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키우는 엄마들이라면 공통적으로 하는 말들이 있다.
'울 애는 핑크만 찾아', '울 애는 완전 지가 공주인줄 안다니까..'
맞다. 모든 딸들은 가볍게든, 심하게든 핑크 공주로 지내는 기간이 있다.
첫 딸 윤정이는 이런것들이 심하지 않았다.
위로 오빠가 있어서 늘 같이 놀아서인지 여성스러운 면을 많이 가지고
있는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색을 핑크로 한다고 고집하거나
'공주' 코스프레를 하는 기간이 길지 않았다.
나 역시 립스틱 하나 제대로 바르지 않는 생얼엄마에 이쁘고 화려한
옷들은 아예 있지도 않은 수더분 엄마다 보니 엄마를 보며 흉내내고
따라하는 것들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막내 이룸이는 윤정이와 정말 다르다.
이쁜거 너무 좋아한다.
올 1월로 꼭 36개월이 된 이룸이는 요즘 '공주'에 완전히 꽂혔다.
계기는 세종문화회관이었다.
얼마전에 아이들 공연이 있어 세 아이를 데리고 갔다가 이룸이만
연령제한에 걸려 관람시키지 못하고 세종문화회관 내에 있는
어린이 방에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어린이 방은 크지 않지만 장난감과 책, 미끄럼틀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물건들이 잘 갖추어져 있었는데 거기에 이룸이가 완전
반한 '공주 셋트'가 있었던 것이다.
레이스가 달린 '공주 머리띠'부터 화려한 '공주 손거울'에
'공주 가방'까지 이룸이는 너무 신이나서 내내 그것들만 가지고
놀다가 공연이 끝나서 두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 할 때도 더 놀겠다고
고집을 피울 정도였다.
그곳을 다녀와서 이룸이는 매일 '공주 셋트'를 가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심지어는 자다가 일어나서 '곤주 드레쓰, 나는 없다구요'하며
울기도 했다.
1월이 생일이기도 해서 인터넷을 폭풍 검색한 끝에 아주 저렴한
공주 드레스에 마술봉, 공주 머리띠며 손거울까지 구입해 선물로
안겨 주었다. 얼마나 좋아하던지 매일 공주 드레스 입고 놀아서
빨 새도 없다.
머리도 묶지 못하게 한다. 공주들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려야 한단다.
그 긴머리로 밥 벅고 국 그릇에 머리칼 담그고 과일즙 묻어 끈적이면서도
머리를 묶어 놓으면 한사코 끈을 빼 버린다.
공주 드레스가 없을 때에는 종일 한복을 입고 살았다. 물려받은 한복이
몇 벌 있는데 이거 입혀달라, 저거 입혀달라 정말 시중들일이 많아서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공주놀이는 공주옷을 입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아침에 눈 뜨면 이룸이에게 묻는다.
'오늘은 바비야, 에이리얼이야, 라푼젤이야?'
'음...오늘은 .... 큰나나'
'큰나나? 그게 누군데?
'엄마, '하이디'에 나오는 클라라요'
필규가 웃으며 말 해 준다. 아.. 그 클라라.
그제서야 오늘의 키워드를 이해한 나는 이룸이를 '클라라'라고 부른다.
'클라라.. 밥 먹어야지, 클라라 쉬 안 마렵니?'
그러면 이룸이는 신이나서 달려오고, 제 딴에는 클라라스럽게 행동한다.
물론 클라라가 종일 갈 리가 없다.
조금전까지 클라라 였는데 어느 순간에 '에리얼'이 되어 있기도 하고
피노키오에 나오는 '파란 요정'이 되어 있기도 하니 말이다.
윤정이가 이맘때는 '삐삐와 아니카'가 되어 놀기도 하고, '토토로'의
'메이와 사쯔끼' 놀이도 한 기억이 나는데 확실히 이룸이는
예쁘고 치마입은 주인공들이나 '공주'를 좋아한다.
나갈때도 치마만 고집하고 그나마 몇 개 안 되는 내 화장품을
제일 많이 노리는 것도 이룸이다.
목욕탕이며 선반에 있는 크림이며 로션도 기가 막히게 꺼내어
온 몸에 치덕거리며 바르는 일도 흔하다.
외출할땐 제 가방에 갖가지 머리끈이며 리본들을 한 주먹씩
챙겨 넣고 집을 나선다.
첫 애와 '파워레인저'놀이를 하며 침대위를 뒹굴고, 둘째와
삐삐 놀이를 하며 이 방 저 방 뛰어 다니기도 한 나였지만
이젠 이 짓도 10년을 넘어가니 힘이 부쳐서 아이가 원하는 만큼
호응을 해 주는게 귀찮고 힘들다. 그런데 매일 매일 힘이 넘치는
막내는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공주로 태어나 있으니 늙은 엄마는
이래 저래 주름살이 는다.
아이는 '모방'의 천재라지만 이쁘거나 우아하거나 아름다운
것에 관해서는 별로 따라 할 것이 없는 엄마 밑에서 태어났어도
스스로 이쁘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딸의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다.
내가 단 한벌뿐인 겨울 치마를 입고 나서기라도 하면
'엄마, 정말 이쁘구나요' 하며 눈빛을 반짝이면서 제가 더
좋아하는 것도 막내딸이다.
몸에 뭘 바르는 것을 무지 무지 좋아하고, 메니큐어를 너무
좋아해서 온 집안에 흔적을 남겨 놓는 딸이지만
별로 이쁘지 않은 엄마에게서 요정처럼 귀엽게 태어나
저 혼자 이쁘게 크고 있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핑크에 치마만 고집하는 것도 정말 한때라고, 좀 크면
놀기 바빠서 바지만 입을려고 해서 오히려 밉기도 하다고
선배 엄마들은 일러준다.
그래, 그래...
공주 시중들고 맞장구 쳐 주며 놀아주는 것도 잠깐이겠지.
더구나 이룸이는 제가 공주고 엄마가 왕자라서 엄마랑
결혼하겠다는데 이런 대접을 지금아니면 또 언제 받을까.
그러니까 늙은 엄마는 다시 힘내서 하루에도 수시로
이 공주에서 저 공주로 바뀌어 주시는 막내딸과 뒹굴어야지.
늙은 엄마의 최대 관건은 역시 체력이구나...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