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대첩.jpg

 

열 일곱 아들은 라면을 좋아한다. 특히 비빔라면을 좋아한다.

주말에 기숙사에서 돌아오면 제일먼저 비빔라면 부터 찾는다.

방학중에도 라면 사랑은 끝이 없어서 하루 한끼는 꼭 비빔라면을 먹어야 했다.

반 나절 넘게 자고 일어나서 라면부터 찾을 때는 속에서 천불이 나곤 한다.

그놈의 라면 라면... 정말 징그럽다.

3월 4일에 두 딸은 개학을 했지만 아들이 다니는 대안학교는 개학이 4월 1일로 늦춰졌다.

개학일을 맞이해서 태극기라도 달고 싶었던 나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이었다.

두 딸 마저 없는 집안에서 다 큰 아들과 한 달을 더 지지고 볶아야 하다니..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아들은 개학 기념으로 점심 모임에 나갔다가 2시가 훌쩍 넘어

돌아왔을때도 여전히 자고 있었다.

나가서 점심 잘 먹고 돌아왔는데 또 한 번 점심상을 차려야 하는 일의 귀찮음을 엄마들은 안다.

꾹 참고 깨워서 밥 한 공기 먹였더니 바로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시작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단해서 잠시 누웠다가 딸들 픽업해 왔더니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개학날이라고 들떠서 6시부터 일어나 집안을 돌아다니던 막내 때문에 나까지 일찍 일어나

종종거렸던 하루였다.

잠시 눈 좀 붙였다가 여섯시쯤 일어나 저녁식사 준비를 하려고 하는데 필규가 주방으로 와서 서성거린다.

"라면, 먹을래요"

"무슨 소리야. 지금 저녁 준비할건데.."

"저녁으로 뭐 하실 건데요?"

"김밥 싸려고 재료 사왔어"

"김밥엔 라면이죠. 라면 먹고 김밥 먹으면 되겠네"

"아, 진짜... 기껏 저녁 준비할 시간에 라면을 먹겠다고 하면 어떻해. 안돼"

"저는 라면 먹어도 저녁밥 먹을 수 있다고요. "

"그럼 동생들은? 니가 라면 먹으면 동생들은 안 먹고 싶을까? 그럼 저녁밥은 누가 먹어?

힘들게 식사 준비 하는데 라면 먹겠다고 하면 준비하는 사람이 얼마나 힘 빠지는지 알아?"

"알았어요. 그럼 안 먹으면 되겠네요. 밥 안 먹을래요. 저는 제 방에서 초코파이나 먹죠 뭐!"

필규는 눈을 부라리다가 이렇게 소리 지르고는 제 방으로 들어가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았다.

툭 하면 라면을 먹겠다고 하는 통에 방학 내내 몇 번이나 속을 끓였다. 기껏 반찬 만들어 차려 놓은

밥상에서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식구들 잘 시간이 되면 나와서 라면을 끓이는데 그 시간엔

배가 출출한 동생들까지 라면 냄새에 먹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 바람에 여러번 속이 뒤집어 졌는데

이렇게 눈치없이 또 식전에 라면이라니..

가뜩이나 개학으로 일상리듬을 다시 조이고 바꾸느라 몸이 고단했던 하루 동안의 스트레스가

아들의 도발로 터져 버렸다.

불려 놓은 저녁쌀을 압력솥에 앉혔는데 윤정이까지 비빔라면 먹고 싶다고 내게 묻는다.

남편도 저녁을 먹고 온다는 전화를 해 왔다. 내가 정말 밥은 왜 하나 싶었다.

빈정이 제대로 상해 버렸다.

"맘대로 해. 다들 라면 끓여서 알아서 먹어. 엄마는 저녁밥 안 해!" 소리를 지르고 주방을 나와 버렸다.

밥 하는게 무슨 소용이 있어, 다들 라면만 찾는데.. 밥 한끼 차리려면 얼마나 애써야 하는데 허구한 날 라면이나 찾고.. 아.. 정말 짜증나!!! 다들 라면만 먹고 살아!!!

생각할수록 열불이 나서 씩씩거리고 있는데 눈치만 보고 있던 윤정이가 비빔라면을 끓이기 시작한다.

윤정이는 그야말로 어쩌다가 라면을 먹는 아이인데 괜한 불똥이 튀었다. 그런 걸 알면서도 비빔라면에 넣을 오이 하나 제대로 못 썬다고 타박을 했다. 한 번 꼬인 마음이 좀처럼 풀리지가 않는다.

윤정이는 만화책을 보며 비빔라면을 맛있게 먹는데 어차피 김밥은 글렀지만 압력솥에서 익어가는

밥 냄새를 맡고 있자니 나라도 제대로 된 밥을 먹어야지... 생각이 들었다.

