋았고, 그 가게가 재래시장 안에 있어 좋았고, 사람향기 가득한 분위기가 있어 좋았다. 그리고 떡볶이와 오뎅을 한껏 먹은 뒤 볼록하게 나온 아이의 배를 쓰다듬을 때 느낌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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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은 기억을 담는 마법을 지녔다. 시간이 지나고 사람은 바뀌어도 공간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 예전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아둔다. 비슷한 공간은 내가 직접 방문했던 공간을 떠올리게 하고 기억 속의 공간은 그 공간이 간직했던 소리와 촉감과 느낌을 다시 불러온다. 때로는 상처의 공간은 나를 힘들게 하지만, 따뜻했던 공간은 지난 시간과 오늘을 연결짓고 나와 주변을 돌아보게 한다

지나간 것이 따뜻하게 그립다면 그 공간은 그 따뜻한 그리움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어린 내가 어머니를 부끄러워했던 것처럼 아이도 내가 모르는 어떤 불편한 감정을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아이가 추억을 간직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을 간직하는 공간. 한 공간에서 한 사람이 상대를 향한 진심이 짙을수록, 상대를 향한 관심이 깊을수록, 상대와 머무는 시간이 길수록, 그 공간은 그 진심과 관심과 시간의 크기만큼 기억을 오래 간직할 것만 같았다. 아이가 먼 훗날 그 언젠가 쓰다가 버릴 물건을 사랑하기 보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관심과 진심을 주고 받으며 시간을 보내는 일이 더 소중하다는 걸 배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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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30여 년이 흐른 뒤 민호가 자신의 아이와 손을 잡고 추억을 담는 또 다른 공간 안에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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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를 만들고 다듬느라 35년을 흘려보냈다. 아내와 사별하고 나니 수식어에 가려진 내 이름이 보였다.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고 기자 생활을 접고 아이가 있는 가정으로 돌아왔다. 일 때문에 미뤄둔 사랑의 의미도 찾고 싶었다. 경험만으로는 그 의미를 찾을 자신이 없어 마흔에 상담심리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 지은 책으로는 '지금 꼭 안아줄 것' '나의 안부를 나에게 물었다'가 있다.
이메일 : areopag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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