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전 초여름에 결혼식을 올리고 처음으로 추석을 지내러 시댁에 내려가서
큰댁에 차례를 지내러 갔던 일을 잊을 수 가 없다.
아버님은 3형제 중에 둘째인 까닭에 어머님은 위로 형님과 동서를 두고 있었는데
명절이면 나이 든 세 며느리들이 집안의 제사상에 올릴 음식을 만들고 차리는 일을
주관하셨다. 칠순이 넘은 큰 어머님과 환갑을 넘긴 어머님, 그리고 아직 환갑이 안 된
작은 어머님은 아마도 수십년은 더 해오셨을 일들을 젊은 며느리들에게 일러가며
해 내셨다.
과일을 깎고, 떡을 괴고, 어물을 놓는 것 하나마다 집안의 법도가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눈치껏 도우면서도 속으로는 한숨이 나오곤 했다.
내게는 모든 것들이 낮설고 어렵고 힘들었던 것이다.
늦은 나이게 결혼을 해서 모든 것이 서툴렀던데다 일가 친척이 모두 먼 곳에
살아서 명절은 늘 우리 가족끼리 단출하게 지냈던 것이 익숙했던 나에게는
시댁의 명절 풍경은 하나부터 열까지가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 사이에서 쩔쩔매면서도 내 몫을 찾아서 해 내야 했다.
큰 댁의 며느리 한 명과 둘째 집안인 우리 며느리 세명은 바지런히 어른들을
도우며 제사상을 차리고 서른명이 넘는 일가 사람들에게 아침상을 차리고
치우는 것이 큰 일이었는데 매 순간 어느 며느리가 일머리가 야무지고 부지런한지
드러나는 자리이기도 했다.
나와 나이가 같으나 8년 먼저 시집와 어머님께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침을 받은 형님과
강릉에서 태어나 고등학생 시절부터 시댁을 드나들며 서방님과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던 동서는 이미 일가 어른들에게서 일 잘한다는 칭찬을 자자하게 듣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시댁에서나 큰 댁에서나 형님과 동서는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했다. 나이들어 제일 늦게 시집을 온 나는 형님과 동서가
쌓아놓은 명성에 누가 될까과 마음을 졸여가며 몸을 놀렸다.
알아서 하는 일머리는 없었지만 뭐든 열심히 움직이며 일을 배워갔다.
2년전 갑자기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게 되자 큰댁에 가서 제사를 모시는 일은
끝이 났다. 대신 형님과 나와 동서는 남자와 아이들만 큰댁에 보내고
그 사이에 어머니 제사를 준비하고 제사를 보러 오는 일가 어른들 대접을
준비하게 되었다.
처음엔 너무나 부담이 되고 걱정스러웠으나 어머님이 하시던대로 척척
준비를 해 내는 형님과 동서에게 의지하며 조금씩 우리끼리 제사상을 차리는 법을
익혀 나갔다.
며느리들끼리 제사상을 차리게 되니 우리가 차린 제사상은 어머님이 며느리들을
얼마나 잘 가르쳤는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인 것을 알겠다.
처음 우리끼리 제사상을 차리고 일가 어른들이 제사를 모시러 오셨을때
큰 어머님이 부엌까지 들어와 이것저것 살펴보고 미흡한 부분을
야단 치실때엔 돌아가신 어머님께 어찌나 죄송한지 속상해서
속으로 눈물을 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형님과 동서는 집안에서도 알아주는 부지런함과 야무진 일머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어서 어른들께 야단을 맞는 일은 한번으로 지나갔다.
첫 제사엔 아마도 늘 긴장하고 더 잘 하라고 일부러 흠을 잡으셨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머님은 살아 생전에도 우리집 며느리들이 일 잘하고 어른들 공경 잘 한다는
칭찬을 제일로 여기셨던 분이다. 그래서 큰댁에 가도 늘 제일 힘든일은
우리가 하게 하셨다. 형님과 동서는 그런 어머님의 뜻에 따라 항상 먼저 나서고
제일 부지런히 움직였다.
집안의 제일 큰 며느리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을 큰 어머님께 의지하고 계신
큰형님과 나보다 늦게 시집 와 아직 경험이 부족한 작은댁 동서들에 비해
우리집 며느리들의 정성스런 준비와 노력은 집안의 어른들도
인정하신다.
제사상을 차릴때마다 상머리에서 정성스럽게 음식을 올리고 몇번이나
모양을 살피시며 조금이라도 더 보기좋게 다듬으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다행히 어머님의 뜻을 고스란히 받을어 최선을 다해
이어가고 있는 큰 며느리가 있고, 형님에게 순종하며 열심히 돕는
두 동서들이 있으니 어머님의 애달팠던 삶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있을 것이다.
처음 시집와서 큰댁에서 봤던 그 풍경처럼 이제 우리집의 세며느리들이
서로 도와가며 제사를 차린다. 아이들이 자라서 출가를 하고
새며느리들이 들어오게 되면 새사람에게 집안의 법도를 가르치고 물려주며
그 옛날 집안의 나이드신 세 며느리들이 그랬던 것처럼 수없는 제사상을
함께 준비하고 차리며 같이 나이들어 가리라.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제사를 형님이 가져가게 되면 더 이상 대관령 넘어
강릉 본가로 가는 날도 사라질 것이다. 강릉대신 형님이 사시는 곳으로
다니며 제사상을 차리게 될 것이다.
세월따라 제사를 모시는 모습은 달라질지 모르지만 어머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일러주신 그 정신을 잊지 않고 새겨가며 같이 음식을 만들고
먼저 떠난 부모님을 떠올리며 서로 더 애틋하게 의지하고 도우며
긴 세월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다 해야지..
애쓰신 형님과 동서, 그리고 나에게도 토닥토닥 마음의 위로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