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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하고 나서 맞는 명절은 정말 달랐다.
 신씨 가문 셋째 딸에서 강릉 최씨 둘째 며느리로 바뀐 내 신분 때문이었다.
 처녀적엔 명절 아침에만 조금 일찍 일어나서 청소와 음식 차리는 일을 돕다가
 시집간 자매들이 인사하러 오면 함께 밥 먹는 일로 잠깐 분주했을 뿐 자매들이 돌아가면
 오후엔 나도 시내로 놀러가곤 했었다. 함께 놀 친구들이 없으면 혼자 영화를 보기도 했다.


 며느리의 명절은 당일의 문제가 아니다.
 적어도 명절 일주일 전부터는 준비를 해야 한다.
 우선 시댁 식구들 선물을 산다.
 시댁 식구들은 자주 볼 수 없기 때문에 오랫만에 다 모이는 설과 추석에는 꼭 서로 선물을 하는 가풍이 있다.
 서울에 계신 시이모님을 모시고 이모부님 산소에 벌초를 가는 일도 중요하다.
 이모님은 딸 하나만 두고 40대에 청상이 되신 분이라 가장 가까이 사는 조카인 우리 남편이
 늘 아들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남편의 고향은 강릉이다.
 나는 대관령을 구비구비 넘어 강릉 향교에서 전통혼례를 올리는 것으로
 강릉 최씨 집안의 둘째 며느리가 되었다.
 시부모님은 아들만 셋을 두셨는데 남편은 둘째 아들이지만 출가는 제일 늦어서 우리 아이들이 제일 어리다.
 형님네 아이들이 셋, 동서네 아이들이 둘, 그래서 다 모이면 애들만 여덟에 어른이 여덟이다.
 적은 숫자는 아니다.


 시집을 가서 맞는 명절은 단순히 식구들이 모두 모여 안부를 묻고 제사를 올리는 날만은 아니었다.
 명절이란, 무엇보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자손들의 성장을 확인하는 날이었다.
 키가 얼마나 컸는지, 학교생활은 어떤지, 건강은 어떤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집안의 모든 어른들에게 선 보이는 자리기도 하다.
 그래서 명절때 아이들의 컨디션은 아주 중요하다.
 그동안 내내 건강했다가도 명절 때 감기 걸려 데리고 가면 아이들 단도리를 잘못한 엄마가 된다.
 우리 아이들 셋도 여름내 건강했다가 일교차가 커진 요즘 콧물에 기침을 하는 녀석들이 있어 걱정이 된다.
 손주들을 끔찍히 아끼시는 어머님은 아이들 온 몸에 생긴 모기 물린 자국에도 한 소리 하실것 같다.
 '에미가 애들 모기 물리지 않게 챙기지 않고서는...'
 이쁜 몸에 남은 자국들에 마음을 상하실게다. 
 아아~ 얄미운 모기들.


 학교에서 공부는 잘 하는지, 시험은 잘 봤는지, 무슨 상을 타고 어떤 대회에 나갔는지 같은
 온갖 성취들이 줄줄이 나올것이다. 요 대목에선 엄친딸 수준으로 탁월한 성과를 올리고 있는
 동서의 맏딸이 가장 빛날 것이다. 학교 성적으로는 울 아들이 내밀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지만
 어머님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키가 쑤욱 커서 안심이다.
 다섯살 윤정이는 언제나 야무지고 똑 부러지는 말 솜씨에 길고 반짝거리는 머리칼로 칭찬을
 듬뿍 받고 있고 게다가 한창 꽃처럼 피어나는 이룸이가 있으니 든든하다. ㅎㅎ


 부모님 드릴 용돈도 넉넉히 준비해야 한다.
 어머님은 매년 고추를 직접 사서 햇볕에 말려서 질 좋은 태양초 고춧가루를 만들어
 추석때 챙겨 주시곤 했는데 올해는 고추값이 너무 비싸서 고생을 많이 하셨단다.
 고춧가루 값도 챙기고 명절 쇠는데 쓰실 용돈도 챙겨야 한다.
 그동안 여기 저기 글 써서 얻은 원고료가 한 몫 하겠다.
 내가 번 돈이라고 드리면 더 좋아하실 게다.


 '내려갈 땐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나'도 고민이 된다.
 제사는 큰댁에 가서 드리는데 형님은 큰댁에 갈 때마다 꼭 맏며느리로서 어울리는 얌전하고
 정숙한 옷차림을 하시던데 젖먹이 아이가 있는 나는 아무래도 편한 옷을 입기 마련이다.
 어쩌면 형님과 동서는 한복을 입을지도 모른다. 어머님이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형님과 동서는 내가 봐도 정말 타고난 효부 며느리다.
 어머님의 뜻을 늘 살펴서 기뻐하시는 대로 하려고 애쓴다. 난....잘 못한다.
 한복만 하더라도 늘 젖먹이가 있어 나만 평상복을 입고 가곤 했다.
 올해도 예외가 없겠다. 올 여름엔 티셔츠 두 어개 새로 산 게 고작인데 추석에 내려갈 것을 대비해서
 얌전한 옷이라도 한 벌 사야하나... 고민중이다.
 평소에 옷차림에 별로 신경쓰지 않고 늘 후줄근하게 지내는 게으른 며느리라 발등에 불 떨어졌다.


 그러나 역시 무엇보다 체력과 컨디션 조절이 중요하다.
 시댁에 내려가는 일부터가 막히고 밀리는 차 안에서 세 아이들과 씨름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도착도 하기 전에 지치기 일쑤다.

