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다 지나고 물난리를 겪었다.
추석 즈음 폭우 내렸을때 잠깐 시내에 있는 마트에 다녀왔더니 온 집안이 물투성이였다.
깜짝놀라 2층으로 달려가보니 아뿔싸.. 베란다끝에 있는 자그마한 배수구가 또 낙엽에 막혀
차 오른 물이 2층 거실로, 계단 사이로, 부엌 벽틈으로 흘러 넘치고 있었다.
재빨리 배수구에 쌓인 낙엽을 걷어내고 베란다의 물을 뺀 후 집안에 고여 있는 물을 퍼 내고 닦았다.
말은 쉽지만 정말이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두 딸들은 돕는다며 옆에서 철벅거리고 나는 쓰레받이로 물을 걷어내고 걸레에 적셔 짜내느라
이사한 후 가장 힘든 대청소를 해야 했다.
한 여름 장마철도 무사히 잘 넘겼는데 가을에 이런 물난리를 겪다니...
이 집은 잠시도 긴장을 늦출 틈을 안 준다.
이사 첫 여름에 비가 너무 많이 새서 여름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보수공사를 했음에도 낡은 집에서 빗물이 새어드는 곳을 완전히 잡을 수 가 없었다.
가뜩이나 산 아래 옹벽을 치고 지은 안방은 제일 습하고 눅눅해서 장마철엔 옷장안에
넣어 둔 옷들위까지 곰팡이가 내려 앉는다. 바닥은 물 위를 걷는 것 처럼 축축한 여름나기가
호되게 추운 겨울보다 더 힘든 집이다.
오래되고 축축한 집은... 당연히 벌레가 많다. 이젠 어디서 어떤 벌레가 나타나도 그러려니 한다.
올 여름처럼 뿌리파리가 창궐하면 정말 괴롭긴 하지만 그럭저럭 벌레들과 같이 사는 것도
이력이 나고 있다. 다만 현관까지 들어왔던 커다란 들쥐만은 절대 사절이지만..
집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넓은 밭들은 또 어떤가.
농사를 다 지을 수 도 없거니와 심어 놓고도 제대로 건사할 수 도 없는 넓은 땅들은
늘 풀들이 쉽게 점령해 버린다. 풀이 우거지면 뱀이 집 마당까지 나타나고 풀모기들도 극성이다.
여름에 어머님 상을 당하고 49제를 지내는 동안 주말마다 김천의 절까지 제를 모시러 다니느라
농사도 작파하고 풀도 못 베었더니 탈상하고 와서 돌아본 집은 그야말로 사방이 밀림이었다.
개천절도, 주말도 남편은 제초기를 들고 집 주변 풀을 베느라 땀을 한 말을 흘렸다.
나도 한동안 손을 놓았던 집 정리를 하느라 며칠을 고생했다.
손대기 시작하면 일거리는 산처럼 많다. 넓고 오래되고 애들과 집짐승들은 많고
밭도 많은 우리집은 온통 힘 들여 해 내야 할 일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낭만만 가지고 주택 생활을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속에서 지내는 만큼 치루어야 할
댓가는 만만치 않다.
그래서 이 집을 나가면 다시 아파트로 들어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물론 절대 절대 아니다.
이 집은 수십가지 불편함이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모험'이 넘치는 집이기 때문이다.
차 타고 멀리 가서 만나는 체험장이나 캠핑장 같은 곳에서 이벤트처럼 만나는 모험말고
일상이 그냥 모험이 되는 그런 집이란 말이다.
우선 갖가지 동물들이 나타나는 집이다. 윗 밭에 사는 두꺼비나 밤 마다 울어주는 소쩍새가
그렇고 마당 어귀까지 내려왔다가 푸드덕 날아가는 커다란 꿩도 놀랍지만 며칠전엔
맷비둘기 새끼가 마당의 데크에 나타나 아이들이 가까이 다가가도 날아가지 않아서
사진까지 다 찍을 수 있었다. 우리가 '까망이'라고 이름붙여준 청솔모는 요즘 잣나무
위에 매일 나타난다. 까망이가 대충 파 먹고 집어 던진 잣송이들에서 사발로 가득찰만큼
많은 잣 열매들을 얻었다.
