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14, 미국 중부의 어느 작은 도시. 우연인 듯 운명처럼 찾아온 한 아이가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아이는 혼자가 아니었다. 클리펠-트레노네이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KT)이라는, 10만 분의 1 확률의 혈관 이상 질환을 온몸으로 껴안은 채였다. 갓 태어난 아이를 안고 분주히 움직이는 의료진의 발걸음 뒤로, 긴박하게 전해지는 샌디훅Sandy Hook 총기 난사 사건 뉴스가 귓전을 때렸다. 그날, 나는 내가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던져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여기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구나. 한 아이가 10만 분의 1 확률의 희소 질환에 걸려 태어나고, 같은 날 스무 명의 아이가 총에 맞아 죽는 곳." (<아이는 누가 길러요> 프롤로그 중에서)

 

조금 긴 이름으로, 조금 다르게 태어났지만 열심히 쑥쑥 자라던 아이 덕에 밤잠도 낮잠도 엉망이 되어 힘이 들던 2014 3. 아이 엄마인 나는 우연히 알게 된 온라인 공간 <베이비트리>속닥속닥게시판에 첫 글을 올리게 된다. KT를 한글로 풀어 쓴 케이티라는 이름을 필명으로 삼아서. 그 첫 글의 내용은 이러했다.

 

희소질환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제도적 장치, 그에 수반되는 경제적 문제, 의료, 아이 교육 문제. . . 그런 얘기들을 나눠보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인사합니다안타깝게도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태어난 수많은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을 생각하며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그들과 함께, 때로는 그들 대신, 그들보다 더 큰 목소리로 무엇이 힘들고 무엇이 문제이며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 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다른 부모들과 똑같이 겪는, 양육의 노고와 즐거움과 보람을 잊지 않고 나누는 그런 소소한 재미도 함께 누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첫 공적 글쓰기.’ 블로그를 하며 개인적인 기록을 틈틈이 남기긴 했어도 공개된 공간에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어떤 글을 내보이는 건 거의 처음이었다. 첫 글을 남기고 환영과 응원의 댓글을 여럿 받았는데,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월호 일이 터졌다. 그리고 그 직후 아이가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했다. 감기에, KT 신드롬 때문에 생기는 발바닥 통증에, 탈장 증상에, 오른쪽 배에는 역시 신드롬 때문에 생기는, 원인 모를 혹이 불룩 솟아 올랐다. 이리저리 동동거리며 열흘 남짓을 보냈다. 밤마다 잠 못 이루고 아파하는 아이 곁에서, 밤마다 까만 바다 속에서 울고 있을 아이들과 부모들을 떠올리며 괴로웠다. 하지만 먼 곳에서, 만 두 살도 안 된 희소질환 아이를 안고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 아이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정작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지만, 온라인 공간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은 내게 이런저런 응원과 교감의 말을 나누어주었다. 특히 오랜 벗이었던, 그리웠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많은 이들이 댓글로 함께 해주어 슬프고 그리운 마음을 다독일 수 있었다. (http://babytree.hani.co.kr/?mid=story&category=266661&page=4&document_srl=246224타지에 살며 아이를 데리고 병원엘 오가는 일상을, 기운 넘치는 만 세 살 아이와의 일상을 함께 보아주는 많은 사람들 덕분에 아이는 두 차례의 수술을 무사히 마쳤다. 아이는 어느새 만 다섯 살이 되었고, 우리의 삶에도 이런저런 변화가 생겼다. 남편은 박사 과정을 거의 마쳐가는 시점에 있고, 5년 넘게 버스를 타고 온 동네를 누비던 우리에게 오래된, 그러나 예쁜 빨간 자동차가 한 대 생겼다. 아이는 올해 8월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고, 엄마인 내겐 오랜 꿈이었던 작가이자 활동가로 살 수 있는 기회가 조금씩 조금씩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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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표지 그림 속 아이가 케이티예요. 자세히 보시면 오른쪽 발과 다리가...ㅎㅎ>


그동안 이 곳에서 만난 많은 분들께 진 마음의 빚을 갚고자, 그 이야기들을 묶어 책으로 만들어냈다. 아무쪼록 이 이야기가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 닿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왜 엄마들이 서로 만나는 것이 중요한지, ‘아이는 누가’, 어떻게 길러야 하는건지 함께 이야기하면 좋겠다. 어린 아이를 온종일 혼자 돌보며 독박육아에 지쳐가는 엄마들, 아이가 조금 다르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죄인이 되는, 세상에 불편이나 끼치는 존재로 취급 받는 엄마들, 오래도록 일터에 묶여 있는 엄마들, 기관에서 한꺼번에 많은 아이들을 돌보는 또 다른 엄마, 그 많은 엄마들이 만나는 계기를 이 작은 책이 만들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 짝짝이 신발을 신는 아이와 함께, 또 각자의 하루를 살아내며 만들어 온 생각들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엄마’로서만이 아니라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세상에 대해 품었던 어떤 질문들을 담아내려고 했던 만큼, 우리의 만남 역시 세상을 바꾸는 만남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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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

아니아니, 쓴 책:

서이슬, <아이는 누가 길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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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슬
'활동가-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막연했던 그 꿈에 한발 더 가까워진 것은 운명처럼 태어난 나의 아이 덕분이다. 아이와 함께 태어난 희소질환 클리펠-트리나니 증후군(Klippel-Trenaunay Syndrome)의 약자 KT(케이티)를 필명으로 삼아 <이상한 나라의 케이티> 라는 제목의 연재글을 썼다. 새로운 연재 <아이와 함께 차린 글 밥상>은 아이책, 어른책을 번갈아 읽으며 아이와 우리 가족을 둘러싼 세계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내 아이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함께 잘 키워내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도움이 되는 글과 삶을 꾸려내고 싶다.
이메일 : alyseul@gmail.com      
블로그 : http://plug.hani.co.kr/alyson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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