 시댁에 가면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고 계속 움직이고
 열 여섯 명 식구의 먹을 음식과 명절 음식을 만들고
 큰 댁에 가서 일 해드리고
 친척집 돌며 인사하는 강행군을 해야 한다.
 여기에 밤마다 식구들에게서 나오는 빨래를 해야 하고 청소에 정리도 만만치 않다.
 그동안 게으르고 불규칙하게 생활하던 내게는 아주 고된 일정이다.
 결혼하고 몇 해동안 명절에만 내려가면 변비에 두통으로 고생을 했다.
 명절 때만 찾아오는 증상들이다.
 갑자기 바뀐 생활리듬에 몸과 마음이 따라가지 못해서 생기는 증상이다.
 이제 이런 증상들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한 번 다녀오면 며칠씩 힘들어서 고생을 한다.
 사실 힘든 일의 대부분은, 손이 워낙 빠르고 부지런한 형님과 동서가 다 하고
 나는 옆에서 돕는 것이 고작이지만 도무지 눈썰미가 없고 요령이 늘지 않아 
 내려갈 때마다 일 순서를 헤매고 실수하느라 몸 고생이 많다.

 형님과 동서는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도 않고 수 많은 일을 척척 해내면서 식구들 빨래도 나오는대로
 다 손으로 비벼 빨고 밤에는 곯아 떨어질 것 같아도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그간의 회포를 푸는 막강 체력 소유자들이다.
 어린애가 있다고 일도 제일 적게 하는 나는 빨래도 챙겨간 가방에 따로 모아 온다.
 처음엔 형님과 동서 흉내 낸다고 손으로 비벼 빠는 시늉을 했는데
 평소에도 손 빨래를 잘 안 하는 나이다 보니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것처럼,
 힘들고 어려워서 포기했다.
 게으른 며느리 소리 들어도 할 수 없다고 단념하고는 빨래 가방에 다 챙겨 온다.
 게다가 젖 먹이느라 술도 못하니 형님과 동서의 술 자리에 끼지도 못한다.
 어머님은 술을 안 마시더라도 같이 술자리에 앉아서 얘기도 하면서 함께 즐기기를 바라시지만
 내 저질 체력은 도무지 버티지를 못한다. 그래서 늘 정없고 저만 챙기는 며느리가 되고 만다. ㅠㅠ


 결혼하고 한동안은 명절에 시댁에만 다녀오면 마음이 많이 상하곤 했다.
 생활 스타일이 너무 다른 형님과 동서 사이에서 내 역할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양육 스타일이 너무 달라서 오는 스트레스도 컸다.
 오래 안 만났던 대가족이 한 집에 모여 며칠씩 함께 지내다보면 불편하고 다른 일이 너무 많았다.
 그렇지만 그런 어려움들도 세월이 지나니까 조금씩 편해졌다.
 이젠 형님과 동서도 내 스타일을 아니까 조금씩 접어 주는 것들이 생기고
 아이들도 크니까 싸우고 아웅다웅하는 것들도 줄고 불편해도 익숙해지는 것들이 주는 편안함이 생기는 것이다.
 더디긴 하지만 요령이 는 탓도 있겠다.


 이젠 연세가 많이 드신 시부모님의 건강도 늘 염려가 되고, 손주와 자식들에게 손 벌리기 싫어
 아직도 기를 쓰고 품일을 다녀가며 용돈을 버시는 어머님도 짠하다.
 애를 셋이나 낳고 보니 이미 나보다 먼저 세 아이를 반듯하게 키워 오신 형님에게 진심으로 고개도 숙여지고
 알뜰하고 재주 많기로는 둘째가면 서러울 살림꾼 동서에게도 감탄과 고마움이 든다.
 자주 만나지 못하는 사촌들과 재미나게 어울려 노는 아이들 모습도 좋고, 제일 어린 우리 아이들을
 아끼고 이뻐해주는 조카들도 고맙다.


 구정 때 찾아 뵙고 무려 반년 만에 가는 시댁이다.
 비가 한없이 내리던 여름휴가 땐 찾아 가지도 못했다.
 1년에 두세 차례가 고작인 시댁 나들이라 이번엔 설레기도 하고 기대도 된다.
 이룸이가 이만큼이나 자란 모습을 보면 얼마나 흐믓해 하실까.
 좋은 모습 많이 보여 드리고 일도 좀 잘 하고 와야지... 다짐도 하게 된다.


 나도 아들을 하나 두고 나니까 어머님이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언젠가는 나도 시어머니가 될테고 내 집이 시댁이 될 것을 생각하면
 자식을 그리워하는 어머님의 마음이 언젠가는 내 마음일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고 오는 길이 멀고 가서도 힘들긴 하겠지만 이 다음에 나도 내 아들과
 멀리 떨어져 살게 되면 얼마나 그립고 보고싶을 것인가.
 내 며느리가 내 집을 불편해하고 어려워하면 나도 안스럽고 속상할 것 같다.
 지금 어머님 마음이, 훗날 나의 마음이다. 
 그러면 이해안 될 것도 없고, 못 할 것도 없다.
 잘 해드리고 오고 싶다.


 개와 닭들을 두고 며칠씩 집을 비우는 것이 맘에 걸리긴 하지만
 올 추석엔 정말 이쁘고 대견한 며느리로서 효도 많이 하고 오고 싶다.
 아아아~, 마음이 결연해진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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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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