담이 없어서 온 동네 개들이 다 놀러오고, 길냥이들도 심심치 않게 나타나고,
나비 도감을 사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종류가 다양한 나비들이 온 사방을 날아 다닌다.
새들은 또 얼마나 많이 날아오는지..
덕분에 감수해야하는 위험도 물론 있다. 남편은 벌써 말벌에 두 번이나 쏘였고, 얼마전엔
땅벌에도 쏘였는데 작은 땅벌의 침이 얼마나 지독한지 손이 며칠씩 와락거리며 쑤셨다고 했다.
아이들이 쏘이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정말 아찔했다.
유혈목이가 애들 노는 마당까지 나타난 적도 있고, 아랫동네에선 세탁실까지 뱀이 들어와
119대원들이 출동했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그래서 아이들은 마당에선 되도록 장화를 신고
놀고 풀 숲엔 잘 들어가지 말라고 단속하고 또 한다.
그렇지만 목욕하러 들어간 욕조안에서 쬐그만 청개구리를 발견하는 일이나,
어쩌다 열린 문틈사이로 잠자리가 들어와 한바탕 즐거운 소동이 일어나는 일이나
뒷 마당에 풀어 놓은 닭들이 앞 마당까지 진출하는 바람에 닭보고 날뛰는 개들을 진정시키며
닭 몰아 뒷마당까지 가는 일들도 즐거운 모험이다.
요즘 큰 아이는 안방 지붕위에 올라가 감 따는 재미가 생겼다.
안방은 별채처럼 집 옆에 따로 단층으로 들이고 지붕을 올렸는데 그 지붕에 올라가면 주렁주렁
열린 감들이 그냥 손에 잡힌다. 경사진 곳이지만 미끄럽지 않아서 윤정이도 이룸이도
같이 올라가 지붕끝에 앉아 오빠가 따 준 감을 먹는다.
이른 봄에 여린 쑥을 뜯는 일부터, 초여름 앵두와 오디를 따 먹는 일, 가을부터 밤을 따고
늦가을까지 감을 딸 수 있는 집이니 무얼 더 바라겠는가.
최근엔 새로 들어온 개, 복실이가 낳은 새끼들과 노느라 학교에서 집에만 오면
개집을 떠나지 않는다.
어른한텐 일이 넘치고 시내도 멀어 가끔 볼 일을 보려면 멀리 나가야 하지만
무엇보다 어린 아이들한테 신나는 집이라서 좋다.
계절이 생생한 집, 여러 사람들이 오 가는 집, 우체부 아저씨랑 신문 배달부 아저씨랑
택배 아저씨랑 친구가 되는 집이라서 좋다.
언제건 집주인이 요구하면 비워줘야 하겠지만 할 수 있다면 더 오래 오래 살고 싶은 집이다.
가을비 내리고 날은 추워진다.
머지않아 겨울날 준비에 또 바빠지겠지만 그땐 또 새로운 모험들이 펼쳐지겠지.
멀리 가지 않아도, 돈 들이지않아도, 굳이 시간내서 애쓰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모험이 넘치는 집이니 불편해도 괜찮다.
덕분에 나도 컴퓨터에 앉아 인터넷 쇼핑 즐길 시간도 없고, 시내에 있는 옷가게들이
세일을 하든 말든 신경 쓸 여유가 없이 바쁘게 살게 된다.
열심히 몸 움직이면서 애들하고 지지고 볶으면서, 개와 닭들 건사하면서
텃밭의 푸른 것들 챙겨가면서 하루 하루 살고 있다.
흰 머리도 늘고 잔주름도 왕창 생기지만 괜찮다.
가슴뛰는 일상을 누리는 중년 아줌마로 살 수 있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