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이 되자 녀석은 아침에 일어나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제 아부다비 가는 거야?”

“응, 이제 두 밤만 자면 아부다비 갈 거야.”

녀석은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여름휴가 계획을 잊지 않고 그렇게 불쑥불쑥 아부다비를 말했다.


녀석의 바람대로 그날은 왔다. 8월6일 토요일 저녁, 10시간의 비행 끝에 열사의 땅, 아부다비에 도착한 것이다. 녀석은 꿈에도 그리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4개월 만에 상봉했다.


그 4개월 동안 녀석은 많이 컸고 많이 변했다. “우리 아가”라고 예뻐해 주면 “아니야, 형아야”라고 주장하고, “김성윤 형아!”라고 불러주면 “네!”라고 씩씩하게 대답한다.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말라고 하면 예전에는 그냥 울어버리더니 요즘은 “그렇게 나쁘게 말하지 마, 아빠 나빠”라고 대꾸한다. 좋게 말하면 자아가 강해지고 표현이 확실해진 것이다.(나쁘게 말하면 기어오르려는 거고...) 




38b7fbe33b7633ffff68de2e311d7938. » 두바이 금시장에서 만난 상인과 악수하며 녀석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여느 아이가 그러하듯 녀석은 외가에서 더욱 강해진 자아를 선보였다. 모든 가족들이 낮잠을 자던 오후, 녀석은 아이폰으로 <로보카 폴리>를 보고 난 TV를 시청하고 있었는데, 녀석이 갑자기 슬그머니 일어나 TV를 꺼버렸다. 그리고 씩 웃었다. 집에서도 녀석은 여러 번 내가 보던 TV를 끈 적이 있었고, 반복되는 장난에 여러 번 주의를 준 적이 있었는데... 이건 도발이었고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난 정색을 하고 낮은 목소리로 나무랐다.


“아빠가 그러지 말라고 그랬지.”




녀석은 갑자기 “으앙”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자고 있는 아내에게 달려갔다. 아내는 “왜 또 싸우는데?”라며 녀석을 안고 내게로 왔다. 나는 녀석에게 “아빠가 뭘 어떻게 했는지 엄마한테 설명해봐”라고 했다.


“아빠가 아이폰을 껐어.”

“뭐라고? 이 녀석이 이제 거짓말까지 하네.”

 

달콤한 낮잠을 방해받은 아내는 훈계 조로 내게 말했다.

“애 아이폰 보는데 당신이 TV 보니까 시끄러워서 껐겠지.”

“꺼놓고 씩 웃었다니까. 그전에도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또 그런 거고. 하지 말아야 할 건 확실히 각인시켜줘야 하는 거라고.”

“애 울리는 거 엄마가 제일 싫어하는데 여기까지 와서 그래야겠어? 잘 좀 놀아줘. 둘이 한 번만 더 싸우면 가만 안 둘 거야.”

 

이건 완전히 큰아들 취급이군. 억울함과 비하감에 울컥했지만 참기로 했다.

그렇게 ‘조용한 관리’를 강조했지만 녀석의 ‘억지’에 아내도 결국은 폭발했다. 두바이의 한 쇼핑몰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데 녀석은 건너편 어린이 놀이방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한국에서 달고 간 코감기·목감기 때문에 입맛이 없어 보였지만 이날은 아침·점심식사량도 극히 적었다. 어떻게든 녀석을 꾀어서 밥을 먹여야 하는 상황. 그러나 녀석은 끝까지 식당에 들어오길 싫어했고 어렵사리 아기 의자에 앉아서도 울기만 했다. 결국 화가 난 아내는 녀석을 안고 식당 밖으로 나가 쇼핑몰 한쪽에 세워놓고 무섭게 훈계를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제압이 됐을텐데 이번엔 외할머니가 ‘출동’하셔서 둘을 ‘억지로’ 화해시킨 뒤에야 상황이 종료될 수 있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짝꿍이라는 아내와 녀석은 다음날 눈뜨자마자 또 부딪혔다. 줄줄 흐르는 콧물을 제 옷으로 훔치려 하는 녀석에게 아내가 “아빠가 휴지로 닦아줄 테니 옷으로 닦지 말라”고 말하자 녀석은 또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엄마, 나빠”라고 소리치며 주무시고 계시는 외할머니에게 달려갔다. 별 것도 아닌 일로 애를 울려버린다는 ‘오해’를 사게 되는 억울함을 아내도 느꼈을 법하다.

 

아부다비 성윤이 비비디바비디부. 녀석과 깔깔거리며 같이 하던 말놀이였는데 녀석은 진짜 아부다비에 와서 ‘생각만 하면 생각대로’ 뭐든지 이뤄지는 특별체험을 하고 있었다. 


외할머니라는 ‘큰 언덕’이 생긴 녀석이 초특급 어리광을 피우는 것인데, “다 그럴 때가 있는 것”이라고 장모님은 말씀하셨다. 그래, 매일 반복되는 어린이집 생활, 그리고 맨날맨날 늦게 들어오는 아빠는 있으나마나... 한국생활이 그동안 얼마나 팍팍했을까, 난 녀석의 ‘강짜’를 대범하게 이해하기로 했다. 난 1주일 만에 귀국했고 예정대로 녀석은 아내와 함께 1주일 더 머물기로 했다.

 

김성윤 형아! 오랜만에 외할머니 사랑 듬뿍 받고 어리광 실컷 피우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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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기자
서른두살 차이 나는 아들과 마지못해 놀아‘주다가’ 이제는 함께 잘 놀고 있는 한겨레 미디어 전략 담당 기자. 부드럽지만 단호하고 친구 같지만 권위 있는 아빠가 되는 게 꿈이다. 3년 간의 외출을 끝내고 다시 베이비트리로 돌아왔다.
이메일 : dokbul@hani.co.kr      
블로그 : plug.hani.co.kr/dokb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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