잔뜩 화가 난 마음으로 냉장고에서 시들어가는 시금치 한 봉지를 꺼냈다. 물로 씻어 뿌리를 다듬고

끓는 물에 데쳐서 찬 물에 헹구고 칼로 잘게 쪼개어 꼭 짠 후 양념을 넣어 무쳤다.

나물 하나 무치는 일도 이렇게 손이 많이 가고 힘든데 이렇게 차린 밥상보다 라면을 더 반기니....

지들 손으로 한 번이라도 다섯 식구 먹을 밥 한끼 차려 보라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 다음에 독립해서 맨날 라면만 먹어보라지. 갓 무친 나물 한 접시 있는 집밥이 얼마나 생각나는지..

고생을 안 해봐서 그래..

애쓰는 사람 마음 같은 거 신경도 안 쓰고 철딱서니 없이 그저 제가 먹고 싶은 것만 찾으니 원...

속으로 끝없는 잔소리가 이어졌다.

시금치 나물은 맛있게 무쳐졌다. 이룸이를 불러서 나물이랑 밥 먹자 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어제 볶아놓은 애호박 나물에 시금치랑 김이랑 반찬을 차리다 보니 아들 생각이 났다.

저렇게 놔두면 또 한밤중에 기어 나와 라면 끓여 먹겠지.. 아... 증말...

방금 무친 시금치 나물에 밥 먹으면 참 좋겠는데...

아들 방에 가서 문을 두드렸다.

"필규야, 문 열어봐"

"싫어요"

"문 좀 잠깐 열어봐"

"왜요!"

"얼굴 보고 할 말 있어. 잠깐만 열어봐"

아들은 마지못해 문을 열고 앉아서 나를 노려본다.

"엄마랑 밥 먹고 후식으로 비빔라면 먹자, 어때? 콜?"

노려보던 아들이 씨익 웃더니 내 손을 잡았다.

"에이, 단식 투쟁 하려고 했는데... 아니구나, 간식투쟁이구나"

녀석의 옆에는 초코파이 빈 봉지가 수북했다.

"단식은 개뿔. 아주 간식으로 배 채우고 있었구만"

아들은 큭큭 웃으며 방을 나왔다.

"계란 후라이 좀 해"

"아, 나 계란 못 깨는데?"

"그러니까 하라고. 계란도 못 깨면 어떻해"

아들은 툴툴 거리면서도 계란 세개를 깨서 후라이 했다.

나물에 김치에 김과 계란 후라이까지 저녁상이 푸짐해졌다.

 

라면 대첩2.jpg

 

일부러 꾹꾹 눌러 담은 잡곡밥을 아들은 푹푹 떠서 먹는다.

시금치 나물도 잘 먹고 왠일로 별로 안 좋아하는 애호박 나물도 여러번 집어 먹는다.

한바탕 성질 부린 것이 미안한게지.. 흥 녀석. 그래도 밥 잘 먹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풀린다.

녀석은 밥 먹으면서도 식탁아래로 내 발을 자꾸 건드리며 장난을 한다.

갑자기 알콩달콩 꿀이 떨어진다.

에구... 조금전까지 날이 섰던 마음이 흐믈흐믈 다 녹아버렸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건 알아가지고는.." 중얼거렸더니

"훗" 아들은 나를 향해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저녁을 그득하게 먹고 남편이 돌아온 밤 열시 무렵, 아들은 비빔면 두개를 끓여(정확히 말하면

막내를 시켜 끓이게 해서) 오이 하나를 썰어 넣고 김에 싸서 맛있게 먹었다.

왜 이 시간에 라면이냐고 묻는 남편에게 나는 아들과 벌였던 라면 대첩을 신명나게 읊어 주었다.

마지막 한 가락까지 알뜰하게 훑어 먹은 아들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이 비빔라면이요. 두 개를 먹으면 약간 모자라고, 세개를 끓이면 조금 남거든요.

하나 더 끓일까요?"

"안돼!!! " 나는 소리를 꽥 질렀다.

"아이... 조금 모자란데?" 아들은 빙글빙글 웃으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아주 엄마를 들었다 놨다 하는 녀석이다.

이리하야 아들은 오늘도 비빔라면 두개를 맛있게 먹었다.

이런 실랑이를 한 달은 더 해야 개학이렸다. 하아...

반 나절은 잠으로 보내고, 라면을 너무 사랑하고, 밤 새 잠 안자고 만화책을 보는 열 일곱살 아들..

엄마랑 사이 좋게 좀 지내자. 3월은 아직 길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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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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