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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인 '개그콘서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너는

박지선과 박성광이 출연하는 '크레이지 러브'다.

아무리봐도 키 작고 못 생긴 두 배우들을 매력남, 매력녀라고 설정한 것 부터

웃음을 자아내지만 결혼하고 한참이 지났으면서도 결국은 서로의 치명적인

매력에 다시 반하고 만다는 결론은 늘 내 배꼽을 잡게 한다.

 

이 코너의 첫 시작은 늘 같은 대사다.

남편이 자신을 더 이상 사랑하시 않는다고 생각하는 아내가

"이제 나 좀 놔줘!"하고 외치는 것이다.

남편한테 최신 핸드폰을 선물한 뒤 그 자리에서 바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남편이 받으면 "이제 나 좀 놔줘!' 한다거나, 어려운 외국어를 배웠다며

알아듣기 힘든 발음들을 쏟아내고는 뜻을 묻는 남편에게

"이제 나 좀 놔줘!" 하는 식이다.

매번 이 대사가 나오는 계기가 참 기발하고 웃기지만 사실 이 대사는 내가

아이들을 향해 오랫동안 마음으로 외쳐온 말들이었다.

 

이제 엄마 좀 놔줘!!!!

 

첫 아이 키워 학교에 보냈을 때 둘째는 네 살, 막내는 한 살

둘째까지 학교에 보냈을때도 막내가 다섯살이었던 까닭에 내 곁엔

늘 아이가 있었다.

아이가 이쁘고 사랑스럽기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지만

솔직히 늘 내 곁에 어린 아이가 있는 세월이 13년 동안 이어지다보니

가끔은 나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울컥 울컥 솟구치기 마련이다.

정말 읽고 싶은 책이 있어도 제 책 읽어달라고 매달리는 아이때문에 포기하거나

가끔은 까닭없이 울적해서 아무말 않고 싶을 때에도 옆에서 내 반응을 쉼없이

요구하는 아이에게 영혼없는 메아리같은 말들을 쏟아 놓을때도

혹은 밤 늦도록 일을 하고 난 다음날 정말이지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고 싶을때도

배고프다는 아이말에 좀비처럼 일어나 밥을 준비할때도

마음으로 '엄마 좀 그냥 놔 둬!!'를 얼마나 외쳤는지 모른다.

 

남편이 출장  간 날, 저마다 엄마 옆에서 자고 싶다는 세 아이들 때문에

자다가 서너번이나 일어나 잠자리를 바꾸던 밤에는 정말이지

이제 정말 엄마 좀 내버려 둬!!  하고 소리치고 싶었다.

 

사랑하지만 가끔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듯, 나와 아이들은

너무 가깝게 너무 오랫동안 함께 있었다.

 

올 3월에 드디어 막내가 병설유치원에 입학해서 매일 세 아이가 등교를 하게

되었다. 아침은 전보다 훨씬 더 바빠졌지만 세 아이가 모두 떠난 집에 들어서면

느끼는 그 자유의 맛이란...

혼자 있어도 빨래는 해야 하고, 청소와 설거지, 집안 정리며 이런 저런 일들이

넘쳐나지만 나 혼자 해 낼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신난다. 바쁠때 일에만

몰두할 수 있는 것도 얼마나 달콤하던지..

한참 설거지 하다가도 애가 부르면 달려가고, 한창 빨래를 비비던 중에도

애 한테 달려가던 세월에 비하면, 한 번 시작한 빨래며 설거지를 끝까지

마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자유의 맛은 달고 진하다.

 

잼 바른 빵에 견과류와 애들 먹는 유산균 음료 한잔을 접시에 담아

책상에 앉아 책을 읽어가며 먹는 아침도 행복하다. 애들에게는

밥 먹을 때 책 읽으면 안된다고 하지만 나는 혼자니까 내 맘대로 한다.

 

읽고 싶은 책, 쓰고 싶은 글, 하고 싶은 일의 목록은 한이 없다.

날이 풀리면 저수지까지 산책도 하고, 가까운 이웃들과 뒷산에도 오르고

혼자 살짜쿵 시내에 나가 봄 옷 구경도 하고, 텃밭에 질펀하게 주저앉아

흙도 고를 수 있게 되었으니 13년만에 이런 행복이 없다.

 

큰 아이와 막내는 오후 3시에 끝나고 둘째도 막내가 끝나는 시간까지

학교에서 놀며 기다리기로 했으니 이제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내 시간이다. 마을 조합의 자원봉사 활동도 있고, 이런 저런 모임에

얼굴을 내밀어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늘 아이를 달고 다니는 것에 비하면

나 혼자 다니고, 일하는 것은 그 자체가 자유다.

 

얘들아..

오후 3시까지 엄마는 자유부인이란다.

혹여나 그 시간에 엄마를 찾지 말아다오.

이제 엄마도 좀 놀아볼란다. 크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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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순화
서른 둘에 결혼, 아이를 가지면서 직장 대신 육아를 선택했다. 산업화된 출산 문화가 싫어 첫째인 아들은 조산원에서, 둘째와 셋째 딸은 집에서 낳았다. 돈이 많이 들어서, 육아가 어려워서 아이를 많이 낳을 수 없다는 엄마들의 생각에 열심히 도전 중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이 주는 가치, 병원과 예방접종에 의존하지 않고 건강하게 아이를 키우는 일, 사교육에 의존하기보다는 아이와 더불어 세상을 배워가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계간 <공동육아>와 <민들레> 잡지에도 글을 쓰고 있다.
이메일 : don3123@naver.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don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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